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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17권, 성종 19년 6월 4일 병신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에 성 쌓는 일이 중요함을 상언하다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이 상언(上言)하기를,

"삼가 보건대, 평안도(平安道) 한 도는 중국(中國)과 경계(境界)를 접하였는데, 압록강(鴨綠江)이 저들과 우리의 분계선(分界線)이 되었습니다. 옛날 거란(契丹)이 소유했을 때에는 압록강이 도리어 우리에게 해(害)가 되었지만, 이제 우리의 소유가 되면서 이른바 우리가 이에 의거하여 ‘요처[要]’라 일컬으니, 천지(天地)와 더불어 영구히 잃을 수 없고, 천지와 더불어 영구히 관방(關防)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찌 천하(天下)가 무사(無事)함을 믿고 우리의 관방에 유의(留意)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문[里閈]을 살펴보건대, 동쪽과 서쪽에 집이 있으나, 울타리[籬落]가 서로 붙어 있고, 빈부(貧富)의 차가 심하지 않았으므로, 있거나 없거나 서로 도와가며 재앙과 환란이 있을 때에는 서로 구원(救援)해 가며 대대로 영구히 좋게 지낼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다 수년 안에 동가(東家)는 점차 부유(富裕)해지고 서가(西家)는 점차 빈한(貧寒)해지면서 동가의 쟁기[耒耜]가 혹 서가의 토지를 침범하거나, 동가의 소와 양이 혹 서가의 벼를 먹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두 집안은〉 점차 원수 사이가 되었으며, 이에 서가에서는 울타리를 만들지 아니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고, 구역(區域)을 만들었으나, 또한 미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 자손(子孫)에 이르러 동가(東家)는 날로 더욱 부성(富盛)해지고, 서가(西家)는 날로 더욱 빈한[貧殘]해지자, 동가의 자손은 문득 교만[驕傲]해져서 서가의 토전(土田)을 침탈(侵奪)한 것이 거의 반을 넘게 되니, 서가에서 소유한 것은 얼마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이문[里閈]의 일이라 하나, 위로 거슬러 올라가 추측(推測)해 본다면, 천하 국가(國家)의 형세(形勢) 또한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중국은〉 천하가 부성(富盛)해서 천하(天下)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요양(遼陽)으로부터 장성[長墻]을 쌓고, 이미 애양보(靉陽堡)를 설치하였으며, 또 개주(開州)에 성을 쌓고, 점차 탕참(湯站)에 성을 쌓고, 파사보(婆娑堡)에 성을 쌓았으니, 슬기로운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으며, 더욱이 요동(遼東) 사람들 또한 모두 그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평안도 한 도는 백성들이 적어 생업(生業)이 잔망(殘亡)하므로, 신은 끝내 동가(東家)의 침략을 면하지 못한 서가(西家)의 후회가 있을 것이 두렵습니다. 서가의 부형(父兄)으로 하여금 동가의 호의(好意)를 믿지 말고 일찌감치 구역(區域)을 만들어 울타리를 쌓아서 자손 만대의 계책으로 삼게 한다면, 동가(東家)에서 비록 부성해지고 자손이 비록 교만해졌다 하더라도 어떻게 갑자기 그 울타리[垣墻]를 깨뜨리고 그 토지를 침탈하겠습니까? 지금 의주(義州)의 일은 자못 그 일과 서로 같습니다.

