풍천위 임광재가 아비 임사홍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리다
"신의 아비 임사홍(任士洪)이 지나간 무술년864) 에 죄(罪)를 받아, 옥관(獄官)이 붕당(朋黨)을 교결(交結)하여 조정(朝政)을 문란(紊亂)하게 한 것으로 조율(照律)하게 되니, 이에 뭇사람의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나 화(禍)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있었는데, 성상(聖上)께서 천지가 생물(生物)하는 인덕(仁德)을 베푸시어 옥관(獄官)의 의율(擬律)을 쓰지 않고, 특별히 사형(死刑)을 감(減)하여 다만 귀양 가기에 그쳤으니, 신의 아비의 몸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신의 아비는 옥관(獄官)에게 죽고 성은(聖恩)으로 살아났으며, 뭇사람의 비방이 죽이고자 하였으나 성은(聖恩)으로 살아남을 얻었습니다. 그 일시(一時)에 함께 죄를 받은 자는 박효원(朴孝元)·김언신(金彦辛)·유자광(柳子光)에다 신의 아비까지 합쳐 네 사람이었는데, 박효원과 김언신은 이미 서로 이어 사망(死亡)하였으나, 유자광은 이미 공적(功籍)을 회복하고 또 작위(爵位)를 회복하였으며, 신의 아비도 또한 살아서 서울로 돌아오고 곧 직첩(職牒)을 받았으니, 성상(聖上)의 너그럽게 용서하신 은혜[鴻貸之恩]는 하늘과 땅처럼 망극(罔極)합니다. 성은(聖恩)이 이미 신의 아비의 몸을 재생(再生)하셨는데도 지금의 말하는 자는 매양 신의 아비의 무술년의 죄 받은 일을 지적하여서 오히려 인수(人數) 안에 낄까 두려워합니다. 신의 아비가 이미 우물에 빠졌는데, 어떤 자는 또 돌을 던지고자 하니, 신은 애통 박절(哀痛迫切)의 지극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매양 신감(宸鑑)865) 에 진정(陳情)하여 신의 아비의 좌사(坐事)의 정상(情狀)을 소송(訴訟)하고자 하면서도, 항상 신의 아비가 성조(聖朝)에서 버림받음을 가슴아파하며 일찍이 경각(頃刻)도 가슴속에서 잊지 못합니다.
이제 마침 사헌부(司憲府)에서 대비(大妃)께서 신의 아비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신 것을 가지고 장차 성은(聖恩)이 신의 아비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아뢰기를, ‘임사홍(任士洪)이 붕당(朋黨)을 교결(交結)하여 조정(朝政)을 탁란(濁亂)하였으니, 그 수령(首領)을 보전하게 된 것도 다행입니다. 대비(大妃)께서 비록 크게 안녕하시어 환궁(還宮)하신다 하더라도 또한 임사홍(任士洪)에게 작상(爵賞)을 가(加)하시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붕당(朋黨)의 논란(論難)은 이전(二典)866) 과 삼모(三謨)867) 에도 없는 바이고, 전조(前朝) 5백 년 사이에도 없었으며,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하신 후 1백여 년이 되었어도 또한 붕당의 일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붕당의 의논이 신의 아비에서 비롯되어 뭇사람의 비방이 분분한 것입니까? 신은 지극히 가슴이 아픕니다. 옛사람의 말에 있기를, ‘천하(天下)에 무형(無形)의 화(禍)가 있다. 참람(僭濫)함이 권신(權臣)이 아니면서 권신보다도 참람하고, 소요(騷擾)함이 도적(盜賊)이 아니면서 도적보다도 소요스럽다.’ 함이, 그 오직 붕당(朋黨)을 의논한 것입니다. 친족이면 족당(族黨)이라 하고, 교유(交遊)하면 유당(遊黨)이라 하며, 천거(薦擧)하면 인당(引黨)이라 하니, 이것을 들어서 다스리면, 족친(族親)이요 교유(交遊)요 천인(薦引)이니, 누가 당(黨)에 면함을 얻겠습니까? 