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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99권, 성종 18년 1월 23일 갑자 5번째기사 1487년 명 성화(成化) 23년

대사간 김수손 등이 의정부 당상관이 제조 등을 맡지 말 것 등에 관해 상소하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김수손(金首孫)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 등은 제왕(帝王)이 행할 만한 도(道)와 국가에서 없앨 만한 폐단을 삼가 채집하여 조목(條目)별로 아래에 진술합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경(經)에 이르기를, ‘예전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고 하는 이는 먼저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이는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려고 하는 이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으려고 하는 이는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예전의 제왕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요(堯)임금순(舜)임금긍긍 업업(兢兢業業)051) 한 것이나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율율 익익(慄慄翼翼)052) 한 것은 모두 이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진실로 바르지 못하여 옳고 그름에 어두우면 아첨하는 말을 달게 여기고 바른 의논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며, 마음이 진실로 바르지 못하여 사람을 쓰고 버리는 데 어두우면 소인(小人)이 벼슬자리에 있게 되고 군자(君子)는 조정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법을 적용하는 것이 혹시 높고 낮은 데에 이를 것이며 형벌을 쓰는 데에 경중을 잃을 것이니, 어찌 깊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옛 성인(聖人)을 법으로 삼아 그 마음을 바로잡는다면 당(唐) 우(虞) 삼대(三代)의 정치를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은 듣건대, 옛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이루어 세우기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고 뒤집혀 떨어지기 쉬움은 털을 불태우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창업(創業)의 지극히 어려움과 수성(守成)의 더욱 어려움을 진지하게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충만한 것을 가지고 수성(守成)할 때를 당하여서는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하며 선왕(先王)이 세운 법이 있어서 시행하기에 충분하니 높은 곳에서 팔짱을 끼고 하는 일 없이 있을 만하며, 사방에서 들어오는 재부(財賦)가 공급하기에 족하니 즐겁게 놀면서 스스로 은혜를 베풀 만합니다. 그렇게 되면 임금의 마음이 이에 교만하고 편안하여지기 때문에 정벌(征伐)을 좋아하고 유전(遊畋)을 즐겨하며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신선(神仙)의 술법을 사모하는 이가 대를 잇는 임금 중에서 많이 나와 국가의 일이 그릇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끝없이 오직 나라를 근심하라.’는 것으로 그 임금에게 아뢰어 경계한 것은 바로 이를 위한 것입니다. 신 등은 듣건대, 예전에 수성(守成)을 잘한 이로 주(周)나라에서는 성왕(成王)·강왕(康王)을 말하고 한(漢)나라에서는 문제(文帝)·경제(景帝)를 말한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만일 성왕·강왕을 본받으려고 하신다면 마땅히 옥(獄)에 죄수가 없이 비었던 것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며, 문제·경제를 본받으려고 하신다면 마땅히 큰 창고의 곡식이 붉게 변하도록 나라가 부유하였던 것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진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릇 어렵고도 큰 업(業)을 보전하는 이가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면 수성(守成)하는 도(道)를 진실로 몇몇 임금에게 양보함이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전대의 제왕(帝王)이 모두 간(諫)하는 말에 따랐으면 나라가 흥하였고 간하는 말을 거절하였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것을 사책(史策)을 상고하면 명백히 볼 수 있습니다. 《서경(書經)》순(舜)임금의 덕을 일컫기를, ‘자기를 버리고 남의 말에 따랐다.’ 하였고, 탕왕(湯王)의 덕을 일컫기를, ‘간함을 따르고 거슬리지 아니하며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순임금은 큰 성인이고 탕임금도 큰 성인인데 허물이 없다고 하지 아니하고 허물을 고친다고 한 것은,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과실이 없을 수 없으나 과실을 들으면 반드시 고치는 것이 바로 성인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기(史記)》에 일컫기를, ‘주(紂)가 천자가 되어 지혜가 간함을 거역하기에 족하고 말이 잘못을 꾸미기에 족하였다.’고 하였으니, 주(紂)가 재주와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몸을 망치고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천하의 악(惡)함이 모두 귀착(歸著)되어 간함을 거슬리고 마음대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대저 충성되고 정직한 말이 처음에는 귀에 거슬려서 미워할 만하나 그 뜻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데 있는 것이며, 아첨하고 아부하는 말이 처음에는 뜻에 따라서 기뻐할 만하나 그 뜻은 임금에게 아첨하여 사랑을 받기를 꾀하는 데 지나지 아니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주(紂)로써 경계하시고 순임금탕임금을 본받으신다면 옹희 태화(雍熙泰和)053) 의 다스림이 오로지 예전에만 훌륭하였던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상벌(賞罰)은 임금의 큰 권한이니 지극히 공정한 도(道)가 아니면 행할 수 없습니다. 대저 상(賞)이란 것은 공이 있는 이를 표창하는 것인데 한 번 사사로운 데에서 나오면 착한 일을 행하는 이를 권장할 수 없을 것이며, 벌이란 것은 죄가 있는 자를 다스리는 것인데 한 번 사사로운 데에서 나오면 악한 일을 하는 자를 징계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공이 있는 자는 비록 원수라도 상을 반드시 주어야 하며, 죄가 있는 자는 비록 귀근(貴近)이라도 벌을 반드시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賞)은 봄과 여름을 짝하고 벌(罰)은 가을과 겨울을 형상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하늘을 본받아서 사사로움이 없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참람하게 하지 아니하고 지나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상벌을 모두 적합하게 한 것은 모두 이 도(道)를 쓴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고종성왕을 본받아서 상을 주고 벌을 행하는 즈음에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하게 처리하면 이것도 제왕(帝王)이 행할 일입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서경》에 이르기를, ‘그 덕을 변함없게 하면 그 위(位)를 보존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그 덕을 이랬다 저랬다 하면 움직임에 흉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하였으니, 임금의 덕은 변함없는 것이 귀하며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한두 가지 일로써 말하겠습니다. 대저 공경(恭敬)과 근검(勤儉)은 바로 임금의 덕에 당연한 것이며, 어진이를 올리고 어질지 못한 이를 물리치는 것도 이것이 바로 임금의 덕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덕이 일정하지 못하여 혹시 이랬다 저랬다 하기에 이르면 앞에서 이른바 공경하는 것이 때로는 더러 게을러지기도 하며 앞에서 이른바 근검하는 것이 때로는 해이해지기도 하며 어진 자가 더러 때로는 물러가기도 하고 어질지 못한 자가 더러 때로는 올라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성탕(成湯)처럼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며, 문왕(文王)처럼 순일(純一)함을 그치지 아니한 뒤에야 비로소 변함없는 덕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결같이 하라.’는 것은 이윤(伊尹)태갑(太甲)054) 에게 고한 말이고, ‘점차 끝까지 잘하지 못한다.’는 것은 위징(魏徵)055) 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에게 경계한 말입니다. ‘처음에는 잘하지 아니함이 없으나 끝까지 잘하는 이가 드물다.’고 한 것은 이것이 예로부터 임금의 공통된 병통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이윤위징의 말로써 경계를 삼아 매와 개를 놓아 보내고 놀이로 하는 사냥을 조절하는 것이 바로 첫 정사에 정신을 가다듬는 것임을 아신다면, 반드시 끝까지 조심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여 한 가지 일도 옳지 아니함이 없고 한때라도 혹시 간단(間斷)함이 없으면 탕왕과 문왕의 정치에 어찌 가까울 뿐이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성왕(成王)이 다스리는 관리를 독려해서 바로잡는 데에 총재(冢宰)로 하여금 방치(邦治)를 맡게 하고, 사도(司徒)로 하여금 방교(邦敎)를 맡게 하며, 방례(邦禮)와 방정(邦政)은 종백(宗伯)과 사마(司馬)가 맡게 하고, 방금(邦禁)과 방토(邦土)는 사구(司寇)와 사공(司空)이 주장하게 하였습니다. 삼공(三公)에 이르러서는 이르기를,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며 음양(陰陽)을 고르게 다스린다.’고 하였으니, 무릇 경륜(經綸)의 용(用)은 형적이 드러나지 아니하며 음양을 고르게 하는 묘(妙)는 소리도 들어갈 틈이 없어, 일을 하되 일삼는 것이 없는 듯하여 그 시행하는 자취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왕이 그 임무를 중히 여기면서도 육경(六卿)과 같이 직(職)을 나누고 그 임무를 같이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저 삼공은 위로는 건상(乾象)056) 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천공(天工)057) 을 대신하여 임금과 더불어 천위(天位)를 함께하고 천직(天職)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위에 있는 이는 모든 책임이 모여드니, 진동하고 흔들고 치는 데에는 진정시키려고 하며, 쓰고 달고 마르고 습한 데에는 고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백성이 편안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여 편히 모이게 할 것이며, 사방의 오랑캐가 붙따르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여 귀순해 오도록 할 것인가 하며, 육기(六氣)058) 가 고르지 못하면 화합(和合)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모든 직무가 행해지지 못하면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며 국가의 안위(安危)와 민생의 휴척(休戚)에 관계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임무가 중하고도 큰데 어찌 한 가지 일을 맡겨 그 성공을 책임지게 하면서 유사(有司)가 각각 그 업무를 관장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한(漢)나라 문제(文帝)진평(陳平)을 우승상(右丞相)으로 삼았는데, 한 해의 결옥(決獄)과 전곡(錢穀)의 수량을 물으니, 진평이 말하기를, ‘맡은 자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제가 말하기를, ‘경이 맡은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진평이 말하기를, ‘재상은 위로는 천자를 도와 음양(陰陽)을 다스리고 사시(四時)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는 만물의 마땅함을 이루며, 안으로는 백성과 친하여 붙따르게 하고, 밖으로는 사이(四夷)를 진압하고 어루만져서, 경대부(卿大夫)로 하여금 각각 그 직무를 맡게 하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그제야 옳다고 일컬었습니다. 