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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14권, 성종 19년 3월 2일 병인 1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장령 김미가 이원을 복직시키는 명을 거둘 것과 유향소 설치를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장령(掌令) 김미(金楣)가 아뢰기를,

"전일(前日)에 전교하기를, ‘이원(李源)이 6년이나 귀양살이를 하였으니, 어찌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마음이 없겠느냐?’고 하시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원(源)이 귀양가서 구례(求禮)에 있을 때에 신미(申眉)와 결탁하여 1읍(邑)을 횡행(橫行)하며 장리(長利)를 수납(受納)한다 사칭(詐稱)하면서 민간(民間)의 미속(米粟)을 많이 취해서 자기의 소유로 삼았고, 전지(田地)를 가진 중[僧]이 있다고 들으면 다 탈취하고, 중의 족친(族親)의 전지까지도 또한 모두 탈취(奪取)하므로, 읍민(邑民)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읍수(邑守) 최지성(崔智成)에게 호소(呼訴)하니, 원(源)최지성으로 더불어 말다툼하고 공사(公事)의 문권(文券)을 취하여 갔으니, 그 부도(不道)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보건대, 비록 6년의 귀양살이를 겪었으면서도 곧 반성하는 마음이 없으니, 청컨대, 복직(復職)의 명(命)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源)은 바로 세종(世宗)의 친손(親孫)이며 영응(永膺)의 독자(獨子)이니, 봉사(奉祀)는 지중(至重)한 것이므로 지금의 복직(復職)은 영응(永膺)의 부인(夫人)의 상언(上言)에 의한 것이었다. 대저 사람이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자가 아니라면 개행(改行)하는 이치가 없지 않으니, 원(源)이 만약 개과(改過)하였으면 진실로 서용(敍用)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범한 바가 강상(綱常)에 관계되고 그대들도 말하여 마지 않는 까닭으로 우선 성명(成命)을 거두겠다."