옛날 한(漢)나라의 말기(末期)에, 중상시(中常侍)868) 가 이응(李膺) 등을 지목하여 당인(黨人)으로 만들어서 사사(徙死)·폐고(廢錮)된 자가 7백여 인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과연 당(黨)이겠습니까? 조송(趙宋)869) 에 이르러, 군사(群邪)870) 가 범중엄(范仲淹)·구양수(歐陽修)를 지목하여 당인(黨人)으로 만들어서 범중엄을 요주(饒州)의 지사(知事)로 폄강(貶降)하였으나, 인종 황제(仁宗皇帝)의 간사를 알아보는 총명을 힘입어 돌아오기에 미쳐서는 권우(眷遇)가 날로 융숭하였으며, 구양수(歐陽修)는 붕당론(朋黨論)을 지어 올려서 스스로 변명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구양수와 범중엄은 거의 한때에 붕당의 이름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며, 천년[千載] 뒤에 누가 이를 다시 알겠습니까? 오늘의 붕당의 의논을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아비는 오래토록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릇 지우(知遇)를 입어 발탁(拔擢)되어 정원(政院)에 두심이 전후(前後)하여 겨우 4년인데, 신은 감히 무슨 일을 하여서 조정(朝政)을 탁란(濁亂)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전하(殿下)의 일월(日月) 같으신 광명(光明)은 용광(容光)871) 도 복분(覆盆)872) 도 모두 비치니 신의 아비의 일을 성명(聖明)으로 밝게 통촉(洞燭)하옵소서. 만약 달리 조정(朝政)을 탁란(濁亂)하였다고 지적(指摘)할 만한 것이 없다면, 현석규(玄碩圭)의 일을 말한 것과 같은 것은 그 때에 대간(臺諫)에 있어, 김영유(金永濡)·이경동(李瓊仝)·이우보(李祐甫)·손비장(孫比長)·안침(安琛)·김괴(金塊)·김맹성(金孟性) 등 10여 인이 또한 모두 신의 아비의 당(黨)이어서 현석규의 일을 말하였겠습니까? 김언신(金彦辛)도 그 때의 지평(持平)이고, 박효원(朴孝元) 또한 그 때의 사간(司諫)입니다.
유자광(柳子光)의 사람됨 같은 것은 그 감히 말하기를 좋아함이 천성(天性)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수소(袖疏)로 한명회(韓明澮)를 논함이 양기(梁冀)873) 와 조고(趙高)874) 로써 지목하였습니다. 한명회(韓明澮)는 원훈(元勳)이며 국구(國舅)로서 세력이 바야흐로 치성(熾盛)하였으니, 만약 성명(聖明)이 아니면 화(禍)가 혹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유자광(柳子光)의 말함이 두 번에 이르고 상서(上書)에 조금도 기탄(忌憚)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남의 말을 들어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무릇 사람은 그 몸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자신에 불리(不利)하면 부모의 명(命)도 듣지 않는 바 있거든, 유자광은 어떤 사람이기에 남의 청촉(請囑)을 들어 굳이 위태로운 말을 하여서 그 자신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또 유자광은 일찍이 조정(朝廷)에 있는 공경 대신(公卿大臣) 및 대간(臺諫)을 논하였고, 그 배소(配所)에 있어서는 수령(守令)의 불법(不法)을 논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일을 만나면 문득 말하니, 이것이 과연 남의 말을 들은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현석규(玄碩圭)를 논(論)함이 어찌 신의 아비의 말을 들어서 한 것이겠습니까?