당(唐)나라 덕종(德宗)이필(李泌)을 문하 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로 삼았는데, 이필에게 이르기를, ‘이제부터 무릇 군려(軍旅)와 양저(糧儲)는 경이 주장하라.’고 하니, 이필이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재상의 직책은 천하의 일을 함께 바르게 다스리는 것인데, 만약 맡은 바가 있으면 이는 바로 유사(有司)이고 재상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짐(朕)이 마침 실언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저 한(漢)나라·당(唐)나라의 임금과 신하도 오히려 재상이 처(處)할 도(道)를 알았는데, 하물며 지금 한나라·당나라를 박(薄)하게 여기면서 따르지 아니하는 것이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보건대, 지금의 의정(議政)은 바로 주(周)나라의 삼공(三公), 한(漢)나라의 승상(丞相), 당(唐)나라의 문하 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의정을 대우하는 것이 예전의 재상을 대우하는 것과 같습니까? 신 등이 그윽이 보건대, 국가에서 의정으로 하여금 한 사(司)의 일을 겸하여 거느리게 하고서 이름을 제조(提調)라고 하니, 진실로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축성(築城)하는 한 가지 일을 좌의정(左議政) 홍응(洪應)에게 위임하고 군적(軍籍)의 한 가지 일을 우의정(右議政) 이극배(李克培)에게 위임하였으니, 이는 국가에서 유사(有司)로 삼공을 대우하는 것이며 삼공의 도(道)로 삼공을 책(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전대(前代)와 어긋남이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만약 축성은 중한 일이며 군적도 큰 일이므로 대신에게 위임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신 등은 그윽이 의혹됩니다. 축성과 군적은 비록 중대하다고 할지라도 한갓 일개 유사(有司)의 일일 뿐입니다. 어찌 반드시 천지 음양을 조화(調和)하는 솜씨를 기다린 뒤에야 가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왕(成王)이 삼공을 대우하던 것으로써 삼공을 책(責)하고 한 가지 일을 위임하지 아니하는 것이 가합니다. 만약 전하께서는 성왕을 본받고 있는데 지금 삼공이 된 자가 도리어 한나라·당나라 재상이 소임(所任)을 알던 것과 같지 못하다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능하다는 꾸지람이 일어날 것이니, 장차 어디에 그러한 정승을 쓰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한낮에 저자를 열어서 물건을 서로 바꾸고 물러간다.’고 하였고,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예전에 저자를 만든 것은 그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바꾸는 것인데 유사(有司)가 다스린다.’고 하였으니, 대저 시사(市肆)의 설치는 그 유래가 오래 되었고 간위(奸僞)를 규찰(糾察)하는 법은 지금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 등이 삼가 듣건대, 오늘날 시사 가운데에서 교묘하게 속이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요와(澆訛)059) 하는 습관이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커진다고 하니, 우선 한두 가지를 들어서 말하겠습니다. 대저 35척(尺)에 차는 것이 면포(綿布) 한 필의 길이인데, 지금은 30여 척으로 한 필을 삼고 심한 것은 서너 동강이를 모아서 연하여 한 필을 만들어, 여럿이 모인 가운데에서 속이고 그 이(利)를 취합니다. 그리고 종이는 문권(文券)을 만들어 오랫동안 보관하는 것이므로 그 쓰임이 넓은데, 지금 상지(常紙)라고 부르는 것은 그 길이가 한 자에 차지 아니하고 그 너비는 대여섯 치에 지나지 아니하며 그 얇기도 이에 맞추었습니다. 축거(杻炬)060) 라는 것은 밤에 다니는 데 준비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물건 1백 매(枚)를 묶어서 만들었는데 지금은 싸리나무를 겉에만 꾸미고 그 가운데에는 비워서 짚으로 안을 채우고 그 밖을 묶었으니 도리어 한쪽 다리의 크기도 안됩니다. 물건이 모두 그러하겠지만 이 세 가지는 더욱 심합니다.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또한 세상이 변한 것을 볼 수 있으니, 어찌 다시 고쳐서 바로 잡을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대전(大典)》 금제조(禁制條)에 이르기를, ‘신속(新屬)061) 을 침학(侵虐)하는 자는 장(杖) 60대를 때린다.’고 하였으니, 나라의 제도가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지금은 국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침해하는 자가 그 기세가 대단함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우선 승문원(承文院) 한 사(司)를 가지고 말하면, 아무개가 새로 정자(正字)에 제수되면 반드시 공궤(供饋)할 물건을 거두는데, 명칭을 ‘징구(徵求)’라고 하여 3에서 수(數)를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청주(淸酒)가 세 병이면 무슨 물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과일·무슨 나물이 세 반(盤)이라고 하여, 무릇 백 가지 먹을 만한 것은 여기에 맞추지 아니함이 없고 하나라도 갖추지 아니하면 견책(譴責)이 따릅니다. 이처럼 하기를 반드시 다섯 차례를 지난 뒤에 다시 5의 수로 시작하여 앞에 말한 것과 같이 하고, 이처럼 하기를 반드시 세차례를 지난 뒤에야 7의 수로 시작하여 9의 수에 이른 뒤에야 그만둡니다. 한 번 ‘징구’하는 물건이 한 번의 큰 잔치를 준비할 만하니 그 비용이 너무 많으며, 또 허참연(許參宴)062) 이 있고 면신연(免新宴)이 있으니 모두 큰 비용입니다. 자신이 부잣집 자제가 아니면 비록 살림을 다 기울여 없앤다 하더라도 한 없는 비용을 대기가 어려워서 반드시 남에게 빌린 뒤에야 겨우 미치기를 바랄 뿐입니다. 승문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저 성균관(成均館)이며 교서관(校書館)이며 예문관(藝文館)이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는데, 예문관은 네 관(館) 가운데 더욱 심한 곳입니다. 그 ‘징구’가 승문원에 비하여 갑절이며 면신연과 허참연도 승문원에 비하여 갑절입니다. 또 중일연(中日宴)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다른 관에는 없는 것이고 예문관만 있는 것으로 그 비용이 또한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네 관(館)은 그래도 규찰(糾察)하는 관원이 있지만, 저 감찰(監察)하는 자는 자신이 법관이 되어 스스로 예법(禮法)을 벗어나 방종하니 누가 규찰하겠습니까? 신 등이 듣건대, 감찰이 되어 새로 온 자는 관직에 제수되면서부터 면신(免新)까지 그 사이에 비록 수십 일이 지났다 하더라도 반드시 날마다 음식을 베풀어 선생(先生)063) ·구주(舊住)를 기다리고 선생·구주가 된 자는 번갈아 드나들면서 잔치하며 맞이하는 것이 없는 날이 거의 없으며 면신연(免新宴)은 이 수(數)에 포함되지 아니합니다. 또 날마다 구주(舊住)의 집에 투자(投刺)064) 하는데 그렇게 하는 날이 적지 아니하고 그 구주 되는 자도 많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 자지(刺紙)065) 가 두껍고 넓고 큰 것이 아니면 안되는데, 대개 무명 한 필로 겨우 석 장을 바꾸니, 그 자지의 비용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감찰만 그러할 뿐 아니라 저 녹사(錄事)며 내금위(內禁衛)며 모든 성중관(成衆官)이 다투어 서로 본받아서 새로 온 자를 여러 가지로 침해합니다. 그 침해가 이와 같기 때문에 녹사를 하려고 구하다가 얻지 못한 자가 있고 내금위가 되려고 구하다가 얻지 못한 자가 있는 것은 빈궁하여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모두 말하기를, ‘지금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이와 같았으니, 옛 풍습을 폐할 수 없다.’고 하는데, 신 등도 그 유래한 바가 먼 것을 알고 있으나 그 폐단이 이때처럼 심한 적은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더구나 감찰은 백사(百司)를 규찰하는 관원이며 예문관은 아침저녁으로 시종(侍從)하는 신하인데도 오히려 국법을 어떻게 보고 있기에 연곡하(輦轂下)066) 에서도 법이 행해지지 아니하니,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 풍습을 고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오직 임금만이 복(福)을 주고 오직 임금만이 위엄을 내린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신하가 복을 주고 위엄을 주는 것이 있으면 집에 해롭고 나라에 흉하다.’고 하였으니, 위엄과 복의 권세가 신하에게 옮겨갈 수 없음을 심하게 말한 것입니다. 이제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주의(注擬)067) 하는 데 반드시 삼망(三望)을 갖추는 것은, 대저 정권(政權)은 임금의 큰 권세이므로 신하가 스스로 오로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군직(軍職)을 제수하는 데에는 그렇지 아니하여 상호군(上護軍) 이하로부터 반드시 한 사람을 의망(擬望)하니, 이는 전하께서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 것이 아니라 벼슬을 주는 것은 바로 전조(銓曹)입니다. 비록 전조에서 사람을 쓰는 공정함이 저울로 물건을 다는 것과 같다 하더라도 오히려 밑에서 스스로 차지할 수 없는데, 한 번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용납되면 올리고 낮추는 권세가 그의 손아귀에 있어서 정권이 몰래 아래로 옮겨질 것이니, 어찌 임금이 복을 주는 도(道)에 합당하겠습니까? 만약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어서 이제 갑자기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크게 옳지 않습니다. 만일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면 빨리 그만두어야 할 것인데, 어찌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하여 따라서 행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법은 반드시 한때의 권세를 마음대로 하는 신하가 위에 취품(取稟)하여 농락하는 술책으로 삼은 것인데, 어찌 멀리 전하는 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원하건대, 이 뒤로부터는 그 의망(擬望)에 반드시 세 사람을 갖추게 하여 모람된 폐단을 영구히 끊는 것이 가하겠습니다.