아아, 천하(天下)가 무사하다면 그만이겠지만, 천하에 일이 있다면 반드시 먼저 침략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천하가 비록 무사하다 하더라도 어찌 천하가 날로 더욱 부성(富盛)해지는데 후세에 이르러 그 자손이 교만해지지 않을 것을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경연(經筵)에서 대략 사연을 진소(陳疏)하고, 또 물러나와 글을 써서 죽음을 무릅쓰고 올렸던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말을 오활(迂闊)하다 여기지 마시고 곧 대신에게 명하여 의논하도록 하시고, 해사(該司)에 명하여 마감(磨勘)해서 아뢰게 하소서. 지금 전하께서 평안도(平安道) 한 도의 의주(義州) 관방(關防) 등의 일을 염두에 두시고 만세(萬世)의 계책(計策)으로 삼으시니, 지극하다 일컬을 만하고 근면하다 일컬을 만합니다. 아아, 편안했다가 위급해지고, 잘 다스려지다가 문란해지는 것은 음양(陰陽)이 쇠하고 성하는 이치이니, 삼대(三代)586) 이래 잘 다스려지다가 문란해진 흔적이 경사(經史)에 고루 적혀 있어 귀감(龜鑑)이 되고 경계(警戒)가 됩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의논하는 자가 혹 말하기를, ‘이것은 이미 국가(國家)에서 시행한 계책(計策)이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세종조(世宗朝)부터 열심히 강(講)하게 하였으나, 형세(形勢)가 불편한 바 있어서 마침내 그대로 두고 시행하지 아니하였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해사(該司)로 하여금 마감(磨勘)하게 하였으나, 그 의논이 분분하여 정론(定論)하지 못하였다.’ 하니, 이것이 어찌 전하(殿下)께서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한 성대한 뜻이겠습니까? 병조(兵曹)에서 또 의주(義州)에 성(城)을 쌓는 것을 의논하기를, ‘지금 대적(大敵)이 없는데, 〈성을〉 더 넓혀 물려서 쌓아 민력(民力)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건주(建州)와 상대(相對)하고 있는 상류(上流) 여러 진의 성자(城子)는 간혹 낮고 작은데다가 협소(狹小)하나, 넓혀서 쌓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신(使臣)이 통행하는 내지(內地)에는 성이 없는 작은 고을의 수가 많은데, 의주(義州)의 성을 급하게 쌓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이 어리석어 알지는 못하나, 대적(大敵)이 이르고 나서야 성을 쌓아 관방(關防)을 삼겠다는 것입니까? 이른바 상류(上流) 여러 진(鎭)의 성자(城子)가 의주(義州)의 성보다 중하다는 것입니까? 이른바 성이 없는 작은 고을 또한 의주의 성보다 중하다는 것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내지(內地)의 작은 고을 또한 능히 성을 쌓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민력(民力)이 미치지 못한다면 우선 내버려두고 의주의 성을 넓혀 쌓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상류(上流)의 여러 진(鎭)이 비록 긴요한 관방(關防)이라 하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의주가 중국(中國)과 경계(境界)를 이루는 긴요한 관방(關防)이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정해년587) 의 출정(出征)에 따라가서 건주(建州)이만주(李滿住)가 사는 부락(部落)을 보았는데, 풀로 덮은 집이 6, 70집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만주(李滿住)건주(建州)를 통솔하는 자인데, 그 부락(部落)이 이와 같다면 다른 부락의 잔폐(殘廢)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건주(建州) 야인(野人)이 지금 몰래 일어나서 좀도둑이 된다면 그만이겠지만, 모여서 대적(大敵)이 되어 수(隋)나라·당(唐)나라·소손녕(蕭遜寧)·삼별초(三別抄)·유관(劉關)의 군사와 같이 능히 종횡(縱橫)으로 난입(闌入)한다면, 반드시 이러한 의심이 없다고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 부락(部落)이 잔망(殘亡)하고, 그 종족이 많지 않다고 하며, 강계(江界)로부터 창성(昌城)·창주(昌洲)에 이르기까지 산천(山川)이 험준하여 걸어가는 사람이 옷깃을 맞대고 나란히 갈 수 없고, 말을 탄 사람이 함께 나란히 갈 수 없다면, 종횡(縱橫)으로 난입(闌入)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진의 성자(城子)를 높고 크게 개축(改築)하는 것이 또한 좋으며, 민력(民力)이 미치지 못한다면 우선 그대로 내버려두고 의주(義州)의 성을 넓게 증축(增築)하는 것이 좋을 것인데, 대신(大臣)들의 의논이 이미 상세하지 못한데 해조(該曹)에 돌리고, 해조에서는 또 의논하기를 또한 먼 근심[遠慮]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옳겠습니까?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람에게 먼 근심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걱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자(孔子)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한다면 그만이겠지만, 공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면, 사람에게 먼 근심이 없다는 것이 옳겠습니까? 집안을 잘 다스리는 자 또한 반드시 먼 근심이 있는 법인데, 더욱이 국가(國家)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먼 근심이 없다는 것이 옳겠습니까? 신은 적이 미혹됩니다.