신이 또 들으니, 김언신(金彦辛)이 형조 정랑(刑曹正郞)이 되고, 손순효(孫舜孝)가 참의(參議)가 되어 함께 형조(刑曹)에 앉았다가 손순효(孫舜孝)가 김언신(金彦辛)이 지평(持平)이 됨을 듣고, 술자리를 베풀어 축하하였으며, 김언신이 말하기를, ‘현석규(玄碩圭)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 이제 탄핵하겠습니다.’ 하니, 손순효는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옥(黨獄)이 일어나기에 미쳐서 김언신이 이 일을 들어 옥관(獄官)에게 밝히어 아뢰게 되어서 손순효에게 질문하니, 과연 그 말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김언신이 어찌 신의 아비의 청촉을 들었겠습니까? 김언신은 이미 죽었습니다만, 손순효는 곧은 신하이니 어찌 감히 김언신이 말하지 않은 일을 무증(誣證)하여서 성명(聖明)을 기망했겠습니까? 김언신이 천위(天威)을 범하여 죽음 보기를 마치 돌아가는 것같이 함도 또한 그 성품이 강강(强剛)하여 행행연(悻悻然)히 스스로 옳다고 여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남의 말을 들어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또 박효원(朴孝元)은 사간(司諫)이 되어서, 신의 아비와 현석규(玄碩圭)가 정원(政院)에서 서로 힐문(詰問)한 사유(事由)를 탄핵하여 차(箚)와 소(疏)를 올린 것이 두세 번에 이르렀음은 성상(聖上)께서 그 실지를 밝게 아시는 바입니다. 신의 아비가 대사간(大司諫)이 되자, 박효원을 사성(司成)으로 옮겼으니, 그렇다면 박효원이 신의 아비에게 당여(黨與)하였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을 살핀다면 이와 같은 데에 지나지 않는데도, 붕당(朋黨)을 교결(交結)하여 조정(朝政)을 탁란(濁亂)한 것으로 조율(照律)하기에 이른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간당률(奸黨律)을 상고하건대, 그 조목이 셋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릇 간사(奸邪)하게 참언(讒言)을 올려 좌도(左道)875) 로 사람을 죽이게 한 자는 참(斬)한다.’ 하였는데,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신의 아비가 참언을 올려 좌도로 사람을 죽이게 하였단 말입니까? 신의 아비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둘째는 ‘만약에 죄(罪)를 범하여 율(律)이 처사(處死)에 해당(該當)되는데, 그 대신(大臣)이나 소관(小官)이 교언(巧言)876) 으로 간면(諫免)877) 하여 남의 마음에 영합(迎合)한 자는 참(斬)한다.’ 하였는데,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신의 아비가 교언(巧言)으로 간면하여서 남의 말에 영합한 것이 있단 말입니까? 신의 아비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세째는 ‘만약 조정에 있는 관원(官員)으로서 붕당(朋黨)을 교결하여 조정(朝政)을 문란(紊亂)하게 한 자는 모두 참(斬)하고, 처자(妻子)는 종[奴]을 만들며, 재산(財産)은 관부(官府)에 몰입(沒入)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붕당 난정(朋黨亂政)의 율(律)이 진실로 좌살(左殺)·간면(諫免) 두 조목보다도 무거운 것인데, 당시의 옥관(獄官)이 감히 이 조목으로써 신의 아비에게 돌려 그 죄(罪)를 얽었으니, 신이 반복하여 생각건대, 천하의 죄가 반역(叛逆)보다도 큰 것은 없고, 그 반역을 주벌(誅罰)함도 또한 그 자신을 참(斬)하고, 그 처자(妻子)를 종으로 만들며, 그 재산은 적몰(籍沒)하는 데 불과하니, 이런 까닭에 반역(叛逆)의 율(律)이 있고, 붕당(朋黨)의 율(律)이 이에 버금갑니다. 그러나 반역은 대(代)로 혹 있지만, 붕당의 일 같은 것은 세상에 흔히 있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자고(自古)로 사문(赦文)878) 에는 반드시 십악(十惡)879) 을 차례로 세어서 용서함은 얻지 못하게 하였으나, 붕당(朋黨)을 수(數)에 넣지 않음은 붕당은 흔히 있지 않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원률(原律)의 본의(本意)가 평상시(平常時)를 지적하여 만든 것이 아닌데도, 이를 신의 아비의 죄에 쓸 수 있으며, 정리(情理)에 마땅하단 말입니까?
혹은 말하기를, ‘신의 아비가 현석규(玄碩圭)가 하지 않는 일을 말하여 박효원에게 청촉하여서 이를 탄핵케 하였다.’ 하는데, 현석규의 죄가 죽음에 이르지 않았으니, 신의 아비가 비록 그 죄(罪)에 반좌(反坐)880) 되었다 하여도 또한 죽음에 이르지 않거늘, 하물며 현석규의 한 일이겠습니까? 혹 신의 아비가 현석규를 가리켜 ‘음험(陰險)하여서 경알(傾軋)881) 하고자 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요우(僚友) 사이에 서로 친선(親善)하는 도리를 잃은 데에 불과할 뿐이니, 이것으로 ‘조정(朝政)을 탁란(濁亂)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기를, 오늘의 대간(臺諫)이 또한 남의 허물을 탄핵하고 남의 잘못을 규탄함이 혹 친척(親戚)에 인(因)하고, 혹 교유(交遊)의 전문(傳聞)에 인한다고 여겨지니, 이것도 또한 벗[友]과 당(黨)이 되고 남들과 당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근일의 일로써 말한다면, 근자에 신의 아비가 임희재(任熙載)의 일로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헌부(憲府)에서 신의 아비의 소(疏)를 보기를 청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귀신이 전(傳)하고 귀신이 들은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이 말하고 사람이 듣는 것이니, 이것도 또한 벗과 당이 되고, 남들과 당이 되었다고 말하겠습니까? 이는 흔히 있는 일이니, 이와 같은 일로써 신의 아비 등이 붕당(朋黨)을 만든 것으로 지적하여 난정(亂政)으로 조율(照律)함은 불가(不可)한 것이며, 또한 무형(無形)의 화(禍)를 두려울 만하며, 붕당(朋黨)의 의논[論]이 권신(權臣)보다도 참람하고 도둑보다도 소요스러움은 아니지 않습니까? 신은 그윽이 가슴 아픕니다.