신 등은 삼가 보건대, 동반(東班)의 6품 이상인 자가 만약 일로 인하여 파면되었으면 다시 서용(敍用)할 때에 미쳐서는 7품 이하의 직임(職任)에 임명하지 아니하고 또 6품 이상의 직을 주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대저 6품 이상은 참상(參上)이라고 이르고 7품 이하는 참외(參外)라고 이르는데 6품·7품에서 보면 그 등급이 서로 그다지 멀지 아니하나, 참상·참외로 보면 그 사이가 동떨어진다고 이를 만합니다. 7품 이하의 직임에 임명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6품 이상의 벼슬을 주는 것은 어찌 이러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저 서반(西班)은 본시 오르내리는 관직이니 진실로 이 예(例)를 끌어대어서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상관(堂上官) 이하로부터 사정(司正)·사맹(司猛)·사용(司勇)에 제수된 자가 있으니, 대저 당상관은 3품 이상의 관직이므로 지위가 높은 자이며, 사정·사맹·사용은 7·8·9품의 관직이므로 지위가 낮은 자입니다. 저 〈동반의〉 일찍이 참상의 벼슬을 지낸 자도 오히려 참외(參外)의 관직을 잃지 아니하는데 더구나 일찍이 당상관을 지낸 이를 반드시 참외의 관직으로 낮추어 임명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국가에서 당상관을 대우하는 것이 융숭하다고 이를 만한데 이제 관직을 임명하는 것이 도리어 일찍이 참상의 벼슬을 지낸 것만 못하며, 또 조정의 크고 작은 모임에는 동반·서반이 다름이 없는데 또한 일개 말을 모는 자도 데리고 다닐 자가 없으니, 성상의 생각이 미치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이 뒤로부터는 동·서반의 참상의 예(例)에 의하여 사정(司正) 이하의 관직을 주지 말고 아울러 근수(根隨)를 주는 것을 영구히 항식(恒式)으로 삼으면, 국가에서 당상관을 대우하는 데에 아마도 그 도리를 얻을 듯합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것은 반드시 배움에 말미암는다.’고 하였으니, 배움이 나라에 유익함이 큽니다. 그러므로 역대 제왕(帝王)이 모두 학교를 일으켜서 인재를 기르는 것을 선무(先務)로 삼지 아니한 이가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중앙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주·부·군·현(州府郡縣)에 각각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가르치고 기르니, 그 학교를 일으키는 데에 지극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신 등이 듣건대, 지금 향교의 생도로 있는 자는 대개 모두 미련하고 둔하며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고 시를 외고 글을 읽는 자는 대개 적다고 하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국가에서 주·부·군·현의 교생(校生)으로 나이가 장년이고 재주가 소략(疎略)한 자를 세공(歲貢)068) 의 수에 채우게 되자 드디어 학생이 도리어 도필리(刀筆吏)069) 가 되게 하였으니, 이 법이 한 번 세워지자 유자(儒者)로서 도(道)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이 꺾였습니다. 그래서 서로 꾀하기를, ‘오늘날 우리가 교생이 되면 내일은 반드시 도필리 아무처럼 될 것이니, 차라리 인보(人保)070) 가 되더라도 향교 생도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아니하며, 차라리 다른 재주를 익히더라도 향교의 생도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의관 자제(衣冠子弟)는 부끄러워하여 자취를 감추고 가난하고 세력 없는 자는 두려워하여 자취를 숨기니, 이와 같으면서 학교가 융성하기를 바라는 것은 오히려 들어오게 하려고 하면서 문을 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찌 인재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또 듣건대, 한자(韓子)071) 가 이르기를, ‘스승이란 것은 도(道)를 전하고 학업을 주며 의혹을 풀어 주는 자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어린이의 스승은 책을 주어 그 입으로 읽는 것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수(敎授)·훈도(訓導)가 된 자는 대부분 유학(幼學)072) 과 같아서 입으로 읽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더구나 도를 전해 주고 의혹을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맹자》에 이른바, ‘그 우매함[昏昏]으로써 남을 밝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 바로 이 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생원(生員)·진사(進士)는 비록 진유(眞儒)는 되지 못하였더라도 오히려 능히 유업(儒業)을 업으로 하여 국가의 선발에 합격한 자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이 뒤로부터는 교생(校生)을 세공(歲貢)의 수에 채우지 말며 생원·진사와 회강(會講)에 합격한 사람으로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를 골라서, 가르치고 기르는 책임을 맡기는 것이 가합니다.

신 등은 삼가 보건대, 우리 조종(祖宗)께서 나라를 창업(創業)하고 전통을 드리우시는 데에 일이 혹시 폐(廢)함이 있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이미 모든 관아를 설치하여 일을 위임하였고, 사령(使令)이 앞서 부족하였기 때문에 또 노비(奴婢)를 마련하여 복역(服役)하게 하였으니, 훌륭하도다. 선왕(先王)의 제도여! 당시에 시행하여 병통이 없었고 후세에서 준수하여 폐단이 없었으니, 그 자손 만대를 위하여 계획한 바가 두루 갖추어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조폐(凋弊)하여 떨쳐서 일어나지 못한 것이 많으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한 사(司)가 있는데 그 노비가 모두 1백 명이면 많다고 이를 만하나, 그 한 사람이 별감(別監)에 속하면 훗날 벗을 부르고 무리를 이끌어서 이쪽을 버리고 저쪽으로 나아갈 자가 약간 명이고, 그 한 사람이 각 색장(色掌)에 속하면 훗날 벗을 부르고 무리를 이끌어서 이쪽을 버리고 저쪽으로 나아갈 자가 약간 명이며, 아무개가 수복(守僕)이 되면 또한 이와 같이 하고, 아무개가 수장(守藏)이 되면 이와 같이 할 것이니, 그 남아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예전에 성(盛)하던 것도 지금 이와 같으니, 예전에 쇠하던 것은 지금 어떠하겠습니까? 그 날마다 쇠잔해지는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습니다. 신 등은 장흥고(長興庫) 한 사(司)를 가지고서 밝히고자 합니다. 이 사에 노비가 1백 15구(口)가 있으니 노비의 많기가 이보다 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복(守僕)이 된 사람이 두 사람, 각 색장(色掌)이 된 사람이 세 사람, 별감(別監)이 된 자가 다섯 사람, 구사(丘史)가 되고 공신(功臣)의 종[奴]이 된 자가 모두 여섯 사람이고, 장인(匠人)이 되고 악공(樂工)이 되고 가동(歌童)이 되고 잠실(蠶室)의 고지기[庫直]가 된 자가 모두 43명이며, 조라치(照剌赤)가 되고 잠모(蠶母)가 되고 방자(房子)가 되고 수사(水賜)가 된 자가 모두 열 사람이고, 합하여 69명인데 모두 다른 데 예속되었습니다. 시정(侍丁)이 된 자가 또 여섯 사람이고, 종량(從良)된 자가 또 모두 일곱 사람이며, 도망하여 거지가 된 자가 또 모두 열 사람입니다. 지금 현역자(現役者)는 남종[奴]이 8, 9명뿐이며 여종[婢]이 10여 명에 지나지 아니하며 그 사(司)의 복역(服役)하는 일과 다른 곳에 진배(進排)하는 것은 그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다시 회복시킬 도리를 강구해 밝히지 아니하고서 다른 곳에 소속시키는 길을 예전대로 두면, 장흥고 한 사(司)는 장차 피폐하여 구제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관리 된 자가 어찌 손발을 댈 수 있겠습니까? 이 한 사를 보면 그 다른 여러 사(司)를 이로써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신 등은 무슨 계책을 베풀어서 그 폐단을 구제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의정부[廟堂]의 대신들과 더불어 조처할 방책을 강구해 밝혀서 선왕의 제도를 만세에 전하는 것이 가할 듯합니다.