하였다. 김미(金楣)가 또 소매 속에서 글을 내어 올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전라(全羅) 1도(道)는 옛 백제(百濟)의 터[墟]이니, 그 유풍(遺風)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완한(頑悍)307) 한 풍속이 다른 도(道)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그 도적(盜賊)은 혹 집에 불을 지르거나 혹 길가는 사람을 저격(狙擊)하여 대낮에 양탈(攘奪)하므로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호남(湖南)의 습속은 강도(强盜)는 있어도 절도(竊盜)는 없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또 왜복(倭服)에 왜어(倭語)를 하는 수적(水賊)이 있어, 해포(海浦)에 출몰(出沒)하면서 몰래 행선(行船)을 엿보고 있다가 배 안에 있는 사람을 다 바다에 던지고 몰래 도서(島嶼)에 숨고 하여 마치 귀신과 물여우[鬼蜮]와 같으므로, 관리(官吏)가 비록 수포(搜捕)308) 하려고 하더라도 누구를 어찌할 수 없으니, 이것은 다른 도에 없는 일입니다. 그 죄를 범하고 도망하여 숨는 자는 세력 있는 백성[豪民]과 교활한 관리[猾吏]가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긴 울타리에 겹문을 만들고 다투어 굴혈(窟穴)을 지어 줍니다. 만일 본주(本主)가 근심(根尋)309) 하는 자가 있으면 공금(公禁)에 참여하지 않고, 심한 자는 혹 불량한 무리를 모아 본주(本主)를 구축(敺逐)하여 상처를 입혀서 가도록 하니, 이것 또한 다른 도에 없는 일입니다. 그 귀신(鬼神)을 숭상함에 있어서는 강만(岡蠻)·임수(林藪)가 모두 귀신 이름이 붙어 있으며, 혹 목인(木人)을 설치하거나 혹 지전(紙錢)을 걸어 생황(笙簧)을 불고 북[鼓]을 치며, 주적(酒炙)이 낭자(狼藉)하고 남녀(男女)가 어울려서 무리지어 놀다가 노숙(露宿)하면서 부부(夫婦)가 서로 잃어버리기까지 하여도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음일(淫佚)310) 을 좋아함에 있어서는 여항(閭巷)의 백성이 처첩(妻妾)을 서로 도둑질하고 서로 원수가 져서 첩소(牒訴)가 고슴도치의 털처럼 복잡합니다. 심지어 기공(期功)의 친(親)을 보기를 범인(凡人)과 같이 하여, 혹 아우가 형의 첩(妾)을 상피 붙고, 종[奴]이 주모(主母)를 간통하여서 인륜(人倫)을 무너뜨린 자가 간혹 있으며, 사치(奢侈)스러운 풍속을 논(論)하면 여염(閭閻)과 읍리(邑吏)의 의복(衣服)이 곱고 화려하며, 시골의 천한 백성들은 음식(飮食)을 물퍼쓰듯이 해먹으므로, 풍년(豐年)에 절재(節栽)할 줄을 모르고 한 번 흉년(凶年)을 만나면 강보(襁褓)의 어린아이까지 유리(流離)합니다. 능범(陵犯)311) 하는 풍속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천(賤)한 이가 귀(貴)한 이에게 행패를 부리며 병졸이 장수를 모함(謀陷)하고 이민(吏民)이 수령(守令)을 꾸짖어 욕하며, 명예를 구하고 분수를 범함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근일(近日)에 광산(光山)에서 군수[倅]를 사살한 일은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대저 이 여섯 가지는 모두 다른 지방에 없는 풍속이니, 개혁(改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臣)이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6년을 재임(在任)하였으므로 외방(外方)의 치체(治體)를 갖추 알고 있습니다. 감사(監司)가 된 자는 비록 그 폐단을 통렬히 혁신(革新)하려고 하여도 1년 안에 겨우 한 두 번 순행(巡行)하니, 수령(守令)의 현부(賢否)를 알 수가 없는데, 어느 겨를에 풍속을 고쳐 박(薄)한 것을 뒤집어서 후(厚)한 데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만일 나를 써주는 이가 있다면 단 1년으로 나라를 바로잡고, 3년이면 성과를 올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의 덕(德)으로써도 1년 동안에는 크게 다스릴 수 없고 3년이라야 성과를 올릴 수 있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자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강명 정대(剛明正大)한 자를 택(擇)하여 감사(監司)를 삼되, 그 임무를 오래 맡도록 하여 3년이 지나서야 체차(遞差)하면, 완한(頑悍)한 풍속이 점점 혁신 될 것입니다. 혹은 또 말하기를, ‘예전에는 1향(鄕) 가운데에 정직(正直)한 품관(品官)1, 2원(員)을 택하여 향유사(鄕有司)를 삼아서 풍속을 바로잡게 하고 이름하기를 유향소(留鄕所)312) 라고 하였었는데, 혁파(革罷)한 이래로 향풍(鄕風)이 날로 투박(渝薄)하여졌다.’고 합니다. 신(臣)의 생각에도 다시 유향소(留鄕所)를 세워, 강직한 품관을 택하여 향유사(鄕有司)를 삼으면, 비록 갑자기 야박한 풍속을 변모시킬 수는 없더라도 또한 향풍(鄕風)을 유지(維持)하여 완흉(頑兇)한 무리가 거의 조금은 그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감사(監司)의 임기(任期)를 3년으로 하자는 법은 만일 그가 어질면 가(可)하나 혹 용렬(庸劣)할 것 같으면 폐단을 백성에게 끼칠 것입니다. 또 풍속(風俗)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변모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고, 김미(金楣)가 말하기를,

"감사(監司)가 1기(期) 안에 순행(巡行)함이 2, 3차(次)에 불과(不過)하니, 풍속의 박악(薄惡)함을 어느 겨를에 다스리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정승(政丞)의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김미(金楣)가 말하기를,

"예전에도 유향소(留鄕所)가 있었으니, 만약에 다시 세우면, 완은(頑嚚)313) 한 무리는 방자(放恣)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윤필상이 말하기를,

"혹은 유향소(留鄕所)가 향풍(鄕風)을 유지하는 데에 유익(有益)하다고 이르고, 혹은 유향소(留鄕所)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이 도리어 폐단을 받는다고 이릅니다. 대저 법(法)은 스스로 행하지 못하고 사람을 기다려서 행하니, 요(要)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적임자를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요,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니, 관리가 봉행(奉行)하지 않으면 비록 신법(新法)을 세운다 하더라도 어찌 유익하겠는가? 풍속(風俗)이 박악(薄惡)함은 마땅히 점차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21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313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풍속-풍속(風俗)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註 307]
    완한(頑悍) : 완악하고 독살스러움.
  • [註 308]
    수포(搜捕) : 수색하여 체포함.
  • [註 309]
    근심(根尋) : 철저히 찾아냄. 뿌리를 뽑아 버리듯 남김없이 찾아냄.
  • [註 310]
    음일(淫佚) : 남녀 사이의 음란한 교제.
  • [註 311]
    능범(陵犯) : 업신여겨 범(犯)함.
  • [註 312]
    유향소(留鄕所)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지방 수령(守令)의 정치를 돕고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敎化)하기 위해 설치된 지방 자치 기관. 나라의 정령(政令)을 백성에게 전달하고, 향리(鄕吏)의 횡포를 막고 조세의 부과와 징수를 도와주었음.
  • [註 313]
    완은(頑嚚) : 완고하고 도리에 어두움.

