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절사 채수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문견 사건을 올리다
성절사(聖節使) 채수(蔡壽)가 북경[京師]으로부터 돌아오니,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인견하고 이내 묻기를,
"새 천자(天子)는 어떠하던가?"
하니, 채수가 아뢰기를,
"황제(皇帝)의 법령(法令)이 엄하고 명백하여 중국 조정 사람들이 모두 성명(聖明)하다고 칭송하였사오며, 선조(先祖) 때의 노환(老宦)들은 모두 선황(先皇)의 능(陵) 곁으로 옮겨 두고, 조정의 모든 사무는 모두 어진 사대부(士大夫)에게 위임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황제가 중이나 도사(道士)들의 관직을 가진 자는 모두 파직시켜 버리려고 하였는데, 태황후(太皇后)의 전교로 정지되었다 하니, 그러하던가?"
하니, 채수가 말하기를,
"신(臣)은 듣지 못했습니다. 지난번 동월(董越)·왕창(王敞)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와 전하(殿下)께서 현주(賢主)이심을 크게 칭송하였사오며, 또 허종(許琮)을 어진 재상이라고 칭도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황제의 용의(容儀)는 어떠하던가?"
하니, 채수가 말하기를,
"용의는 심히 단정하였습니다."
하고는 이미 소매에서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내어 올렸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1. 야선(也先)의 유종(遺種) 소황자(小皇子) 등이 입조(入朝)한다고 성언(聲言)해놓고 대동성(大同城) 밖 50리 지경에 둔취(屯聚)하여 머물러 있으니, 중국 조정이 크게 두려워하여 태감(大監) 김보(金輔)로 하여금 군병을 영솔하게 하고, 또 연경(燕京)의 화포(火砲)와 군기(軍器)를 모두 운반하게 하였으며, 황제는 군인(軍人)들로 하여금 모두 맨 작대기[白挺]를 가지고 불우(不虞)에 대비하게 하고 다만 1천 명만으로 조공(朝貢)하게 하였습니다. 또 옥하(玉河) 회동관(會同館)721) 도 모두 정결하게 수리되어 있었으며 금침(衾枕)도 다 새로 만들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 신(臣)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을 때에 운남(雲南) 향공 진사(鄕貢進士) 최헌(崔瓛)과 서로 통어(通語)하였는데, 하루는 경사(經史)를 담론하다가 최헌이 신에게 이르기를, ‘새 천자(天子)는 심히 엄명(嚴明)하여 온 천하가 모두 심복(心腹)하고 있으며, 또 기순(祁順)·동월(董越) 등의 사신들이 돌아와서 모두 그대의 전하(殿下)는 현명하다고 하고 칭송하여 중국(中國)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대의 전하는 과연 어떠한 임금입니까?’고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성명인서(聖明仁恕)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며, 재예(才藝)에 이르러서도 그 정묘함이 극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시어, 온 나라 사람들이 떠받들기를 부모와 같이 하며, 두려워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니, 참으로 성주(聖主)입니다. 또 우리 나라 옛날의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백제(百濟)·동옥저(東沃沮)·북옥저(北沃沮)·예맥(穢貊) 등지를 모두 하나로 합하여 땅은 수천리(數千里)를 보유하고 갑병(甲兵)이 수십만이며, 나라는 부(富)하고 병정은 강하며,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무릇 진공(進貢)하는 토산물은 모두 친히 감동(監董)하고 선택하며, 배표(拜表)722) 하는 날에는 새벽에 교외(郊外)까지 나와 전송하고, 성절(聖節)과 정조(正祖)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배하(拜賀)하십니다.’