신 등이 삼가 듣건대, 예전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소를 끌고 당(堂) 밑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 말하기를, ‘그만두어라. 내가 그 떨면서 죄없이 죽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하였는데,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이 마음이 왕도(王道)를 펴기에 충분합니다.’라고 하였으니, 대저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사랑하는 것은 진실로 제왕(帝王)의 도(道)입니다. 이제 우리 전하께서는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 널리 사랑하는 어지심을 미루어서 연어(鳶魚)073) 의 교화(敎化)가 중외(中外)에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한 물건이라도 어진 은혜를 입지 못할까 염려하시어 즉위하신 지 8년에 특별히 금장(禁章)을 세워서 마소를 도살하는 자는 양인(良人)·천인(賤人)을 물론하고 모두 장(杖) 1백 대를 때리고 절도(絶島) 여러 고을에 전가족을 정속(定屬)시키며, 허접(許接)074) 한 집이 있으면 관직(官職)이 있는 사람은 직첩을 거두고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며 관직이 없는 사람은 장(杖) 1백 대에 전가족을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서인(庶人)은 장 1백 대에 먼 변방에 충군(充軍)하였으니, 그 은혜와 사랑이 금수(禽獸)에 미친 것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어찌 제나라 선왕이 한 마리 소를 사랑한 것뿐이겠습니까? 그러나 근년 이래로 금망(禁網)이 성기고 넓어져서 소를 도살하는 자가 여염(閭閻) 사이에 두루 있으며, 혹은 다른 사람의 집을 빌어서 그 일을 행하는데 그 주인 된 자 역시 그 이로움을 탐하여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아니합니다. 이로써 짐승의 뼈가 쌓여서 거리를 메우고 골목에 가득하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대저 소민(小民)들의 이(利)를 구하는 마음이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므로, 만일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비록 물불이라도 밟고 시퍼런 칼날이라도 무릅쓰는데, 더구나 물불을 밟거나 칼날을 무릅쓰지 않아도 그 이익이 갑절이나 되는 것이겠습니까? 신 등은 그윽이 듣건대, 소의 물건됨이 살아서는 그 값이 적으나 도살됨에 미쳐서는 그 값을 취하는 외에 오히려 남는 이익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국가의 법이 소인(小人)의 이익을 탐하는 마음을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 정(鄭)나라 자산(子産)의 말에 이르기를, ‘대저 불은 뜨거우므로 사람이 바라보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는 자가 적고, 물은 부드럽고 약하므로 백성이 가볍게 여기고 희롱하기 때문에 빠져 죽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옛법을 거듭 밝혀서 그 죄를 징계하고 만일 남의 집을 빌려서 그 이익을 나누는 자가 있으면 또한 그 죄로 죄를 다스려서,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운 것을 알아서 피하게 하고 친압하여 가볍게 여기는데 이르지 아니하도록 하면,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사랑하는 데에 두 가지가 온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은 삼가 듣건대, 선민(先民)의 말에 이르기를, ‘불씨(佛氏)075) 의 피해는 양(楊) 묵(墨)076) 보다 심하다.’고 하였으니, 예로부터 현인 군자(賢人君子)는 깊이 막고 힘써 분변(分辨)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는 진실로 전하께서 통촉해 보시는 것인데, 어찌 신의 말을 기다리겠습니까? 우선 그 국가를 좀먹는 것을 들어서 그 만의 하나를 대략 진술하겠습니다. 국가에서 1년에 반승(飯僧)077) 하는 비용을 관찰하면, 개경사(開慶寺)는 소금이 53석 5두, 회암사(檜巖寺)는 소금이 60석, 진관사(津寬寺)·장의사(莊義寺)는 소금이 모두 20석, 정업사(淨業寺)·정인사(正因寺)는 소금이 모두 60석, 연경사(衍慶寺)·복천사(福泉寺)는 소금이 93석 5두, 숭효사(崇孝寺)·보은사(報恩寺)는 소금이 모두 50석, 각림사(覺林寺)·대자사(大慈寺)·용문사(龍門寺)는 소금이 모두 1백 20석, 내불당(內佛堂)은 소금 5석, 말장(末醬) 5석 5두, 쌀 31석 2두, 마포(麻布) 8필, 면포 10필, 봉선사(奉先寺)는 소금 1백 석, 말장 6석 5두, 황두(黃豆) 48석, 쌀 48석, 마포 10필, 면포 20필, 원각사(圓覺寺)는 소금 10석, 말장 6석 5두, 황두 48석, 마포 10필, 면포 20필, 연굴암(演窟菴)·복세암(福世菴)은 소금이 모두 10석 6두, 말장 5석, 쌀 27석 6두, 양종(兩宗)078) 은 소금이 모두 40석이고 선승(選僧)079) 하는 해는 쌀이 모두 30석, 황두가 30석이니, 1년의 소비가 적지 않은 데 이릅니다. 10년을 합하여 보면 소금이 총계 6천 2백 20석 10두, 말장이 2백 30석, 황두가 1천 2백 30석, 쌀이 1천 7백 4석, 마포 2백 80필, 면포 5백 필이며, 20년을 쌓으면 소금·쌀·말장·황두가 총계 1만 8천 7백 60석이 넘고 마포·면포가 1천 5백 60필인데 공불(供佛)하는 비용이 또 대단히 많습니다. 이로써 적(敵)을 방어하면 무슨 적인들 이기지 못하겠으며, 이로써 성(城)을 지키면 어느 성인들 튼튼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는 데 쓴다면 수십 만의 얼고 굶주린 백성을 살릴 수 있을 것이며, 오랑캐를 대접하는 데 쓴다면 수십 년간의 청구하는 비용에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서 쓸데없는 곳에다 버리는 것은 유독 어째서입니까? 또 조라치(照剌赤)가 저들을 복종하여 섬기는 것은, 이것이 또한 국가에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까? 만약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위해 명복(冥福)을 올리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신 등은 그윽이 의혹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화락(和樂)한 군자(君子)는 복을 구하되 올바르지 않음이 없도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효성으로써 제사하여 하늘에 계시는 신(神)에게 대할 뿐인데, 어찌 부처에게 귀의하여 그 복을 구하겠습니까? 더구나 임금의 한 몸은 사방(四方)과 만백성의 의표(儀表)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신 등은 진실로 전하께서 정일 집중(精一執中)080) 하는 학문으로써 즙희 경지(緝熙敬止)081) 의 공(功)을 더하사 불도(佛道)를 믿지 않는 마음이 깊다는 것은 압니다마는, 그러나 사방의 만백성이 국가에서 여러 사찰에 반승(飯僧)과 공불(供佛)하는 것이 저와 같고 복종하며 섬기는 사람을 준 것이 또 이와 같다는 것을 듣는다면, 국가에서 불도를 믿지 아니한다고 이르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그물을 가지고 강이나 바다에 들어가면서 말하기를, 「나는 고기잡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그물을 버려서 사람들이 스스로 그 말을 믿도록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그 의식비(衣食費)를 없애어 국용에 보태게 하고, 그 복종하며 섬기는 사람을 없애어 본사(本司)로 돌아오게 하여서 사방의 만백성으로 하여금 대성인(大聖人)의 하시는 바가 보통보다 만 배가 뛰어남을 알게 하면, 만백성의 의혹을 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저 조폐(凋弊)하여 일어나지 못하는 관사(官司)도 다시 되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이 그윽이 듣건대, 동자(董子)082) 가 말하기를,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서 조정을 바로잡고, 조정을 바로잡아서 백관을 바로잡으며, 백관을 바로잡아서 만백성을 바로잡고, 만백성을 바로잡아서 사방을 바로잡는데, 사방이 바르면 멀고 가까운 곳이 일체 바르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임금이 행해야 할 도(道)와 당장 지금 없앨 만한 폐단이 그 조목은 비록 열 네 조목이나 그 강령(綱領)은 마음을 바로잡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임금의 마음이 이미 바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간단(間斷)이 없으면 상벌(賞罰)의 공정함이 반드시 참람한 데 이르지 아니할 것이고, 정직한 말이 반드시 귀에 거슬리는 데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수성(守成)의 도(道)가 이에 극진할 것입니다. 이미 조정을 바로잡아서 백관이 바르게 되면 대신(大臣)이 맡은 바를 알아서 감히 자질구레한 일을 직접 하지 않을 것이며, 소신(小臣)은 두려워할 바를 알아서 감히 국법을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백관을 바로잡아서 만백성을 바로잡게 되면 시중(市中)의 간사하고 속이는 무리와 민간의 불량배가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고 교화 가운데에 감화될 것입니다. 이미 만백성을 바로잡아서 사방을 바로잡게 되면 멀고 가까운 곳이 일체 바르게 되지 아니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오도(吾道)083)진순(眞醇)084) 함과 이단(異端)085) 의 허무(虛無)함을 알아서, 학교가 일어날 수 있고 요사한 말이 그칠 수 있으며 지금 없애지 못한 폐단도 차례로 없앨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 등이 감히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여러 가지 조목의 강령(綱領)으로 삼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뢰니, 삼가 원하건대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소서."