신이 또 율문(律文)을 상고하건대, ‘비록 십악(十惡)을 범(犯)하여 상사소불원(常赦所不原)882) 한다 하였어도 감강 종경(減降從輕)883) 한 것은 차한(此限)에 적용하지 아니한다.’ 하였고, 그 주(註)에 이르기를, ‘종경(從輕)은 사형(死刑)을 강등(降等)하여 유형(流刑)에 좇고, 유형(流刑)은 도형(徒刑)에 좇고, 도형은 장형(杖刑)에 좇는 유(類)이다.’ 하였은즉, 신의 아비가 비록 붕당 난정(朋黨亂政)의 율(律)을 받았더라도 성명(聖明)이 이미 사형(死刑)을 강등하여 유형(流刑)에 좇았으니, 이른바, 감강 종경(減降從輕)입니다. 이미 돌아오게 하시고 또 직첩(職牒)을 내려 주셨으니, 성은(聖恩)이 이미 허물을 씻어 주신 것이온데, 어찌하여 신의 아비를 말하는 자는 매양 감등(減等)의 율(律)을 들어서 마지 않은 것입니까? 신이 가슴 아파하고 통곡하여 마지 않은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명(聖明)이 이미 감강 종경(減降從輕)하여 붕당(朋黨)의 율(律)을 쓰지 않으셨으니, 족히 원통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원통하게 여기는 것은, 무술년884) 으로부터 지금까지 11년의 오랜 세월이 되었는데도, 어찌하여 후진(後進)의 인사(人士)가 불상사(不祥事)의 수말(首末)에 있어, 한갓 한때의 율명(律名)으로써 서로 전하여 입에 올려서 비방하여 말하는 것입니까?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하물며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를 변명하겠습니까? 아비를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은 인자(人子)된 지극한 정(情)입니다. 김국광(金國光)이 죽은 지 이미 오래였으나, 그 아들 김극유(金克忸)는 소장(疏章)을 10여 번이나 올려서 그 의시(議諡)의 불미(不美)함을 호소하였으며, 신종호(申從濩)는 한명회(韓明澮)의 외손(外孫)이나 또한 한명회의 시호(諡號)를 의논함이 부당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죽은 아비와 죽은 할아비도 오히려 송원(訟冤)하거든, 하물며 신의 오늘의 정리(情理)이겠습니까? 신은 지극히 가슴 아픕니다.
아아, 붕당(朋黨)의 일은 비록 용군(庸君)·암주(暗主)의 쇠란(衰亂)의 시대라 하더라도 또한 흔히 있지 않으며, 요(堯)·순(舜)·탕(湯)·무(武)의 성조(聖朝)에는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하(殿下)께서 요(堯)·순(舜)의 성덕(盛德)으로 동지(動止)가 한결같이 요(堯)·순(舜)의 법도(法度)에 따르시어 옹희(雍熙)885) 의 지치(至治)를 이루고 있사온데, 신은 항상 붕당의 의논이 신의 아비에게서 일어나 뭇사람이 비방하여 마지 않음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신(臣)이 듣건대, 그 때의 율관(律官)은 신의 아비를 과죄(科罪)하여, 어떤 사람은 불응위사리중자(不應爲事理重者)886) 로 하고, 어떤 사람은 촉탁 공사(囑託公事)887) 로 의의(擬議)하였는데, 옥사(獄事)를 주장하는 자가 마침내 붕당의 율로써 의율(擬律)하여 아뢰었으니, 신은 그윽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들으니, 율관(律官) 김영정(金永貞)이 일찍이 구언(求言)으로 인해서 상서(上書)하여 용률(用律)의 잘못을 극진(極陳)하였다가 형조(刑曹)에 내려져서 추문(推問)하게 하니, 맨 먼저 신의 아비 등의 받은 율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였다고 합니다. 김영정은 반드시 율(律)을 살핀 자이고, 그 흉중(胸中)에는 또한 보는 바가 있을 것이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공경(公卿)을 조정으로 부르시어, 율관(律官)으로 더불어 신의 아비의 율을 받은 시비(是非)를 참여하여 의논케 하시어,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신의 아비의 죄가 정(情)과 법(法)에 맞는 것임을 환하게 알도록 해야만 붕당(朋黨)의 의논이 해명(解明)될 수 있다고 여겨지니, 미신(微臣)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
하니, 임금이 그 소(疏)를 보고, 임광재(任光載)를 불러 매우 엄하게 책(責)하였으며 그 소(疏)를 승정원(承政院)에 내렸는데, 보는 이마다 모두 말하기를, ‘임사홍(任士洪)이 지은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22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386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정론-정론(政論)
- [註 864]무술년 : 1478 성종 9년.