의주(義州)가 잔망(殘亡)하고 번성(繁盛)한 것이 어찌 진(秦)나라 사람들의 기름지고 메마른 것과 관계가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국가(國家)의 기름지고 메마른 것과 크게 관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남쪽의 백성을 결코 옮겨서 채우지 않을 수 없으니, 성터[城基]를 결코 넓혀 증축(增築)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삼도(三島)를 기경(起耕)하여 먹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어찌 이해(利害)를 상세하게 구명(究明)하지 않고 단지 분분할 뿐이겠습니까? 신은 적이 미혹됩니다. 옛날 우리 세종(世宗)께서 영안도(永安道)의 4진(四鎭)을 회복시키고자 하셨으나, 당시 분분하게 비방(誹謗)이 들끓으니, 가부(可否)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종(世宗)께서는 스스로 성심껏 재량(裁量)하시어 이미 4진을 회복시키고 백성을 옮겨서 채우니, 뜬소문[浮言]이 따라서 안정되고 민심(民心)도 저절로 안정되었는데, 지금 4진의 일을 보건대, 당시 의논한 자들의 분분했던 것이 무슨 마음이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더욱이 지금 의주(義州)의 일은 4진(四鎭)을 회복시켜 세우자는 예가 아닌데, 또 무엇 때문에 의논하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신은 적이 미혹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스스로 성심(聖心)껏 결단(決斷)하시어 작은 폐단을 헤아리지 마시고 작은 근심을 염려하지 마시고 의심치 말고 시행하셔서 세월이 흘러 오랫동안 지키게 되면, 의주(義州) 백성들의 주거(住居)가 조밀(稠密)해지고, 성곽(城郭)이 높고 커질 수 있으며, 삼도(三島)는 전지(田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니, 그러면 말타고 짐을 싣고 오가는 근심이 없어져서 만세(萬世)의 계책(計策)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217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34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향촌-취락(聚落) / 외교-야(野)

  • [註 586]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587]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武靈君 柳子光上言曰:

伏以平安一道與中國爲界, 鴨綠一水分爲彼我。 昔契丹有之, 則鴨綠反爲之害也, 今爲我有, 則所謂我據曰要, 而與天地爲終始, 不可失也。 與天地爲終始, 不可不嚴其關防也, 安有恃天下之無事, 而不留意於我之關防也? 臣嘗於里閈見之, 有東西家籬落相接, 其貧富不甚相遠, 有無相資, 禍患相救, 期以世世終歸于好。 數年之內, 東家漸富, 西家漸貧, 東家之耒耜, 或侵西家之田, 東家之牛羊, 或損西家之禾, 積以歲月, 漸成仇隙。 於是西家悔不造爲垣墻, 以爲區域, 而亦無及矣。 至其子孫, 東家日益富盛, 而西家日益貧殘, 東家之子孫又便驕傲, 侵奪西家之土田殆過半, 而西家之所有, 蓋無幾矣。 此雖里閈之事, 推而上之, 則天下國家之勢, 亦不外是。 今天下富盛, 盡天下之地而有之。 自遼陽築長墻, 旣設靉陽堡, 又城開州, 漸次城湯站, 城婆娑堡, 不待智者而後可知。 而況遼東人亦皆言之乎! 平安一道則人民稀少, 生業殘亡, 臣恐終不免東家之侵, 而有西家之悔也。 使西家之父兄, 不恃東家之好, 而早爲區域, 築其垣墻, 爲子孫萬世之計, 東家雖富盛、子孫雖驕傲, 豈能遽破其垣墻而侵奪其土地乎? 今義州之事, 頗相類之。 噫! 天下無事則已矣, 天下有事, 則必先受兵。 今天下雖無事, 安知天下日益富盛, 至後世其子孫, 不爲驕傲者乎? 是以臣於經筵, 略陳大槪, 又退而爲書, 昧死以上。 伏惟殿下不以臣言爲迂闊, 卽命大臣議之, 命該司磨勘以啓。 今殿下留神於平安一道、義州關防等事, 爲萬世之計, 可謂至矣, 可謂勤矣。 噫! 安而危, 治而亂, 此陰陽消長之理也。 三代以來, 理亂之迹, 布在經史, 可監可戒。 臣伏聞議之者, 或曰: "此國家已行之策。" 或曰: "此自世宗朝講之熟矣, 而勢有所不便, 遂寢不行。" 或曰: "令該司磨勘。" 其議紛紛, 無有定論, 此豈殿下令大臣議啓之盛意乎? 兵曹又議義州築城曰: "時無大敵, 不宜增廣退築, 以勞民力。" 又曰: "與建州相對上流諸鎭城子間, 有低微狹小, 此不可廣築也。" 又曰: "使臣通行內地, 無城小邑數多, 不宜急急於義州之城。" 是何意也? 臣愚未知大敵至而後乃築城, 以爲關防乎? 所謂上流諸鎭城子, 有重於義州者乎? 所謂無城小邑, 亦有重於義州者乎? 以臣愚計, 內地小邑亦能城之則可矣, 民力有所不及, 則姑舍是, 而增廣義州城可也。 上流諸鎭雖曰緊關, 臣愚以謂不如義州中國爲界之緊關也。 臣於丁亥年從征, 親見建州 李滿住所居部落, 皆草蓋, 不過六七十家。 滿住, 都督建州者, 而其部落如此, 則其他部落之殘可知。 若曰建州 野人時有竊發爲鼠竊狗偸則可矣, 聚爲大敵如蕭遜寧、三別抄、之兵而能從橫闌入, 則必無是疑。 何以言之? 其部落殘亡, 其種類不多, 而自江界昌城昌洲, 山川險阻, 步者不能連袵, 騎者不能竝驅, 則其能從橫而闌入乎? 然諸鎭城子高大改築亦可也, 而民力有所不給, 則姑舍是, 而增廣義州之城可也。 大臣議之, 旣不詳而歸之該曹; 該曹又議之, 亦無遠慮, 其可乎? 孔子曰: "人無遠慮, 必有近憂。" 使孔子爲愚人則可矣, 使孔子不爲愚人, 則人無遠慮, 其可乎? 善爲家者, 亦必有遠慮, 況爲國而不爲遠慮, 其可乎? 臣竊惑焉。 義州之殘盛, 豈人之肥瘠乎? 臣愚以謂大有關於國家之肥瘠也。 南民決不可不徙以實之, 城基決不可不增廣, 三島決不可不耕食, 明矣。 奈何不詳究利害, 而徒爲紛紛耶? 臣竊惑焉。 昔我世宗欲復永安道四鎭, 而當時紛紜, 毁謗沸騰, 莫適可否。 世宗裁自聖心, 旣復四鎭, 徙民以實之, 浮言隨以定, 民心自安。 以今四鎭之事觀之, 則當時議者之紛紜, 未知何心也。 況今義州之事, 非復立四鎭之例也, 而又何議之難耶? 臣竊惑焉。 伏願殿下斷自聖心, 不計小弊, 不慮小患, 行之勿疑。 積以歲月, 持之悠久, 則義州民居可以稠密, 城郭可以高大, 三島可以爲田, 騎載往還可以無虞, 萬世之計可以得矣。

命留政院。


  • 【태백산사고본】 33책 217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34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향촌-취락(聚落)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