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과 진사가 거관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전경 문신(專經文臣)1221) 성희증(成希曾)·권주(權柱)·이오(李鰲)·이자견(李自堅)·유인홍(柳仁洪) 등 다섯 사람에게 강(請)을 시켰다. 성희증은 《시경(詩經)》 관저편(關雎篇)을 강(講)하여 통(通)하였고, 유인홍은 《서경(書經)》 우공편(禹貢篇)을 강하여 통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불통(不通)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이극증(李克增)이 아뢰기를,
"근래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거관(居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학교(學校)가 점차 비어가고 있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가 또한 아뢰기를,
"유생(儒生)은 진실로 법으로써 다스리거나 촉박하게 몰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날 흥학 조건(興學條件)을 본조(本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으므로, 신 등이 여러 문신(文臣)들과 함께 권하고 징계하는 방법으로 여러 조목을 의논하여서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대신(大臣)이 혹 자질구레한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거행하지 않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이 조목 중에 권할 바도 있고 징계할 바도 있으며 《대전(大典)》에 구애될 바가 없고 일의 대체(大體)에 해될 바가 없는데도 결국 대신(大臣)에게 논박되어 마침내 시행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작사도방(作舍道傍)1222) 에 3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은 우선 시험해 보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좌우의 신하를 돌아보고서 물으니, 영의정(領議政)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기를,
"비록 행할 만한 조목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질구레하여 행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유생(儒生)은 가동(家僮)을 가둘 수 없으니[家僮囚禁],1223) 학업에 나아가도록 하소서."
하고, 좌의정(左議政) 홍응(洪應)이 말하기를,
"가동(家僮)을 가두는 법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문을 일으키는 방법이 상세히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유생(儒生)이 거관(居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비록 다시 새로운 법을 세우더라도 한갓 번거로울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책임이 사장(師長)1224) 에게 있다고 여기는데, 어찌 반드시 별도로 새 법을 세워야만 하겠는가?"
하니, 광릉 부원군(廣陵府院君) 이극배(李克培)가 아뢰기를,
"근자에 비록 유생(儒生)을 불러서 학교에 나아가도록 권(勸)하였어도 오히려 권유되지 않는데, 비록 백 명의 사장(師長)이 있다고 한들 어찌 거관(居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세종조(世宗朝)에 있어서 문과(文科)의 관시(館試)1225) 와 한성시(漢城試)1226) ·향시(鄕試)1227) 에서는 초장(初場)에 경서(經書)를 강(講)하였으므로 그때 뜻있는 선비들이 거관(居館)하는 것을 좋아하고 모두 경학(經學)을 숭상하였으나, 신숙주(申叔舟)가 헌의(獻議)하고서부터 강경(講經)을 없애고 제술(製述)로 시험하자 선비들이 모두 학문에 마음을 쏟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재 관시·한성시·향시를 가을에 시취(試取)하고 다음해 봄에 이르러서 경서(經書)를 강(講)하기 때문에, 총명하고 민첩한 자는 스스로 기억하고 외겠다고 하여서 몇 개월 사이에 이룰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문장의 장구(章句)에만 골몰한 무리가 만에 하나도 있기 어려운 요행을 바라니, 유생(儒生)이 거관(居館)하는 것을 싫어함은 오직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현재의 계책으로 적당한 사유(師儒)를 택하여 관관(館官)으로 삼는 것만함이 없으며, 또 초장(初場)에서 경서를 강하던 법을 복구한다면 유생들이 다들 강경(講經)하지 않고서는 뽑힐 수 없음을 알고 모두 학교에 있으면서 배우고 익히게 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유생(儒生)으로서 학교에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뜻을 세운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뜻을 세운 바가 있는 자라면 어찌 거관(居館)하는 바를 꺼리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210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273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선발(選拔)
- [註 1221]전경 문신(專經文臣) : 조선조 성종(成宗) 때 비롯된 제도로서, 식년(式年)마다 문신(文臣) 중 경서(經書)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이를 전경 문신(專經文臣)이라 하고, 어전(御前)에서 경서를 시험하였음.
- [註 1222]
작사도방(作舍道傍) : 길가에 집을 짓는다는 뜻으로, 의견이 많아서 결정짓지 못함을 이르는 말임.- [註 1223]
가동(家僮)을 가둘 수 없으니[家僮囚禁], : 법률을 위반하여 공사(公事)를 회피(回避)한 자를 대신하여 그 가동(家僮), 즉 종을 구금(囚禁)하는 일. 가동 수금은 1회에 3일을 넘지 못하고 또 3인을 넘지도 못하며, 석방(釋放) 후 3일이 지나지 않으면 재수금(再囚禁)하지 못함.- [註 1224]
사장(師長) : 성균관 대사성.- [註 1225]
관시(館試) : 성균관(成均館)에서 보이는 문과 초시(文科初試). 생원(生員)·진사(進士)로서 거재(居齋)한 지 만 3백일이 되는 자를 녹명(錄名)하여 시험보이되, 50명을 선발하였음.- [註 1226]
한성시(漢城試) : 한성부(漢城府)에서 보이는 생원·진사와 문과 초시(文科初試). 문과 초시의 경우 40명을 뽑았음.- [註 1227]
향시(鄕試) : 문과(文科), 생·진과(生進科), 잡과(雜科) 등 과거의 초시(初試)로 각도(各道)에서 보이는 1차 시험.○辛未/上御宣政殿, 講專經文臣成希曾、權柱、李鰲、李自堅、柳仁洪五人。 希曾講《詩》 《關雎》篇, 通; 仁洪講《書》 《禹貢》, 粗通; 餘皆不通。 講訖, 同知成均館事李克增啓曰: "近來生員進士不樂居館, 學校漸至虛踈。" 禮曹判書柳輊亦啓曰: "儒生固不可繩之以法而促迫馳驟之也。 然前日興學條件, 令本曹議定, 臣等與諸文臣擬議, 勸懲之方數條以進。 大臣或以爲細碎, 遂不奉行。 臣以謂此條中有所勸、有所懲, 無妨於《大典》, 無害於事體, 而終爲大臣所駁, 竟不施行,所謂 ‘作舍道傍, 三年不成’ 者。 臣請姑試之。" 上顧問左右, 領議政尹弼商對曰: "雖有可行之條, 亦有細碎難行者。儒生不可囚家僮使之就學。" 左議政洪應曰: "囚家僮之法,從古有之, 然興學之方, 非不詳備也。 儒生不樂居館, 雖更立新法, 徒爲紛擾耳。" 上曰: "予以爲責在師長, 何必別立新法乎?" 廣陵府院君 李克培啓曰: "近者雖召致儒生, 勸之就學, 而猶不勉勵, 雖百師長, 其何能使之居館乎? 在世宗朝, 文科館、漢城、鄕試初場講經, 其時有志之士, 樂於居館, 皆尙經學。 自申叔舟獻議, 罷講經, 試製述, 士皆不致意於學。 且今館、漢城、鄕試取之於秋, 至明春講經, 故聰敏者自謂記誦數月之間可以得之。 由是章句之徒, 僥倖萬一, 儒生之不樂居館, 職此之由。 今計莫若擇其師儒爲館官, 又復初場講經之法, 則儒生皆知非講經不得, 而皆居學講習矣。" 上曰: "儒生不樂就學者, 以無立志故也。 如有立志者, 則豈憚於居館乎?"
- 【태백산사고본】 32책 210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273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선발(選拔)
- [註 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