- [註 865]
신감(宸鑑) : 임금의 감식(鑑識).- [註 866]
이전(二典) : 《서경(書經)》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 [註 867]
삼모(三謨) : 《서경》의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익직(益稷).- [註 868]
중상시(中常侍) : 벼슬 이름. 금중(禁中)에 드나들면서 항상 황제를 모시던 벼슬.- [註 869]
조송(趙宋) : 송(宋)나라 황제의 성이 조씨(趙氏)이기 때문에 일컬음.- [註 870]
군사(群邪) : 뭇 간신(奸臣).- [註 871]
용광(容光) : 빛이 뚫고 들어 갈 수 있는 틈.- [註 872]
복분(覆盆) : 엎어놓은 동이.- [註 873]
양기(梁冀) : 후한(後漢) 말기의 역적.- [註 874]
조고(趙高) : 진(秦)나라의 간신(奸臣).- [註 875]
좌도(左道) : 사도(邪道).- [註 876]
교언(巧言) :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 [註 877]
간면(諫免) : 간하여서 죄를 면하게 하는 것.- [註 878]
사문(赦文) : 대사령을 적은 글.- [註 879]
십악(十惡) : 십악 대죄(十惡大罪). 《대명률(大明律)》에 정한 열 가지의 큰 죄. 곧 모반(謀反)·모대역(謀大逆)·모반(謀叛)·악역(惡逆)·부도(不道)·대불경(大不敬)·불효(不孝)·불목(不睦)·불의(不義)·내란(內亂)의 죄(罪).- [註 880]
반좌(反坐) : 사람을 무고(誣告)한 자는 무고를 입은 사람에게 과(科)한 죄(罪)만큼 과죄(科罪)함.- [註 881]
경알(傾軋) : 남을 함정에 빠뜨림.- [註 882]
상사소불원(常赦所不原) : 일반 사령(赦令)으로 사면(赦免)되지 아니하는 것. 상사(常赦)라 함은 특사(特赦)의 대칭(對稱)이며, 십악(十惡)·살인(殺人)·강도(强盜)·절도(竊盜) 등의 범죄는 일반 사령(一般赦令)이 있을 때라도 용서되지 아니함.- [註 883]
감강 종경(減降從輕) : 사형(死刑)에 해당한 죄(罪)는 유형(流刑)으로 강등(降等)하고, 유형(流刑)은 도형(徒刑)으로, 도형(徒刑)은 장형(杖刑)으로 강등하여 가벼운 형(刑)을 좇아 처리하는 것을 말함.- [註 884]
무술년 : 1478 성종 9년.- [註 885]
옹희(雍熙) : 평화스럽고 즐거움.- [註 886]
불응위사리중자(不應爲事理重者) : 《대명률》 형률편 잡범(雜犯)의 한 죄목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여 그 사리가 중한 경우인 것을 말함.- [註 887]