○丙寅/御經筵。 講訖, 掌令金楣啓曰: "前日傳曰: ‘謫竄六年, 豈無悔過自新之心乎? 然謫在求禮時, 交結申眉, 橫行一邑, 詐稱收納長利, 多取民間之米粟, 以爲己有。 聞僧人有田者, 則盡奪之, 至於僧之族親田, 亦皆奪取。 邑民不勝其苦, 訴於邑守崔智成, 智成鬪狠, 取公事文券而去。 其爲不道, 何可勝言? 以此觀之, 則雖經六年之謫, 便無懲艾之心。 請停復職之命。" 上曰: "世宗之親孫, 永膺之獨子。 奉祀至重, 今之復職, 以永膺夫人上言也。 大抵人非自暴自棄者, 則不無改行之理。 若改過, 則固當敍用, 然其所犯係關綱常, 爾等亦言之不已, 故姑收成命。" 金楣又於袖中出書以進, 其書曰:

全羅一道, 古百濟之墟, 其遺風尙存, 而頑悍之俗, 比他道尤甚。 其盜賊則或焚蕩屋廬, 或狙擊道路, 白日攘奪。 世云: "湖南之俗有强盜, 無竊盜者," 以此。 又有水賊, 語出沒海浦, 潛伺行船, 盡將舟中人投之海, 潛竄島嶼, 有同鬼蜮。 官吏雖欲搜捕, 莫之誰何, 此他道所無之事。 其匿逋逃者, 則豪民猾吏, 相爲表裏, 長籬複戶, 競作窟穴。 如有本主根尋者, 則公禁不與, 甚者或聚不逞之徒, 敺逐本主, 使創殘而去, 此亦他道所無之事。 其尙鬼神也, 則岡蠻林藪, 皆有神號, 或設木人, 或罥紙錢, 吹笙戞鼓, 酒(灸)〔炙〕 狼藉。 男女雜沓, 群遊露宿, 至有夫婦相失而不以爲怪。 其好淫佚也, 則閭巷之民, 妻妾相竊, 轉相仇援, 牒訴如蝟。 甚至期功之親, 視若凡人, 或弟蒸兄妾, 奴奸主母, 以敗人倫者, 比比有之。 論奢侈之俗, 則閭閻邑吏衣裳鮮麗, 村塢氓隷飮食若流。 豐年不知裁節, 一遇凶年, 則襁屬流離。 陵犯之風, 則下慢上, 賤暴貴, 卒伍而誣構主帥, 吏民而罵詈守令, 干名犯分, 無所不至。 近日光山射倅之事, 口不忍言。 凡此六者, 皆他方所無之俗, 不可不革。 臣以金堤郡守, 在任六載, 備諳外方治體。 爲監司者, 雖欲痛革其弊, 一年之內, 纔一二度巡行, 守令賢否且不能知, 何暇移風易俗、反薄歸厚乎? 孔子曰: "如有用我者, 期月而已可也, 三年有成。" 以聖人之德, 期月之間, 未能大治, 三年乃成, 況其下者乎? 臣意以謂當擇剛明正大者爲監司, 使之久於其任, 三年乃遞, 則頑悍之俗, 漸可革也。 或又曰: "古者一鄕之中, 擇品官正直一二員, 爲鄕有司, 以正風俗, 名曰留鄕所。 革罷以來, 鄕風日以渝薄。" 臣意亦以爲復立留鄕所, 擇剛直品官, 爲鄕有司, 則雖未能卒變薄俗, 亦或有維持鄕風, 而頑兇之徒, 庶少戢矣。

上顧問左右, 領事尹弼商啓曰: "監司三年之法, 如其賢則可矣, 如或庸劣則貽弊於民。 且風俗非一朝一夕可變也。" 金楣曰: "監司一期內, 巡行不過兩三次, 風俗薄惡, 何暇治之乎?" 上曰: "政丞之言正是。" 金楣曰: "古有留鄕所, 若復立, 則頑嚚之徒, 不得放恣矣。" 弼商曰: "或云留鄕所於維持鄕風有益, 或云留鄕所非人, 則民反受弊。 大抵法不自行, 待人而行, 要在監司守令得人耳。" 上曰: "人能弘道, 非道弘人。 吏不奉行, 雖立新法, 何益? 風俗薄惡, 當漸以治之耳。"


  • 【태백산사고본】 32책 21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313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풍속-풍속(風俗)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