하였다.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에 의논하도록 명하니, 한명회(韓明澮)는 의논하기를,

"신이 사간원(司諫院)의 상소를 보건대, 정심(正心)·수성(守成)을 말한 것과 상벌(賞罰)·상덕(常德)을 말한 것은 임금이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며, 그 나머지 조건(條件)은 모두 성립된 법이 있으니, 해당 관사로 하여금 거듭 밝혀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제 1·2·3·4·5조(條)는 성상의 생각으로 재결하실 것입니다. 제6조의 의정부 당상관이 제조(提調)와 순찰사(巡察使)가 되는 것은 조종조로부터 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예전대로 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제7조의 신속(新屬)된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는 것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엄금하게 해야 합니다. 제8조의 병조(兵曹)에서 제수(除授)할 때에 삼망(三望)을 갖추는 것은 이치에 마땅할 듯하니, 군사(軍士)의 체아직(遞兒職) 외에는 모두 삼망을 갖추게 하소서. 제9조의 당상관에게 사정(司正) 이하의 관직을 주지 말게 하는 것과 구사(丘史)를 정해 주는 일은 상호군(上護軍)·대호군(大護軍)·사직(司直)의 체아직은 정해진 수(數)가 있고, 당상관으로서 행직(行職)086) 을 줄 사람은 인원이 많으며, 또 구사는 나올 곳이 없어서 정해 주기가 어려우니, 모두 행할 수 없습니다. 제10조의 생원(生員)·진사(進士)로서 스승이 될 만한 자에게 훈도(訓導)를 제수하는 것은 시행할 만하나, 향교 생도 가운데에는 간혹 군사(軍士)·아전(衙前) 등 잡류(雜類)의 자손으로 나이가 40, 50에 이르러서 군역(軍役)을 피하려고 꾀하여 모람되게 유적(儒籍)에 이름을 넣은 자가 자못 많이 있는데, 장년으로서 쓸데없는 자를 가려 세공(歲貢)으로 채우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제11조의 여러 관사 노비를 다른 사(司)의 사역(使役)으로 정하지 않는 것은 가장 좋은 법입니다. 그러나 별감(別監)·각 색장(色掌)·수장(守藏)·조라치(照剌赤)·시녀(侍女)·잠모(蠶母) 등의 사역은 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긴요하지 아니한 것은 골라서 본사(本司)로 돌려 역(役)을 정하여서 쇠잔함을 구제하도록 하소서. 제12조의 마소를 도살하는 것은 법을 거듭 밝혀서 엄금하게 하소서. 제13조의 1년에 드는 반승(飯僧)의 비용은, 개경사·정인사·봉선사·진관사·장의사 등의 절은 선왕(先王)·선후(先后)를 위한 것이므로 폐할 수 없을 듯하며, 그 나머지 사사(寺社)의 쌀·콩·소금·장·마포·면포·조라치 등을 줄이거나 없애는 일은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으며, 윤필상은 의논하기를,

"이제 사간원의 상소를 보건대 13조 안에 성상께서 진실로 마땅히 마음을 가라앉혀 생각하실 일이 있고, 또 법을 거듭 밝혀서 엄금할 일도 있으며, 또 해당 조(曹)로 하여금 적당한가 적당하지 아니한가를 계달(啓達)하게 하여 시행할 일도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량하여 하소서."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그 정심(正心)이니 수성(守成)이니 상벌(賞罰)이니 상덕(常德)이니 하는 네 조목은 비록 옛사람이 임금에게 아뢰어 경계하는 상용(商用)의 말이라 하더라도 임금이 마땅히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고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유념하도록 하소서. 그 나머지 조건(條件)은 혹은 형세가 행할 수 없고 혹은 법에 벗어나는 간사함이 생겨서 비록 그 사이에 작은 폐단이 있더라도 율법(律法)이 모두 있는데 다만 거행하는 것이 해이해졌을 뿐이니, 옛법을 거듭 밝히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으며,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축성(築城)과 군적(軍籍)은 모두 중대한 일인데 중신(重臣)들에게 맡기는 것이 무슨 옳지 못한 것이 있겠습니까? 어찌 반드시 의정부[廟堂]에 나와 앉은 뒤에라야만 음양(陰陽)을 다스리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기를, 대체에 무방하다고 여깁니다. 면포·축거(杻炬)·종이에 대한 것과 신속(新屬) 관원을 침학(侵虐)하는 등의 일은 모두 금령(禁令)이 있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다스리게 할 뿐이며, 그 나머지 조건은 모두 법령에 있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개경사(開慶寺) 등 여러 절은 모두 선왕(先王)을 위해 창건한 것이므로, 만약 이단(異端)으로 논해 없앨 수 없다면 사는 중의 식염(食鹽)은 예전대로 주는 것이 어찌 방해가 되겠습니까? 다만 조라치(照剌赤)는 없애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주공(周公)낙읍(洛邑)087) 을 맡아 영선(營繕)하였으니, 국가의 중대한 일은 비록 삼공(三公)에게 맡기더라도 부득이한 것입니다. 만약 작은 일이라면 맡길 필요가 없습니다. 시사(市肆)에서 속이는 자와 신속 관원(新屬官員)을 침학하는 자는 죄를 다스리는 법이 《대전》에 실려 있으니, 다시 새로운 법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근래에 신속 관원을 침학하는 것이 더욱 심하니, 해당 관사로 하여금 《대전》에 의하여 엄금하게 하소서. 서반직(西班職)을 정사(政事) 때마다 올리고 낮추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세 사람을 의망(擬望)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형편이 어려울 듯합니다. 서반 당상관의 수가 적지 아니한데 모두 구사(丘史)를 주는 것도 형편상 하기 어려운 바이며, 사정(司正) 이하의 낮은 직질(職秩)에 제수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공 생도(歲貢生徒)는 모두 나이가 장년이고 재주가 소략(疎略)한 자를 골라서 보내고 조금이라도 문예(文藝)가 있고 나이가 젊으며 장래가 있는 자는 반드시 세공의 수(數)에 두지 아니할 것이므로 학문에 뜻을 두는 자는 반드시 이러한 까닭으로써 향학(向學)하는 마음을 저해하지 아니할 것이니 다시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훈도(訓導)를 모두 진사(進士)·생원(生員)으로 임명하는 것도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관사의 노비(奴婢)는 많고 적은 것이 같지 아니한데, 만약 노비 수가 적은 여러 관사에 조라치(照剌赤) 등의 차비(差備)를 많이 정하면 그 사(司)에 공역(供役)할 노비가 없어서 장차 지탱하기 어려울 듯하니, 해당 관사로 하여금 참작하여서 정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소와 말을 도살하는 자가 근래에 그치지 아니하나 법을 고치는 것은 형세가 어려우니, 해당 관사로 하여금 법에 의하여 엄금하도록 하소서. 개경사 등의 절에 해마다 주는 소금·쌀 등의 물건은 그 수량이 너무 많으니, 양을 줄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마음을 바로잡는 등의 말은 전하께서 마땅히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거행하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아니한가를 각각 해당 관사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19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17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행정(行政) / 상업(商業) / 사법-법제(法制) / 풍속-연회(宴會) /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사(人事) / 신분-천인(賤人)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재정-역(役) / 농업(農業) / 사상-불교(佛敎)

  • [註 051]
    긍긍 업업(兢兢業業) : 조심하고 삼가하는 모양.
  • [註 052]
    율율 익익(慄慄翼翼) :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모양.
  • [註 053]
    옹희 태화(雍熙泰和) : 나라가 화평함.
  • [註 054]
    태갑(太甲) : 은(殷)나라 임금.
  • [註 055]
    위징(魏徵) : 당나라 태종 때 명신.
  • [註 056]
    건상(乾象) : 하늘의 형상.
  • [註 057]
    천공(天工) : 하늘이 백성을 다스리는 일.
  • [註 058]
    육기(六氣) : 하늘과 땅 사이의 여섯 가지 기운. 곧 음(陰)·양(陽)·풍(風)·우(雨)·회(晦)·명(明)임.
  • [註 059]
    요와(澆訛) : 도덕의 퇴폐로 인정이 박해지고 거짓이 많음.
  • [註 060]
    축거(杻炬) : 싸리나무를 묶어서 만든 홰.
  • [註 061]
    신속(新屬) : 새로 관직에 들어온 사람.
  • [註 062]
    허참연(許參宴) : 새로 출사(出仕)하는 벼슬아치가 전부터 있던 벼슬아치에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인사드리는 연회. 이로부터 서로 상종(相從)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신관원(新官員)의 오만(傲慢)을 없앤다는 풍습이며, 다시 10여 일 뒤에 면신례(免新禮)를 행하여야 비로소 구관원과 동석(同席)할 수 있음.
  • [註 063]
    선생(先生) : 전임관(前任官).
  • [註 064]
    투자(投刺) : 처음으로 윗사람을 뵈올 때에 명함(名銜)을 전하여 드리던 일.
  • [註 065]
    자지(刺紙) : 명함 종이.
  • [註 066]
    연곡하(輦轂下) : 임금이 타는 수레의 밑이란 뜻으로, 서울을 말함.
  • [註 067]
    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에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 [註 068]
    세공(歲貢) : 조선조 때 서리(書吏)의 보임(補任)을 위하여 각 고을에서 3년마다 중앙에 올려 보내던 공생(貢生:교생(校生)). 세공 생도(歲貢生徒).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세공 생도는 도호부(都護府) 이상은 2인, 군(郡) 이하는 1인으로 하되, 교생(校生)이 없으면 역(役)이 없는 평민으로 보충한다고 하였음.
  • [註 069]
    도필리(刀筆吏) : 하급 관리인 아전(衙前)을 얕잡아 이르는 말.
  • [註 070]
    인보(人保) : 조선조 때 정병(正兵)을 돕기 위하여 두었던 조정(助丁). 즉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에 현역병의 농작에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하였음.
  • [註 071]
    한자(韓子) : 한유(韓愈).
  • [註 072]
    유학(幼學) :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儒生).
  • [註 073]
    연어(鳶魚) : 군자(君子)의 덕(德)이 위아래로 널리 미침.
  • [註 074]
    허접(許接) : 도피중의 사람을 자기 집에 붙이어 숨도록 하는 것.
  • [註 075]
    불씨(佛氏) : 불교.
  • [註 076]
    양(楊)묵(墨) : 양주(楊朱)·묵적(墨翟)의 사상.
  • [註 077]
    반승(飯僧) : 중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
  • [註 078]
    양종(兩宗) : 선종(禪宗)·교종(敎宗).
  • [註 079]
    선승(選僧) : 중을 선발하는 것.
  • [註 080]
    정일 집중(精一執中)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편의 ‘유정유일 윤집궐중(惟精惟一允執厥中)’의 준말로, 오로지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중용(中庸)의 도(道)를 지킨다는 것임.
  • [註 081]
    즙희 경지(緝熙敬止) :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의 "穆穆文王 於緝熙敬止"를 인용한 것으로, 심원(深遠)한 문왕의 덕(德)으로도 경(敬)을 계속하여 밝히었다는 것임.
  • [註 082]
    동자(董子) : 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
  • [註 083]
    오도(吾道) : 유교를 가리킴.
  • [註 084]
    진순(眞醇) : 참되고 순수함.
  • [註 085]
    이단(異端) : 정도(正道)에 위배되는 것을 통틀어 이름.
  • [註 086]
    행직(行職) : 품계보다 낮은 직급(職級).
  • [註 087]
    낙읍(洛邑) : 주(周)나라 서울.