촉탁 공사(囑託公事) : 공사(公事)에 대하여 잘 보아 달라고 촉탁하는 것을 말함.臣父士洪於戊戌年坐罪, 獄官律以交結朋黨, 紊亂朝政, 於是衆謗蠭起, 禍在不測。 聖上施天地生物之仁, 不用獄官所擬之律, 特減死只流之, 再生臣父之身。 臣父死於獄官, 而生於聖恩; 衆謗欲殺, 而聖恩持生。 其一時同坐者, 朴孝元、金彦辛、柳子光倂臣父四人, 孝元、彦辛已相繼死亡, 顧子光旣復功籍, 又復爵位, 臣父亦生還京國, 尋受職牒, 聖上鴻貸之恩, 天地罔極。 聖恩旣再生臣父之身, 而今之言者, 每指臣父戊戌坐罪之事, 猶恐更齒於人數中。 臣父旣陷於井, 而或者欲下之石, 臣不勝哀痛迫切之至。 臣每欲陳情宸鑑, 以訟臣父坐事情狀, 常痛臣父見棄於聖朝, 未嘗頃刻忘于懷。 適今司憲府以大妃移御臣父之家, 將恐有聖恩以及臣父, 而啓曰: "士洪交結朋黨, 濁亂朝政, 其得保首領, 幸矣。 大妃雖大寧還宮, 亦加爵賞於士洪乎?" 朋黨之論, 二典三謨之所無, 而前朝五百年間, 亦未有之。 我太祖開國百有餘年, 亦未有朋黨之事, 奈何朋黨之議始於臣父, 而衆謗之紛紛也? 臣切痛心。 古人有言曰: "天下有無形之禍。 僭非權臣而僭於權臣, 擾非盜賊而擾於盜賊。" 其惟朋黨之論乎! 親則曰族黨, 交則曰遊黨, 薦則曰引黨, 擧是治之, 則族親也, 交遊也, 薦引也, 誰得免於黨乎? 昔漢之衰季, 中常侍目李膺等爲黨人, 而徙死廢錮者至七百餘人, 是果黨乎? 至趙宋, 群邪目范仲淹、(歐陽脩)〔歐陽修〕 爲黨人, 而仲淹貶饒州, 賴仁宗皇帝明以照奸, 仲淹之還, 帝眷日隆, 而(歐陽脩)〔歐陽修〕 進《朋黨論》以自明。 不然, (歐陽脩)〔歐陽修〕 、范仲淹幾不免朋黨之名於一時矣, 千載之下, 誰復知之? 今之朋黨之議, 臣不敢知。 臣父以侍從之久, 謬蒙知遇, 擢置政院, 前後僅四年, 臣未知敢爲何事, 可以濁亂朝政乎? 殿下日月之明, 照於容光, 照於覆盆, 臣父之事, 聖明洞照。 若無他可指爲濁亂朝政, 則如言玄碩圭之事。 其時在臺諫, 則如金永濡、李瓊仝、李祐甫、孫比長、安琛、金塊、金孟性等十餘人, 亦皆臣父之黨而以言碩圭事乎? 彦辛亦其時持平也, 孝元亦其時司諫也。 若子光之爲人, 則其喜爲敢言, 非出於天性者乎? 其袖疏而論韓明澮目以梁冀、趙高。 明澮元勳國舅, 勢焰方盛, 若非聖明, 禍或不測, 而子光言之至再, 上書略無畏忌, 是可聽人言而爲之者乎? 凡人無不愛其身, 於身不利, 則父母之命有所不聽; 子光何人, 聽人之囑, 强爲危言而不愛其身者乎? 且子光嘗論在朝公卿大臣, 以及臺諫; 其在配所, 又論守令之不法, 以至今日, 遇事輒言, 是果聽人之言者乎? 然則其論碩圭, 豈聽臣父之言而爲之乎? 臣又聞彦辛爲刑曹正郞, 孫舜孝爲參議, 俱坐刑曹, 舜孝聞彦辛爲持平, 設酌賀之, 彦辛言曰: "碩圭何人也? 吾今彈之。" 舜孝笑而不答。 及黨獄起而彦辛擧此以白獄官, 以啓質諸舜孝, 則果如其言。 然則彦辛豈聽臣父之囑乎? 彦辛已死, 舜孝直臣也, 其敢誣證彦辛所不言之事, 以欺聖明乎? 若彦辛之犯天威, 視死如歸, 則不亦其性强愎悻悻自是者乎? 是可聽人言而爲之耶? 且孝元爲司諫, 彈臣父與碩圭在政院相詰之由, 以箚以疏, 至再至三。 聖上洞知其實, 臣父爲大司諫, 則遷孝元爲司成。 然則可以曰孝元黨於臣父乎? 原其事, 不過若是, 而至律以交結朋黨, 紊亂朝政, 何也? 臣愚未解其由。 臣謹按奸黨律, 其條有三。 一曰: "凡奸邪進讒言, 左使殺人者, 斬。" 未知臣父進讒左使殺人乎? 父無是事。 二曰: "若犯罪律該處死, 其大臣小官巧言諫免, 暗邀人心者, 斬。" 