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습니다. 참으로 현군(賢君)이십니다. 그러나 그대의 말로 성(聖)이라 함은 지나치거니와, 황제는 참으로 성명(聖明)이십니다. 성(聖)자를 번왕(蕃王)에게 붙이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순(舜)임금은 동이(東夷)의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의 사람입니다. 현인(賢人)·성인(聖人)이 나는 바를 어찌 화이(華夷)로 구분하겠습니까? 공자(孔子)도 또한 필부(匹夫)이면서 성인이시거늘, 어찌 우리 전하께서 해외(海外)에 거(居)한다 해서 성인이 되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정말 옳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 신이 동팔참(東八站)의 땅을 보니, 우리 나라 평안도(平安道)보다 크고 토지가 비옥하여 평안도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전에는 비워두고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은 여진(女眞)과 서로 접해 있는데다 큰 관방(關防)도 없어서 언제든지 도둑들이 침입하여 약탈하고 죽이므로, 중국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하여 살지 아니하였고, 우리 나라 사람도 또한 두려워하여 몰래 의탁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북경(北京)으로 갈 때 요동(遼東) 사람들이 끊임없이 와서 이르기를, ‘봉황산(鳳凰山) 동쪽에 성(城)을 쌓는다.’고 하였었는데, 돌아올 때에는 사람들의 말로는 성의 공사를 이미 마치고 1천 명으로써 지킨다 하고, 또 금년 안에 금주(金州)·개주(蓋州)·동녕(東寧) 등의 위(衛)에 4천 호(戶)를 옮겨 살게 한다고 합니다. 봉황산은 의주(義州)와의 상거가 겨우 하룻길이며, 요해지(要害地)에 처하여 있어, 이제부터 영원히 여진(女眞)의 우환이 없게 된다면 중국 사람들이 모두 즐겨 옮겨 살 것이며, 우리 나라 사람도 또한 몰래 의탁할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오니, 심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또 신이 동팔참(東八站) 사람들을 보니, 모두 우리 나라 말을 잘 알아서 평안도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며, 신 등의 하숙(下宿)하고 있는 곳에 혹 와서는 무릎꿇고 절을 하며 영공(令公)이라 칭(稱)하기에 그 온 줄기를 물어 보았더니 모두 평안도 사람이라 하였고 혹은 조부(祖父) 때부터 혹은 증조(曾祖)부터 와서 살았다 하였지만 그 실은 어느 대(代)에 와서 살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짐작컨대, 모두 요사이 내투(來投)한 자였습니다. 또 의주(義州)의 마중나와 만난 사람들도 모두 서로 사귀여서 이제 봉황산에 성(城)이 있으면 평안도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기꺼이 투입(投入)해 갈 것이니, 심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에서 다방면으로 포치(布置)하여 조속히 막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1. 우리 나라 사람이 한어(漢語)와 이문(吏文)을 해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차 때마다 질정관(質正官)을 보고 의심하는 것을 질의하게 하였는데, 질정관 등이 옥하관(玉河館)에만 틀어 박혀 있어 서로 담화(談話)를 나누는 자는 모두 시정(市井)의 사람이라 질문할 바가 없어 한갓 왕래만 번잡할 뿐입니다. 