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서를 맞이할 때에 연을 타는 것에 대해 여러 신하들과 논의하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사대(事大)함이 지성(至誠)인 까닭으로 조정도 또한 우리 나라를 경대(敬待)하였다. 개국(開國)한 이래로 국왕이 말을 타고 조서를 맞이한 예(禮)가 없거늘, 이제 온 사신이 비록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의거해서 말하였더라도 어찌 갑자기 그 말을 좇아서 말을 타고 조서를 맞이할 수 있겠느냐?"
하고,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정부(政府)·예조(禮曹)에 물으니,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연을 타고 조서를 맞이함은 조종조(祖宗朝)로부터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신이 《대명집례》에 의거해서 말하니, 만약 그 뜻을 어기면 분노(忿怒)함이 없지 않을 것이니, 권도를 따라 말을 타심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조서를 맞이할 때에 전하께서 연을 타심은 전례(前例)가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이번의 사신이 비록 《대명집례》에 의거하여 말하였더라도 형편상 그대로 따르기는 어려우니, 마땅히 전례에 의거하여 원접사(遠接使)로 하여금 반복(反覆)하여 설득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조서를 맞이할 적에 연을 탐은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임을 이왕(已往)의 사신들이 한가지로 아는 바이니, 이로써 설득시킴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지금 중국 사신의 등사문(謄寫文)을 보면, 조서(詔書)를 영접함이 한가지 일이고 상사 선로(上賜宣勞)를 받는 의식이 또 한가지 일입니다. 조서를 맞이하는 의식에는 단지 왕(王)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행한다고 하였고, 말을 탄다고 이르지 않았는데, 상사 선로(上賜宣勞)를 받는 의식에는 왕이 말을 타고 행한다고 하였으니, 조서를 받는 것과 선로를 받는 것이 어느 것이 경(輕)하고 어느 것이 중(重)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은 조서를 맞이함이 사물(賜物)을 받는 것보다 중하다고 여겨집니다. 조서를 영접하는 의식에 말을 탄다는 글이 없는데, 중국 사신이 어찌 사물(賜物)을 받는 의식에 의거하여서 이와 같이 이르옵니까? 더구나 《대명집례》는 조정에서 당시에 반강(頒降)하지 않았으며, 우리 나라에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앞서의 흠차 대인(欽差大人)들은 모두 교자(轎子)를 탔고, 전하께서도 또한 연(輦)을 타고 조명(詔命)을 맞이함이 구례(舊例)이었습니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반강(頒降)한 번왕 의주(藩王儀註)는 신이 아직 자세하게 알지 못하니, 예조(禮曹)로 하여금 다시 상고하게 하여, 만약 의주 안에 말을 탄다는 글이 없으면 거절하기가 더욱 어렵지 않으며, 비록 말을 탄다는 글이 있더라도 전례(前例)로써 연(輦)을 타고 굳게 거절함이 좋을 것이며, 이 일은 결코 따를 수가 없습니다. 저가 비록 들어주지 않더라도 전하께서는 연을 타고 행하심이 마땅합니다. 조정에서 비록 듣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르다고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조서를 맞이할 때에 연을 타는 것은 조종(祖宗) 이래로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 앞서 본국에 도래(到來)한 사신(使臣)이 많았는데 그르다고 하는 자가 있지 않았으니, 지금 갑자기 구례(舊例)를 고칠 수는 없습니다. 허종(許琮)으로 하여금 반복(反覆)하여, 개설(開說) 하게 하여, 그래도 고집(固執)하고 듣지 않으면 권도로 마땅히 말을 타심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신승선(愼承善)은 의논하기를,