○司諫院大司諫金首孫等上疏曰:

臣等謹採帝王可行之道、國家可祛之弊, 條陳于左。 臣等謹按經曰: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古之帝王, 莫不以正心爲先焉。 之兢兢業文之慄慄翼翼, 皆正此心者也。 心苟不正而眩於是非, 則諛侫是甘而讜論不入於耳矣。 心苟不正而昧於用舍, 則小人在位而君子不立於朝矣, 用法或至於低昻, 用刑或失其輕重矣, 豈不深可畏也哉? 伏願殿下以古聖爲法而正其心焉, 則三代之治, 可復見於今日矣。 臣等聞古人有言曰: "成立之難如升天, 覆墜之易如燎毛。" 甚言創業之至難而守成之爲尤難也。 何者? 當持盈守成之時, 國旣治矣, 民旣安矣; 有先王所立之憲章, 足以設施, 可高拱而無爲也; 有四方所入之財賦, 足以供給,可娛遊而自肆也, 君心於是乎驕且逸矣。 故好征伐、甘遊畋、興土木之役、慕神仙之術者, 多出於繼世之君, 而國家之事非矣。 古人以 ‘無疆惟恤’ 進戒其君者, 正爲此也。 臣等聞古之善守成者, , 。 殿下如欲法也, 則當思夫囹圄之空虛者, 何以致然也; 法也, 則當思夫大倉之粟所以紅腐者, 何以致然也? 凡所以保艱大之業者, 無不盡心焉, 則守成之道, 固無讓於數君矣。 臣等謹按前代帝王, 莫不以從諫而興、拒諫而亡, 稽諸史策, 班班可見。 《書》之德曰 "舍己從人", 稱之德曰 "從諫弗咈, 改過不吝。" , 大聖人也, 亦大聖人也, 其不曰無過, 而曰改過者, 蓋雖聖人不能無過, 而聞過必改者, 乃聖人之所能也。 《史記》稱: "爲天子, 智足以拒諫, 言足以飾非。" 非無才智者也, 然身滅國亡, 而天下之惡皆歸焉, 以其愎諫而自用也。 夫忠良正直之言, 初若逆耳而可惡也, 其意要在愛君而憂國也; 諂侫阿諛之言, 始若順意而可喜也, 其情不過爲媚上徼寵之計耳。 伏願殿下以爲戒, 以爲法焉, 其雍熙泰和之治, 不獨專美於前矣。 臣等謹按賞罰, 人主之大柄, 非至公之道, 不可以行之也。 蓋賞者所以旌有功也, 一出於私, 則爲善者無所勸矣; 罰者所以討有罪也, 一出於私, 則爲惡者無所懲矣。 是故有功者雖在仇讎, 賞必及焉; 有罪者雖在貴近, 罰必行焉。 故賞以侔春夏, 罰以象秋冬, 言法天而無私也。 高宗之不僭不濫, 成王之畢協賞罰者, 咸用此道也。 伏願殿下以高宗成王爲法, 而用賞行罰之際, 一以至公處之, 則斯亦帝王之擧也。 臣等謹按《書》曰: "常厥德, 保厥位。" 又曰: "德二三, 動罔不凶。" 人君之德貴於有常, 而不可二三之也。 請以一二事言之。 蓋恭敬勤儉, 此人君之德當然也; 進賢退不肖, 此人君之德當然也。 然厥德靡常而或至於二三焉, 則向所謂恭敬者有時而或怠, 向所謂勤儉者有時而廢弛, 賢者或有時而退, 不肖者或有時而進矣。 必如成湯之日新又新、文王之純亦不已, 然後始可謂之常德矣。 是故終始惟一, 伊尹告于太甲; 漸不克終, 魏徵戒于太宗, 靡不有初, 鮮克有終者, 此自古人君之通患。 伏願殿下以伊尹魏徵之言爲戒。 知放鷹犬、節遊畋, 乃勵精於初政也, 則必思夫愼終如始焉; 無一事之不然, 無一時之或間焉, 則之治, 豈特庶幾哉? 臣等謹按成王之董正治官也, 以冢宰掌邦治, 司徒掌邦敎, 邦禮、邦政則宗伯、司馬主之, 邦禁邦土則司寇、司空主之。 至於三公則曰, "論道經邦, 燮理陰陽。" 夫經綸之用, 藏於無迹, 燮理之妙, 間不容聲, 似若無事於事, 而未見其設施之迹也。 然成王所以重其任, 而不與六卿之分職者, 同其任焉, 何也? 蓋三公, 上符乾象, 下代天工, 人主所與共天位, 治天職者也。

故居是位者, 百責所萃: 震撼擊撞, 欲其鎭定; 辛甘燥濕, 欲其調劑, 兆民未安, 何以集之? 四夷未附, 何以來之? 六氣不調, 則思所以和之; 百職不擧, 則思所以修之。 國家之安危、生民之休慼, 無不關焉, 則其爲任重且大矣, 豈宜委之一事而責其成功, 如有司之各掌其務乎? 是故 文帝陳平爲右丞相, 問一歲決獄錢穀之數, 曰: "有主者。" 帝曰: "卿所主者何事?" 曰: "宰相上佐天子、理陰陽、順四時, 下遂萬物之宜, 內親附百姓, 外鎭撫四夷, 使卿大夫各得任其職焉。" 帝乃稱善。 德宗李泌爲門下侍郞同平章事, 謂曰: "自今凡軍旅糧儲事, 卿主之。" 曰: "不可。 宰相之職, 天下之事咸共平章。 若有所主, 是乃有司, 非宰相也。" 帝曰: "朕適失辭,卿言是也。" 彼君臣, 猶知所以處宰相之道, 況今薄而不居者乎? 臣等伏覩今之議政, 旣之三公、之丞相、之門下侍郞同平章事也。 然則今之待議政, 其如古之待宰相乎? 臣等竊觀國家以議政兼領一司之事, 名曰提調, 固已誤矣。 今以築城一事, 委左議政洪應, 以軍籍一事, 委右議政李克培焉, 是國家以有司待三公, 不以三公之道責三公也, 豈不有乖於前代乎? 若曰築城重事也, 軍籍大事也, 不得不委之大臣焉, 則臣等竊惑焉。 築城、軍籍, 雖曰事之重且大也, 特一有司耳, 豈必待贊化調元之手而後可也? 伏願殿下以成王之待三公責三公, 而不以一事委任焉, 可也。 若殿下以成王爲法, 而今之爲三公者, 反不如宰相之知所任也, 則覆餗伴食之誚起矣, 將焉用彼相哉? 臣謹按《易》曰: "日中而市, 交易而退。" 《孟子》曰: "古之爲市者, 以其所有, 易其所無者, 有司治之耳。" 蓋市肆之設, 其來尙矣, 糾察奸僞之法, 非獨今時然也。 然臣等伏聞今日市肆之中, 巧詐成風, 澆訛之習, 日滋月長, 姑擧一二言之, 夫滿三十五尺者, 爲緜布一匹之長, 而今者以三十餘尺爲一匹, 甚者聚三四端連作一匹,眩於廣集之中, 而取其利焉。 紙者所以造文券而經久遠者也, 其用廣矣。 今之號爲常紙者, 其長不滿一尺, 其廣不過五六寸, 而其薄亦稱是焉。 杻炬者所以備宵行也, 古者以物百枚束而爲之, 今以杻木飾其面而空其中, 以(蒿)〔藁〕 草支其內而束其外, 反不如一股之大矣。 物皆然, 惟此三者爲尤甚焉。 此雖細事, 亦可以觀世變矣, 何不思所以更張之乎?