세종조(世宗朝)에는 요동(遼東)에 한 대유(大儒)가 있어서 행차 때마다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을 보내어 질문하여 심히 유익함이 있었습니다. 지금 요동(遼東)에 소규(邵奎)라는 사람이 있는데 진사(進士) 출신으로 일찍이 진정 지현(眞定知縣)이 되었다가 벼슬을 버리고 한가롭게 살고 있사온데, 재주와 덕망이 매우 높아서 요동의 대인(大人)들이 모두 존경합니다. 신이 들어갈 때에 백탑사(白塔寺)에 가보니 벽 뒤에 소규의 시(詩)가 있음을 보고 차운(次韻)하였고, 돌아올 때에 미쳐서는 신이 율시(律詩) 6수(首)를 지어 주었더니 다음날 소규(邵奎)는 그 시(詩)를 차운하여 주과(酒果)를 가지고 와 위로해 주었습니다. 담화를 해보니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질정관(質正官)을 중국 조정에 보내지 말고 신숙주(申叔舟)의 예(例)에 의하여 소규에게 배우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21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369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군사-군정(軍政)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聖節使蔡壽還自京師。 上御宣政殿引見, 仍問新天子何如? 壽啓曰: "皇帝法令嚴明, 中朝人皆稱聖明。 以先朝老宦, 皆移置于先皇陵側, 朝廷庶務, 皆委於賢士大夫。" 上曰: "聞皇帝悉欲罷去僧人道士有職者, 因大皇后之敎而停之, 然乎?" 壽曰: "臣未之聞。 日者董越、王敞還朝, 盛稱殿下爲賢主, 且稱許琮爲賢宰相。" 上曰: "皇帝容儀何如?" 壽曰: "容儀甚端。" 仍袖出聞見事件以進。
一, 也先遺種小皇子等聲言入朝, 於大同城外五十里之地屯住, 中朝震恐, 使太監金輔領兵, 且燕京火(炮)〔砲〕 軍器皆輸去。 皇帝令軍人, 皆持白挺以備不虞, 而只令一千人朝貢。 且玉河、會同館皆修理凈潔, 衾枕皆新製以待之。 一, 臣在玉河館, 與雲南鄕貢進士崔瓛相語, 一日談論經史, 瓛謂臣曰: "新天子甚嚴明, 天下皆心服。 且自祁順、董越等使還, 皆稱君之殿下亦賢明, 中國皆知之。 君之殿下果何如主也?" 臣答曰: "我殿下聖明仁恕, 好學勤政, 至於才藝, 無不極其精妙, 一國之人, 戴之如父母, 畏之如神明, 眞聖主也。 且我國昔之高句麗、新羅、百濟、東沃沮、北沃沮、穢貊等地皆合爲一, 有地數千里, 帶甲數十萬, 國富兵强。 至誠事大, 凡進貢土物, 皆親自監擇; 拜表之日, 晨出郊外送之; 聖節、正朝, 率百官拜賀。" 瓛曰: "果若人言, 眞賢君也。 然君言聖則過矣。 皇帝則眞聖明矣, 聖字不宜加於蕃王也。" 臣答曰: "舜, 東夷之人; 文王, 西夷之人。 賢聖所出, 豈分於華夷? 孔子亦匹夫而聖, 豈以我殿下居海外而不得爲聖乎?" 瓛曰: "君言正是。" 一, 臣觀東八站之地, 大於我國平安道, 土地沃饒萬萬於平安道。 在前空曠無人居者, 以與女眞相接, 無大關防, 每每寇竊搶殺, 故中國人畏而不居, 我國人亦畏而不潛投。 臣赴京時, 遼東人絡繹而來云, 城鳳山之東, 及其回還, 人言已畢城, 以一千人戍之。 且今年內, 以金州、盖州、東寧等衛四千戶移居之。 鳳凰山距義州纔一日程而居要害, 自今永無女眞之患, 則中國人皆樂移居, 我國人亦必有潛投之者, 甚非細故也。 且臣觀東八站人, 皆解我國語, 與平安道人無異。 臣等下宿處, 或來跪拜稱令公, 問其來派, 則皆云平安道人, 或云自祖父, 或云自曾祖來居, 其實不知某代來居, 意皆今時來投者也。 且義州迎逢人等, 皆相交結, 今城鳳凰山, 平安人必皆樂投, 甚非細故也。 臣意國家多般布置, 早爲隄防可也。 一, 我國人不解漢語吏文, 故每行, 見質正官以質可疑, 而質正官等, 閉於玉河館, 所與接談者, 皆市井之人, 無所質問, 徒爲往來煩擾而已。 世宗朝遼東有一大儒, 每行遣申叔舟、成三問等質問, 甚有裨益。 今遼東有邵奎者, 進士出身, 曾爲眞定知縣, 棄官閑居, 才德甚高, 遼東大人等, 皆尊敬之。 臣入歸時, 往觀白塔寺, 見壁上有邵奎詩, 次之。 及還來時, 臣作律詩六首以贈之, 明日邵奎次其詩, 且持酒果來尉, 與之談話, 無所不通。 臣意質正官不送中朝, 依申叔舟例, 使學於邵奎可矣。
- 【태백산사고본】 33책 21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36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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