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손 등이 영안남도 절도사를 혁파할 것 등에 관해서 의논하다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등을 명소(命召)하여 전교(傳敎)하기를,
"성준(成俊)이 영안남도 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를 혁파(革罷)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영문(營門)을 갑산(甲山)이나 혜산(惠山)으로 옮기고, 또 영아전(營衙前)을 다 줄이고서 수십 인만을 남겨 두고, 또 가족을 데려가지 말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편부(便否)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의논하기를,
"남도 절도사는 혁파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이 전일에 이미 친히 아뢰었습니다."
하고, 심회(沈澮)가 의논하기를,
"남도 절도사는 쉽사리 혁파할 수 없겠습니다. 그 나머지 성준이 계청(啓請)한 것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고, 윤필상(尹弼商)이 의논하기를,
"남도 절도사를 한구석에 치우치게 설치하는 것이 어찌 세조(世祖)의 본의이겠습니까? 혜산 같은 곳으로 옮겨 설치할 수 없겠습니다. 나머지는 성준이 아뢴 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홍응(洪應)이 의논하기를,
"세조께서 남도 절도사를 두어 북도와 함께 앞뒤에서 서로 구원하게 하셨으니, 그 헤아리신 바가 윈대하였으므로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역로(驛路)의 폐단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건의한 자의 말에 따라 갑산 같은 곳으로 본영(本營)을 옮겨서 그 폐단을 더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극배(李克培)가 의논하기를,
"세조께서 정해년596) 의 난(亂)에 징계되어 드디어 남도 절도사를 두어 남북의 권세를 나누셨으니, 성려(聖慮)가 매우 원대하셨습니다. 이제 한때의 폐단 때문에 쉽사리 혁파할 수는 없으며, 절도사가 마땅한 사람이면 그 폐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다만 갑산이나 혜산으로 본영을 옮기는 것과 아전을 줄이고 가족을 데려가지 말게 하는 것이 마땅한지는 해당 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이 의논하기를,
"남도 절도사의 본영을, 신은 갑산이나 혜산 같은 곳으로 옮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갑산·혜산은 북청(北靑)으로부터 수백 리를 쑥 들어가 따로 한 구역이 되어 있고, 산천이 험하고 수목이 빽빽하여 말을 타고 나란히 갈 수 없습니다. 또 주민이 적고 허약해서 종기를 앓는 이가 많아 싸움에 이길 군사가 얼마 없으므로, 곧 궁벽한 한구석의 땅이고 대장(大將)이 있기에 마땅한 곳이 아니니, 그 옳지 않은 것의 첫번째입니다.
이 땅이 저들의 지경과 서로 잇닿기는 하였으나, 저들이 사는 곳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고 산천이 막혀 있어서 입구(入寇)하려 하더라도 그 형세가 어렵습니다. 세종(世宗) 때 갑산에 입구한 적이 있기는 하나, 이제까지 40여 년 동안은 갑산에 다시 급한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 방어가 긴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대장이 진수(鎭守)할 곳은 중앙의 중요한 땅에 있어 호령하고 지휘하며 앉아서 사방을 제어하여야 하는데, 어찌 기약할 수 없는 좀도둑을 두려워하여 변두리의 황무지(荒蕪地)에 대진(大鎭)을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남도 절도사는 갑산 같은 곳을 방어하기 위하여 둔 것이 아니니, 어찌 쉽사리 옮겨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옳지 않은 것의 두 번째입니다.
평안도의 방어가 긴요한 것은 갑산에 견줄 것이 아닌데, 절도사의 본영이 영변(寧邊)의 내지(內地)에 있고 지금까지 이것에 의뢰합니다. 이것 역시 갑산으로 옮겨야 한다면 저것도 만포(滿浦)로 옮겨야 하고 저것을 옮기지 않아야 한다면 이것도 옮기지 않아야 할 것이니, 그 옳지 않은 것의 세 번째입니다.
북청은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많으며 또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으나, 갑산·혜산은 황잔(荒殘)하여 북청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북청에서도 오히려 그 조도(調度)를 지탱하지 못하는데 갑산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옳지 않은 것의 네 번째입니다.
갑산 같은 곳은 벼가 자라지 못하고 어염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절도사는 그 일용(日用)에 드는 것을 반드시 다 북청 같은 곳에서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귀신이 날라다 주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과 말의 힘에 의지하여야 할 것이니, 그 백성이 지치는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옳지 않은 것의 다섯 번째입니다.