"조서를 맞이함은 큰 일입니다. 마땅히 엄숙함을 다하여야 하니, 말을 타고서 초라하게 위의(威儀)를 없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위의가 없으면 조정(朝廷)의 예(禮)도 따라서 낮아질 것이니, 이 앞서 사신이 명을 받들고 우리 나라에 왔을 적에 모두 말을 타야 한다고 의논하는 자가 없었음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조정이 우리 나라를 경대(敬待)함은 천하(天下)가 다같이 아는 바이거늘, 이제 만약 말을 탄다면 그 경대하는 뜻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명집례》는 그 내력이 이미 오래 되었으나, 연을 탈 때마다 그르다고 의논하는 자가 없었으니, 오늘날 한 사신의 말로써 갑자기 조종(祖宗)의 구례(舊禮)를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원접사(遠接使)로 하여금 여러 모로 설득시켜서 이해가 가도록 하여 예전대로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중국 사신이 비록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의거하여 조서를 맞이할 때는 말을 탐이 마땅하다고 하나, 그러나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이래로부터 조서를 맞을 때에 모두 연을 탔었는데, 그 때는 어찌 《대명집례》가 없어서 사신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으며, 조정도 또한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대저 《집례(集禮)》는 애당초 본국에 반사(頒賜)한 것이 아닌데 이제 어찌 갑자기 준행하겠습니까? 이 말은 끝내 따를 수가 없으니 마땅히 다시 반복(反復)하여 설득하게 깨닫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유지(柳輊)·박건(朴楗)·권중린(權仲麟)은 의논하기를,
"연을 타고 조서를 맞이함은 오늘날만이 그러함이 아닙니다. 우리 조종(祖宗) 이래로부터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제 사신이 비록 《대명집례》에 의거하여서 권도를 따라 말을 타야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갑자기 그 말을 좇아서 조종 만세(祖宗萬世)에 이미 행한 전법을 가볍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번왕 의주(藩王儀註)는 곧 대명 고황제(大明高皇帝)가 우리 나라에 내려준 글입니다. 그 조서(詔書)를 영접하는 데 말하기를, ‘왕(王)은 면복(冕服)을 갖추고 행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사신이 보인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실린 글과 다름이 없습니다마는, 그러나 이 앞서 연을 타고 조서를 맞이함은 행한 지가 오래 되었고, 중조(中朝)의 사신이 일찍이 한 사람도 감히 그르다고 한 자가 없었으니, 진실로 면복(冕服)을 갖추고서 행한다는 말은 지금 사신의 편견(偏見)같은 것을 이름이 아닙니다. 비록 편견을 고집하면서 들어주지 않더라도 또한 이 이치에 의거하여 다시 말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결연(決然)코 마침내 시행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번왕 의주(藩王儀註) 안에는 진실로 말을 탄다 가마를 탄다는 글이 없는데 지금 곧 중국 사신의 일시(一時)의 말로 인하여 갑자기 조종의 옛 관례를 바꿈이 옳겠느냐? 또 번왕 의주는 우리 나라에서 스스로 만든 글이 아니고 곧 고황제(高皇帝)가 특사(特賜)한 것이다. 내게 있어서는 비록 말을 타고 혹 도보(徒步)한다 하더라도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다만 개국(開國)한 이래로 말을 탄 예(禮)가 있지 않았으니, 내가 만약 말을 탄다면 이것은 조종(祖宗)의 일이 모두 그르게 된다. 또 번왕 의주는 다른 데는 말을 탄다 가마를 탄다는 글이 없는데, 유독 상사 선로(上賜宣勞)를 받는 의식에만 말을 탄다는 글이 있으니, 진실로 조서를 맞이함을 중한 일로 여겼기 때문에 예물(禮物)을 갖추고, 상사(上賜)를 받음은 조서를 맞이하는 데 비하면 경(輕)한 까닭으로 예물을 갖추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이제 만약 말을 타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중국(中國)에 자랑하기를, ‘조선(朝鮮)이 실례(失禮)하였음은 그 유례가 이미 오래 되었거늘 내가 바로 고치었으니, 나에게 빛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할 것이다. 