未知臣父有巧言諫免, 以邀人言者乎? 父無是事。 三曰: "若在朝官員交結朋黨, 紊亂朝政者, 皆斬, 妻子爲孥, 財産入官。" 然則朋黨亂政之律, 固重於左殺、諫免兩條, 而當時獄官, 敢以此條歸之臣父, 而會構其罪。 臣反覆思之, 天下之罪, 莫大於叛逆, 而其誅叛逆, 亦不過斬其身、孥其妻子、籍其財産。 是故有叛逆之律, 而朋黨之律次之。 然而叛逆, 代或有之; 若朋黨之事, 世不常有。 是以自古赦文, 必歷數十惡, 使不得原之, 而不數朋黨者, 意朋黨不常有之故也。 原律本意, 非指平常時而設也, 是可用之於臣父之罪而當於情乎? 儻曰臣父言碩圭所不爲之事, 囑於孝元而彈之, 碩圭之罪不至於死, 則臣父雖反坐其罪, 亦不至於死矣。 況碩圭所爲之事乎? 儻臣父指碩圭爲陰險而欲傾軋之, 亦不過僚友間失相善之道耳。 是可曰濁亂朝政乎? 臣以謂今之臺諫, 亦彈人之過、糾人之失, 或因親戚、或因交遊, 傳聞而爲之, 是亦可以曰黨於友而朋於人乎? 以近日之事言之, 近者臣父以熙載之事, 上書自明, 憲府請見臣父之疏, 是亦非鬼傳而神聞, 則必人言之而人聽之, 是亦可以曰黨於友而朋於人乎? 此常常事也, 不可以如此之事, 而指摘臣父等爲朋黨, 而律以亂政也。 不亦無形之禍可畏, 而朋黨之論, 僭於權臣、擾於盜賊者乎? 臣竊痛心。 臣又按律文: "雖犯十惡常赦所不原, 減降從輕, 不在此限。" 註云: "從輕者, 降死從流、流從徒、徒從杖之類。" 則臣父雖坐朋黨亂政之律, 聖明旣降死從流, 則所謂減降從輕者也。 旣賜環, 旣賜職牒, 聖恩已滌瑕垢矣。 奈何言臣父者, 每擧減等之律而不已乎? 臣所以痛心痛哭而不已者此也。 然此則聖明旣減降從輕, 不用朋黨之律, 不足爲冤。 臣所冤者, 自戊戌至今十一年之久, 奈何後進之士, 不詳事之首末, 徒以一時律名, 傳相騰口謗而言之。 今尙如此, 況於後世, 誰能辨之? 爲父訴冤, 人子至情。 金國光死已久矣, 其子克忸章十餘上, 訴其議諡之不美, 申從濩, 韓明澮之外孫, 亦訴議明澮之諡不當。 死父、死祖尙且訟之, 況臣今日之情乎? 臣切痛心。 噫! 朋黨之事, 雖庸君暗主衰亂之時, 亦不常有, 而非堯、舜、湯、武堂堂盛朝所可有之事也。 殿下以堯、舜之盛, 動遵堯、舜之法度, 方臻雍熙之至治, 而臣常愧朋黨之論, 起於臣父而衆謗不已也。 臣聞其時律官科臣父之罪, 或以不應爲事理重, 或以囑托公事擬議, 而主獄者竟擬以朋黨之律以啓, 臣竊未解其由。 臣又聞律官金永貞, 曾因求言上書, 極陳用律之非, 下刑曹問之, 則首以臣父等所坐之律之非爲言。 永貞必審於律者也, 其胸中亦必有所見矣。 伏願殿下召公卿於朝, 與律官同議臣父坐律之是非, 使國人曉然知臣父之罪合於情法, 然後朋黨之議, 庶幾解矣, 微臣之冤庶幾釋矣。
上覽其疏, 召光載責之甚嚴, 以其疏下政院。 覽者皆曰: "士洪作也。"
- 【태백산사고본】 34책 22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386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정론-정론(政論)
- [註 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