〔○〕 臣等謹按《大典》禁制條曰: "新屬侵虐者杖六十。" 國制非不嚴也, 然今也不畏邦憲而多方以侵責者, 滔滔皆是。 姑以承文院一司言之, 某也新除正字, 則必徵供饋之物, 名曰 ‘徵求’,乃自三起數。 如淸酒三甁則某魚三尾, 某肉三頭, 某菓某菜三盤, 凡百可口者無不稱是。 一有不備, 則譴責隨之。 如是者必過五度而後, 方更以五起數, 如向所云也。 如是者必過三度而後, 方更以七起數, 以至九數而後已。 以一徵求之物,可以辦一大宴, 其費旣已多矣。 又有 ‘許參宴’ 焉, ‘免新宴’焉者, 皆大辦也。 自非膏梁子弟, 雖傾資破産, 難以應無窮之費, 必假貸於人而後企及之耳。 非獨承文院爲然。 彼成均館也, 校書館也, 藝文館也, 莫不皆然。 而藝文館乃四館中之尤甚者也。 其徵求視承文猶倍蓰也, 其免新、許參視承文猶倍蓰也。 又有 ‘中日宴’ 焉, 此他官所無, 而藝文館之所獨也, 其費又萬萬矣。 然此四館猶有糾察之官也, 彼監察者,身爲法官而自放於禮法之外, 誰得而糾之哉? 臣等聞爲監察新來者, 自除職抵免新也, 其間雖過數十日, 必日盛設饌, 以候先生舊住焉。 爲先生舊住者, 更出迭入式宴以遨者, 殆無虛日, 而免新宴則不在此數也。 且日投刺於舊住之第, 其爲日不爲少矣, 其爲舊住者不爲不多, 而其刺紙非厚且廣大者不可, 而率以綿布一匹, 纔易三張矣, 其刺紙之費又不可勝言矣。 不特監察爲然。 彼錄事也, 內禁衛也, 凡成衆之官,爭相效尤, 以侵責新來者萬端矣。 其侵責如是也, 故有救爲錄事而不可得者, 有求爲內禁衛而不可得者, 以其貧窮而難支也。 彼皆曰: "匪今斯今, 振古如玆, 古風不可廢也。" 臣等亦知其所從來者遠矣, 然其弊未有甚於此時者也。 況監察, 糾百司之官也; 藝文館, 朝夕侍從之臣也。 猶且視邦憲爲何物, 而輦轂之下, 法亦不行, 臣等竊謂此風不可不革也。臣等謹按《書》曰: "惟辟作福, 惟辟作威。" 又曰: "臣之有作福作威, 其害于而家, 凶于而國。" 甚言威福之權, 不可下移於臣也。 今銓曹則注擬人物也, 必備三望者, 蓋政柄人主之大權, 非臣子所得而自專者也。 彼軍職之除授也則不然, 自上護軍以下, 必以一人擬望焉, 是非殿下爵人也, 爵人者乃銓曹也。 縱使銓曹用人之公也, 如權衡之稱物也, 猶不可自占于下也, 一有私意容於其間, 則陞降之權, 在其掌握, 政柄潛移于下矣, 豈合人君作福之道乎? 若曰: "行之已久, 今不可卒變也。" 則是大不然。 如知其非義, 則斯速已矣, 豈可以行之已久而踵而行之耶? 況是法也, 必一時擅權之臣, 取稟於上, 以爲冒弄之術也, 豈可爲經遠之法乎? 臣等伏願自今以往, 其擬望也, 必備三人, 永絶冒濫之弊可也。 臣等伏覩東班六品以上者, 若因事見罷, 則及其復敍也, 不授之七品以下之職而又授之六品以上之職, 其故何也? 蓋自六品以上, 謂之參職, 七品以下, 謂之參外。 自六品七品觀之, 其等級不相甚遠也; 以參上參外觀之, 則其間可謂峻絶矣。 其不授七品以下之職, 而必除六品以上之官者, 豈非以此耶? 彼西班則本是陞降之職也, 固不可援此例論也。 然自堂上官以下, 授司正、司猛、司勇者有之矣。 夫堂上, 三品以上之職也, 位之尊者也; 司正、司猛、司勇, 七八九品之職也, 位之卑者也。 彼曾經參上官者, 猶不失參外職也, 況以曾經堂上, 必下授參外之職, 可乎? 國家之待堂上也, 可謂隆矣, 而今其授職, 反不如曾經參上之官。 且參朝廷大小之會者, 與東西班無異也, 而又無一介驅口以帶行焉, 無乃聖慮之所未及耶? 伏願自今以往, 依東西班參上例, 勿授司正以下之職, 竝給根隨,永爲恒式焉, 則其於國家之待堂上也, 恐或得其道也。 臣等謹按《記》曰: "化民成俗, 其必由學乎!" 學之有益於人國家也, 大矣哉! 故歷代帝王, 莫不以興學校、養人材爲先務焉。 我國家, 內則設成均四學焉, 外則於州府郡縣各設鄕校, 以敎養焉, 其於興學, 可謂至矣。 然臣等聞今之爲鄕校生徒者, 率皆頑鈍無恥之人, 其以誦詩讀書爲己業者蓋寡。 其故何也? 國家令州府郡縣校生年壯才踈者, 以充歲貢之數, 遂使靑衿之子, 反爲刀筆之吏。 此法一立, 而儒者向道之心沮矣, 乃相與謀曰: "今日我爲校生, 則明日必爲刀筆吏如某也。 寧爲人保, 不願爲鄕校生徒也; 寧習他技, 不願爲鄕校生徒也。" 由是衣冠子弟, 恥之而藏踪, 孤寒無勢者, 畏之而秘跡焉。 如此而欲望學校之興, 猶欲其入而閉之門也, 尙何作成人材之可望乎? 臣等且聞韓子曰: "師者, 所以傳道、受業、解惑者也。" 又曰: "童子之師, 授之書而習其口讀者也。" 今之爲敎授、訓導者, 率多幼學之人, 口讀尙不知, 況望傳道、解惑乎? 孟子所謂: "以其昏昏, 使人昭昭者。" 正謂此輩也。 彼生員、進士, 雖未得爲眞儒, 猶能業儒之業, 而中國家之選者也。

伏願自今以往, 勿令校生充歲貢之數, 而擇生員、進士與夫會講中格者之可爲師表者, 以任敎養之責可也。 臣等伏覩我祖宗之創業垂統也, 慮萬事之或廢也, 故旣設百司以委任之; 爲使令之不足於前也, 故又設奴婢以服役之, 大哉。 先王之制也! 當時行之而無患, 後世遵之而無弊, 其爲子孫萬世計者, 可謂周矣。 然其在今也, 有凋敝而不振者多矣。 其故何歟? 於此有一司焉, 其奴婢總百口, 則可謂多矣。 然其一人屬於別監, 則他日呼朋引類, 去此而就彼者若干人也; 其一人屬於各色掌, 則他日呼朋引類, 去此而就彼者若干人也。 某也爲守僕, 則亦若是; 某也爲守藏, 則亦若是也。 其餘存者, 有幾人哉? 昔之盛者今若是, 則昔之衰者今如何哉? 其所以日就彫殘者, 良有以也。 臣等請以長興庫一司明之。 是司也, 有奴婢一百一十五口, 則奴婢之多, 莫盛於斯也。 然爲守僕者二人焉, 爲各色掌者三人焉, 爲別監者五人焉, 爲丘史、爲功臣奴者總六人也, 爲匠人、爲樂工、爲歌童、爲蠶室庫直摠四十三人, 爲照剌赤、爲蠶母、爲房子、爲水賜者總一十人也, 合六十九人, 皆隷於他。 而爲侍丁者, 又凡六人也, 爲從良者, 又凡七人也, 爲逃亡丐乞者, 又凡一十人也。 今其見役者, 奴止八九, 婢不過一十餘口, 而其司服役之事、他處進排之所, 不知其幾也。 若不講明復蘇之道, 而屬他之路猶古也, 則長興一司, 將至於弊不救矣, 爲官吏者安得措其手足哉? 以一司觀之, 則其他百司可以類推。 臣等未知施何策以救其弊也? 伏願殿下與廟堂大臣, 講明所以處置之方, 俾先王之制, 傳之萬世焉可也。 臣等伏聞昔齊宣王見牽牛而過堂下者, 曰: "舍之。 吾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也。" 孟子曰: "是心足以王矣。" 蓋仁民而愛物, 固帝王之道也。 今我殿下以好生之德, 推博愛之仁, 鳶魚之化, 洋中溢外, 猶慮一物之不被吾仁也。 在卽位之八年, 特立禁章, 使宰殺牛馬者, 勿論良賤, 皆杖一百、於絶島諸邑全家定屬, 其有許接之家, 有職人則收職牒, 永不敍用, 無職人則杖一百, 外方付處, 庶人則杖一百, 邊遠充軍。 其仁恩之及禽獸也, 可謂至矣, 豈特宣王之愛一牛哉? 然近年以來, 禁網踈闊, 屠牛者遍處閭閻之間, 或假寓他人之家, 以行其事, 爲其主者, 亦利其利而不畏忌焉。 以之積骸累骨, 塡街滿巷, 其故何也? 蓋小民求利之心, 無所不至矣, 苟利之所在, 則雖水火蹈焉, 白刃冒焉, 況不待蹈水火、冒白刃而其利自倍者乎? 臣等竊聞牛之爲物也, 當其生也, 其直輕焉, 及其見殺也, 其取直之外, 尙有餘利焉。 然則今日國家之法, 其能止小人冒利之心乎? 昔鄭子産有言曰: "夫火烈, 人望而畏之, 故鮮死焉; 水柔弱, 民狎而玩之, 故多死焉。 伏願殿下申明舊章, 以懲其罪。 如有借人以第而分其利者, 則亦以罪罪之, 使小民知所畏而避之, 不至於狎而玩之, 則其於仁民而愛物也, 可以兩全矣。

