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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15권, 성종 19년 4월 23일 병진 1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대사간 권정이 여러 도에 감군 어사를 나누어 보내어 군정을 다스리게 하기를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大司諫) 권정(權侹)이 아뢰기를,

"각포(各浦)의 만호(萬戶)가 대개 모두 용렬(庸劣)하고 무치(無恥)453) 하니, 군정(軍政)이 소우(疏虞)한 것은 주로 이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청컨대, 여러 도(道)에 감군 어사(監軍御史)를 나누어 보내어 군정을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에 고문(顧問)하니, 특진관(特進官)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과연 이 말과 같습니다. 군정(軍政)은 나라의 중대한 일로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군사를 백 년 동안 쓰지 않는 것은 가하지만, 하루라도 군사가 없을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군정(軍政)이 폐이(廢弛)해져 모든 군기(軍器)가 유명 무실(有名無實)해졌는데, 경기(京畿)를 가지고 예를 들어 말하면, 영종(永宗)·초지(草芝)의 만호(萬戶)는 모두 비루한 무리로서 군기가 단련되지 못하여 선군(船軍)이 도망해 흩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감군 어사(監軍御史)를 보내어 군정을 점검(點檢)하게 하면, 기계(器械)가 엄정(嚴整)해져서 전일과 같이 소우(疏虞)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깁니다. 또 여러 고을의 훈도(訓導) 또한 불학 무지(不學無知)하여 비록 나이 40이 되지 못하였더라도 나이를 속여서 수직(受職)하는 자가 거의 다 이러하여 유명 무실하기가 만호 등과 같으니, 감군 어사(監軍御史)로 하여금 아울러 규검(糾檢)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좌우에 고문(顧問)하니, 영사(領事) 심회(沈澮)가 아뢰기를,

"감군 어사(監軍御史)는 중국 조정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방에 오래 머물게 되니, 폐단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어사(御史)가 외방에 오래 머문다면 어찌 폐단이 없겠는가?"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이 또 아뢰기를,

"의주(義州)에 성(城)을 쌓는 일과 사민(徙民)하는 일은 신이 전일에 그 이해(利害)를 진달(陳達)하였으니, 원컨대, 아울러 거행하소서."

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최응현(崔應賢)이 아뢰기를,

"신이 근일(近日)에 선위사(宣慰使)로 평안도(平安道)에 가서 의주(義州) 성자(城子)의 낮고 미약한 것을 보았는데, 해자(海子)454) 또한 협착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행성(行城) 쌓는 것을 정지하고 먼저 이 성(城)을 쌓는 것이 좋을 것이라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홍정승(洪政丞)455) 에게 물어서 하라."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이 또 아뢰기를,

"군호(軍戶)는 완취(完聚)456)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군적(軍籍)을 정리하면서 모두 구적(舊籍)에 의하여, 한 집안 가운데 아들과 사위가 모두 다른 호(戶)의 소속(所屬)이 되는데, 백성들의 생업(生業)이 안정되지 못하는 것이 주로 이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이미 군적(軍籍)을 만들어 놓았으니, 고치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다. 유자광이 아뢰기를,

"유향소(留鄕所)457) 는 다시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하는 자는 혹 생각하기를, ‘유향소(留鄕所)의 관리가 향곡(鄕曲)에 위엄을 보이므로, 향리(鄕吏)가 이를 두려워하기를 고을 수령보다 지나치게 하여,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풍화(風化)에 도움이 있는 것도 많았습니다. 이전에 유향소가 폐지되지 않았을 때 혹 어떤 한 사람이 효순(孝順)으로써 일컬어지면 유향소에서 반드시 효순으로써 천거하고, 혹 어떤 한 사람이 악행(惡行)으로써 일컬어지면 유향소에서 또한 반드시 악행으로써 내쳤으니, 이로써 선(善)한 자가 권장되고 악(惡)한 자가 징계되었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유향소를〉 다시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혹은 가하다고도 하고 혹은 불가하다고도 하니, 마땅히 다시 의논하여서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21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330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호구-이동(移動)

  • [註 453]
    무치(無恥) : 부끄러움이 없음.
  • [註 454]
    해자(海子) : 호소(湖沼).
  • [註 455]
    홍정승(洪政丞) : 홍응(洪應)을 가리킴.
  • [註 456]
    완취(完聚) : 가족이 모두 한 곳에 모여서 삶.
  • [註 457]
    유향소(留鄕所) : 수령을 보좌하는 지방 자치 기관.

○丙辰/御經筵。 講訖, 大司諫權侹啓曰: "各浦萬戶, 類皆庸劣無恥, 軍政踈虞, 職此之由。 請於諸道分遣監軍御史, 以修軍政。" 上顧問左右, 特進官柳子光啓曰: "果若是語。 軍政, 國之重事。 古云: ‘兵可百年而不用, 不可一日而無兵。’ 今者軍政廢弛, 一應軍器, 有名無實。 以京畿言之, 永宗草芝萬戶, 皆鄙陋之輩, 以致軍器不鍊, 船軍逃散。 臣意謂遣監軍御史, 點檢軍政, 則器械嚴整, 非如前日之踈虞矣。 且諸邑訓導, 亦皆不學無知, 雖年未四十, 冒年而受者, 比比皆是, 有名無實, 與萬戶等耳。 令監軍御史竝此糾檢。" 上顧問左右, 領事沈澮啓曰: "監軍御史, 中朝亦有之。 然久留于外, 弊亦不貲。" 上曰: "御史久留于外, 烏得無弊?" 子光又啓曰: "義州築城徙民事, 臣前日陳其利害, 願竝擧行。" 同副承旨崔應賢啓曰: "臣近日以宣慰使往平安道, 見義州城子低微, 海子亦狹窄。 臣意謂姑停行城之築, 先築此城爲便。" 上曰: "當問洪政丞爲之。" 子光又啓曰: "軍戶不可不完聚。 今者修軍籍, 皆因舊籍, 一家之內, 若子若壻, 皆爲他戶所屬, 民不安生, 職此也。" 上曰: "今已成籍, 改之不亦難乎?" 子光曰: "留鄕所不可不復。 言者或以爲留鄕所官武於鄕曲, 鄕吏畏之過於邑宰, 其弊不貲。 然有補風化者亦多。 昔留鄕所不廢時, 或有一人以孝順稱, 則留鄕所必以孝順薦之; 或有一人以惡行稱, 則留鄕所亦必以惡行黜之。 以此善者勸, 惡者徵矣。 臣意謂不可不復立也。" 上曰: "或云可, 或云不可, 當更議爲之。"


  • 【태백산사고본】 33책 21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330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호구-이동(移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