이제 다시 예조 당상(禮曹堂上)이나 혹은 문례관(問禮官)을 보내어 의리[義]에 의거하여 말하려고 하니, 만약 들어주지 않거든 마땅히 말하기를, ‘고황제가 준 번왕 의주에는 말을 탄다는 글을 보지 못하였고, 전하(殿下)가 말을 탄다는 이런 이치는 만무(萬無)합니다. 대인(大人)이 고집하여 말을 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면 우리 나라에서도 마땅히 중국에 아뢰어서 천자가 말하기를, 「말을 타라.」고 한 뒤에야 말을 타겠습니다.’고 하면, 저들이 반드시 짐작(斟酌)하여 할 것이니, 승정원(承政院)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성상(聖上)의 하교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말을 타야 할 이치가 만무(萬無)하니, 마땅히 다시 문례관(問禮官)을 보내어 이 뜻을 진달함이 옳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21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316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傳曰: "我國事大至誠, 故朝廷亦敬待我國。 開國以來, 國王無乘馬迎詔之禮。 今來使臣雖據《大明集禮》而言, 豈可遽從其言而乘馬迎詔乎? 問于領敦寧以上、政府、禮曹。" 沈澮議: "乘輦迎詔, 自祖宗朝行之已久。 然使臣據《大明集禮》而言, 若違其志, 則不無忿怒。 從權乘馬何如?" 尹弼商議: "迎詔時殿下乘輦, 前例皆然。 今次使臣雖據《大明集禮》而言, 勢難從之。 宜據前例, 令遠接使反覆開曉何如?" 洪應議: "迎詔乘輦, 祖宗故事, 已往使臣所共知也。 以此開曉爲便。" 李克培議: "今以天使謄寫文觀之, 則接詔書一事也, 受上賜宣勞儀亦一事也。 接詔儀則只曰王具冕服行, 不云乘馬; 受上賜宣勞儀則云王乘馬行。 接詔書與受宣勞, 孰輕孰重? 臣以爲迎詔重於受賜物也。 接詔書儀無乘馬之文, 則天使何據受賜物儀而如此云耶? 況《大明集禮》, 朝廷時未頒降, 而我國所不知。 前此, 欽差大人等皆乘轎, 殿下亦乘輦, 迎命舊例也。 太祖高皇帝頒降藩王儀註, 臣未及詳知, 令禮曹更考。 若儀註內無乘馬之文, 則拒之尤不難。 雖有乘馬之文, 以前例乘輦固拒之爲便。 此事決不可從。 彼雖不聽, 殿下當乘輦而行。 朝廷雖聞之, 必不非之。" 盧思愼議: "迎詔時乘輦, 祖宗以來, 行之已久。 前此到本國使臣多矣, 而無有非之者, 今不可遽改舊例也。 令許琮反覆開說。 然猶固執不聽, 權宜乘馬何如?" 愼承善議: "迎詔, 大事也, 當盡嚴肅, 不可乘馬, 以致粗率無威儀也。 若無威儀, 則朝廷之禮, 從以下矣。 前此使臣奉命到國, 皆無乘馬之議者, 爲是故也。 況朝廷敬待我國, 天下所共知, 今若乘馬, 則其於敬待之意何? 《大明集禮》, 其來已久, 每乘輦, 無非議之者。 不可以今日一使之言, 遽變祖宗舊禮也。 令遠接使多般開諭, 使之解悟, 仍舊何如?" 李崇元議: "天使雖據《大明集禮》曰迎詔時當乘馬, 然自太祖高皇帝以來, 迎詔時皆乘輦, 其時豈無《大明集禮》而使臣不以爲非? 朝廷亦不以爲非。 凡《集禮》, 初非頒賜本國者, 而今遽遵行乎? 此言終不可從。 當更反復開說, 使之曉悟何如?" 柳輊、朴楗、權 仲麟議: "乘輦迎詔, 非獨今時然也, 自我祖宗以來, 莫不皆然。 今使臣雖據《大明集禮》而曰從權乘馬, 豈可遽從其說, 輕變祖宗萬世已行之典乎? 況藩王儀註, 乃大明 高皇帝賜我國之書也。 其接詔書乃曰: ‘王具冕服行’ 與今使臣所示《大明集禮》所載之文無異焉。 然前此乘輦迎詔行之已久, 而中朝使臣曾無一人敢非之者, 誠以具冕服行之言, 非謂如今使臣之偏見也。 雖固執偏見而不許, 亦以此據理更說爲便。" 傳曰: "此事決然終不可爲也。 予見藩王儀註內, 固無乘馬乘轎之文, 而今乃因天使一時之語, 遽變祖宗之舊, 可乎? 且藩王儀註, 非我國自爲之書, 乃高皇帝特賜。 在予雖乘馬或徒步, 亦當爲之, 但自開國以來, 未有乘馬之禮, 予若乘馬, 則是祖宗之事皆非也。且藩王儀註他無乘馬乘轎之文, 而獨受上賜宣勞儀, 有乘馬之文。 誠以迎詔重事, 故備禮物; 受賜比迎詔爲輕, 故不備禮物而然。 今若乘馬, 彼必誇於中國曰: ‘朝鮮失禮, 其來已久, 我乃改之。’ 則於我不亦無光乎? 今欲更遣禮曹堂上, 或問禮官, 據義言之。 若不聽, 當語之曰: ‘高皇帝所賜藩王儀註, 未見乘馬之文。 殿下乘馬, 萬無是理。 大人固執以爲當乘馬, 則我國當奏聞上國, 天子曰乘馬, 然後乘馬云爾。’ 則彼必斟酌爲之矣。 於承政院意何如?" 僉啓曰: "上敎允當。 萬無乘馬之理, 當更遣問禮官, 陳此意可也。"
- 【태백산사고본】 32책 21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316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