臣等伏聞先民有言曰: "佛氏之害, 甚於。" 自古賢人君子所以深拒而力辨之者, 多矣。 此固殿下之所洞覽者也, 奚待臣言哉? 姑擧其耗蠹國家者, 粗陳其萬一焉。 以國家一歲飯僧之費觀之, 開慶寺則鹽五十三碩五斗, (檜岸寺)〔檜巖寺〕 則鹽六十碩, 津寬莊義寺則鹽共二十碩, 淨業正因寺則鹽共六十碩, 衍慶福泉寺則鹽九十三碩五斗, 崇孝報恩寺則鹽共五十碩, 覺林大慈龍門寺則鹽共一百二十碩, 內佛堂則鹽五碩、末醬五碩五斗, 米三十一碩二斗、麻布八匹、綿布一十匹, 奉先寺則鹽一百碩、末醬六碩五斗、黃豆四十八碩、米四十八碩、麻布一十匹、緜布二十匹,圓覺寺則鹽一十碩、末醬六碩五斗、黃豆四十八碩、麻布一十匹、綿布二十匹, 演窟福世菴則鹽共一十碩六斗、末醬五碩、米二十七碩六斗, 兩宗則鹽共四十碩, 其選僧之年則米共三十碩、黃豆三十碩, 一年之費, 至不小矣。 合一十年觀之, 則鹽摠六千二百二十碩一十斗, 末醬二百三十碩, 黃豆一千二百三十碩, 米一千七百四碩, 麻布二百八十匹, 綿布五百匹。 積至二十年, 則鹽、米、末醬、黃豆總一萬八千七百六十碩有奇, 麻布、綿布一千五百六十匹。 而其供佛之費, 且萬萬矣。 以此禦敵, 則何敵不克? 以此守城, 則何城不堅? 用之於賑窮, 則數十萬凍餒之民, 可以活焉; 用之於待夷, 則數十年求請之費, 可以應焉。 今乃浚民膏血, 而(乘)〔棄〕 之於無用之地, 獨何耶? 且照剌赤之服事于彼者, 此又國家所不得已之事乎? 若曰爲先王先后薦冥福也, 不得不爾, 則臣等竊惑焉。 《詩》云: "愷悌君子, 求福不回。" 固當以孝以享, 以對越在天之神而已, 豈可歸依於佛以徼其福乎? 況人主一身, 爲四方萬民之所儀表者乎? 臣等固知殿下以精一執中之學, 加緝熙敬止之功, 其不信佛道也深矣。 然四方萬民, 聞國家之於諸刹也, 其所以飯僧供佛者旣如彼, 其所以給服事之人者又如此, 則其謂國家不信佛氏之道乎? 古人有言曰: "操網罟而入江海, 語人曰我非漁也, 不若捐網罟而人自信也。" 伏願殿下除其衣食之費, 以資國用, 革其服事之人, 以還本司, 使四方之衆, 知大聖人之作爲, 出於尋常萬萬也, 則非徒解萬民之惑也, 彼凋弊不振之司, 亦可蘇復矣。 臣等竊聞, 董子曰: "人君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正萬民以正四方, 四方正而遠近莫不一於正。" 由是觀之, 帝王可行之道、當今可祛之弊, 其目雖十有四條, 而其綱不越乎正心而已。 何者? 君心旣正而終始無間焉, 則賞罰之公, 必不至於僭濫, 正直之言, 必不至於逆耳, 而守成之道於是而盡矣。 旣正朝廷以正百官, 則大臣知所任而不敢親細事矣, 小臣知所畏而不敢干邦憲矣。 旣正百官以正萬民, 則市中奸僞之徒、閭閻不逞之輩, 不敢自肆, 而薰陶於敎化之中矣。 旣正萬民, 以正四方而遠近莫不一於正, 則必知吾道之眞醇、異端之虛無, 而學校可以興, 邪說可以息矣。 而當今未祛之弊, 亦可次第而祛矣。 故臣等敢以正心爲萬目之綱, 而終始獻焉。 伏願殿下潛心焉。

命議于領敦寧以上及議政府。 韓明澮議: "臣觀司諫院上疏, 曰正心、守成, 曰賞罰、常德, 人主所潛心; 其餘條件, 皆有成法, 令該司申明擧行何如?" 沈澮議: "第一二三四五條, 聖慮裁之。 第六條議政府堂上官爲提調、巡察, 自祖宗朝行之已久, 仍舊無妨。 第七條新屬人設宴, 令該司痛禁; 第八條兵曹除授備三望, 於理爲當, 其軍士遞兒職外, 皆備三望。 第九條堂上官, 勿授司正以下職, 定給丘史事, 上大護軍、司直遞兒有數, 而以堂上官授行職者員多, 且丘史無出處, 定給亦難, 皆不可行。 第十條以生員進士, 可爲師表者授訓導, 可行也。 鄕校生徒, 則或有軍士衙前等雜類子孫, 年至四十五十而謀避軍役, 冒名儒籍者頗多。 擇年壯無用者充歲貢, 不亦宜乎? 第十一條諸司奴婢勿定他司役使, 最爲良法。 然別監、各色掌、守藏、照剌赤、侍女、蠶母等役使, 不可廢也, 但不緊者揀擇, 還定本司, 以救凋殘。 第十二條宰殺牛馬者, 申明痛禁。 第十三條一歲飯僧之費, 開慶正因奉先津寬藏義等寺則爲先王先后, 似不可廢也。 其餘寺社米、豆、鹽、醬、麻布、緜布、照剌赤等減除事, 擧行何如?" 尹弼商議: "今觀諫院上疏, 十三條內, 有聖上允宜潛心之事, 亦有申明痛禁之事, 抑有令該曹商度便否, 啓達施行之事, 伏惟上裁。" 盧思愼議: "其曰正心, 其曰守成, 其曰賞罰, 其曰常德, 此四條, 雖古人陳戒人君之常說, 帝王所當潛心服膺, 伏惟留意。 其餘條件, 或勢不可行, 或奸生法外, 雖間有小弊, 律法皆在, 但擧行陵夷耳。 不如申明舊法。" 尹壕議: "築城、軍籍皆重事也, 委諸重臣, 何不可之有? 何必坐廟堂然後, 燮理陰陽乎? 臣以爲無妨大體。 若綿布、杻炬、紙地、新屬侵虐等事, 皆有禁令, 有司治之而已, 其餘條件, 皆載在令甲, 不必更議。 然開慶等諸寺, 皆爲先王創建, 若不得論以異端革焉, 則居僧食鹽, 仍舊何妨? 但照剌赤則革除何如?" 李崇元議: "周公掌營洛邑, 則國家重事, 雖使三公任之, 在所不得已也, 若細事則不必任之。 市肆詐僞者、新屬人侵虐者, 治罪載在《大典》, 不必更立新法。 但邇來新屬人, 侵虐尤甚, 令該司依《大典》嚴禁。 西班職每政陞降, 必擬望三人, 恐亦勢難。 西班堂上官之數不少, 皆給丘史, 勢所難爲; 除司正以下秩卑職, 亦所不得已也。 歲貢生徒, 皆以年壯才踈者擇送, 其少有文藝者、年少有將來者, 必不在歲貢之數, 有志於學者, 必不以此沮向學之志矣, 不須更改。 訓導皆以進士生員差除, 亦所難行。 諸司奴婢多小不同, 若奴婢數少諸司, 多定照剌赤等差備, 則其司無供役奴婢, 恐將難支, 今該司斟酌定送。 宰殺牛馬者, 近來不戢,然更法則勢難, 令該司依法嚴禁。 開慶等寺歲給鹽米等物, 其數太多, 量減何如? 若正心等語, 殿下所當留意。" 傳曰: "擧行便否, 各令該司議啓。"


  • 【태백산사고본】 30책 19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17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행정(行政) / 상업(商業) / 사법-법제(法制) / 풍속-연회(宴會) /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사(人事) / 신분-천인(賤人)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재정-역(役) / 농업(農業)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