남도의 아전을, 신은 역시 아주 줄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러 본영의 아전의 수로 그 경중(輕重)을 참작하여 통틀어 의논해서 상세히 정하여야 하며, 남도만을 삭감할 수는 없습니다. 절도사가 가족을 거느리고 임지(任地)에 가더라도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평안도는 관찰사(觀察使)가 평양 부윤(平壤府尹)을 겸하고 절도사가 영변 부사(寧邊府使)를 겸하며, 영안도는 관찰사가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겸하고 남도 절도사가 북청 부사(北靑府使)를 겸하여, 다 내지에 있으면서 고을의 벼슬을 겸하므로, 모두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赴任)하는 것이 국가의 구장(舊章)597) 인데, 어찌 남도에 대하여서만은 가족을 데려가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가족을 거느리는 것을 폐단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어찌하여 반드시 남도만이 그러하다고 하겠습니까? 무릇 가족을 거느리는 자들을 다 혁파하여야 할 것입니다. 옛사람에도 군부(軍府)를 다스린 자가 많았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얻으면 황잔(荒殘)한 것을 바꾸어 부성(富盛)하게 만들어 군사와 말이 정예(精銳)하고 강경(强勁)하여 백성이 기뻐하며 따랐고,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부성한 것을 바꾸어 황잔하게 만들어 군사와 말이 고달프고 쇠약하여 백성이 시름하고 원망하였으므로, 조종(祖宗) 때부터 서북 양계(兩界)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을 매우 중히 여겼습니다. 홍이로(洪利老)·김백겸(金伯謙)은 범상한 사람이니, 김백겸이 인망(人望)에 맞지 않는다면 홍이로가 또한 어찌 인망에 맞아서 폐단이 되는 일이 없겠습니까? 성준(成俊)이 그 폐단을 눈으로 보았으므로 남도 절도사를 혁파하려고 두 번 청을 올린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 사람은 바꿀 수 있지만 위치는 바꿀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이극배의 의논을 따라 병조(兵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고, 또 길성(吉城)·명천(明川)의 수령(守令)이 가족을 데려가지 말게 하는 일을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정창손(鄭昌孫)·윤호(尹壕)가 의논하기를,
"길성·명천의 수령이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하는 것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예전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해당 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고, 윤필상(尹弼商)이 의논하기를,
"길성·명천의 수령은 가족을 데려갈 필요가 없으니, 성준이 아뢴 대로 하소서."
하고, 홍응(洪應)이 의논하기를,
"명천·길성은 변방(邊方) 여러 고을의 사례에 따라 가족을 데려가는 것을 없애고, 3년이면 체임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이 의논하기를,
"길성·명천의 수령이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하는 것은 조종의 구법(舊法)이므로 쉽사리 변경할 수는 없으니, 전에 그 도의 관찰사가 되었던 자에게 널리 물어서 상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필상의 의논을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19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14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신분(身分) / 역사-고사(故事) / 재정-국용(國用) / 재정-잡세(雜稅) / 교통-육운(陸運)
○命召領議政鄭昌孫等, 傳曰: "成俊請罷永安南道節度使, 不然則移其營于甲山、惠山。 且盡減營衙前, 只留數十人, 又不使挈家赴任。 其議便否以啓。" 昌孫議: "南道節度使宜可罷也, 臣於前日已親啓之。" 沈澮議: "南道節度使不可輕罷。 其餘俊所啓, 請令該司議啓。" 尹弼商議: "僻置南道節度使於一隅, 豈世祖本意? 不可移置於惠山等處也。 餘依成俊所啓爲便。" 洪應議: "世祖置南道節度使, 欲與北道首尾相救, 其慮遠矣, 不可廢也。 但驛路之弊, 不可不救, 姑從建議者之說, 移營於甲山等處, 以紓其弊爲便。" 李克培議: "世祖懲丁亥之亂, 遂置南道節度使, 以分南北之權, 聖慮深遠, 今不可以一時之弊輕革之。 節度使得其人, 則其弊自祛。 但移營甲山、惠山及減衙前、除挈家便否, 令該司議啓後, 更議爲便。" 盧思愼議: "南道節度使之營, 臣則以爲不可移置甲山、惠山等處也。 甲山、惠山, 自北靑斗入數百里, 別作一區, 山川險峻, 樹木蒙密, 騎不竝行。 又居民鮮少, 多病尫腫, 勝兵無幾, 乃窮僻一隅之地, 非大將所宜居, 其不可一也。 此地雖與彼境相接, 距彼人所居遼遠, 山川阻隔, 縱欲入寇, 其勢爲難。 世宗朝雖嘗入寇于甲山, 然至今四十餘年, 未聞甲山復有警急, 則其防禦之不緊可知矣。 大將所鎭, 當在中央重地, 號令指揮, 坐制四方。 豈可預畏不可期之鼠竊, 而置大鎭於窮邊荒穢之地哉? 況南道節度使, 非爲甲山等處防禦而設, 則豈可輕爲移置哉? 其不可二也。 平安道防禦之緊, 非甲山比也, 而節度使營在寧邊內地, 至今賴之。 此亦可移於甲山, 則彼亦可移於滿浦; 彼不可移, 則此亦不可移矣, 其不可三也。 北靑土地沃饒, 人民富庶, 又有魚鹽之利; 甲山、惠山則荒殘, 其視北靑, 不啻霄壤。 北靑尙不支其調度, 則甲山其能當之乎? 其不可四也。 甲山等處秔稻不生, 魚鹽不産, 節度使其日用所需, 必皆取諸北靑等處, 此非神運鬼輸, 必資人馬之力, 其民人勞頓之弊, 可勝言哉? 其不可五也。 南道衙前, 臣則以爲亦不可全減也。 且以諸營衙前之數, 酌其輕重, 通議詳定, 不可獨削南道也。 節度使雖率眷赴任, 臣則以謂平安道則觀察使兼平壤府尹, 節度使兼寧邊府使; 永安道則觀察使兼永興府使, 南道節度使兼北靑府使。 皆在內地而兼其州官, 故皆率眷赴任。 此國家舊章也, 豈可獨於南道不使之挈家哉? 若以率眷爲有弊, 則何必南道爲然? 凡諸率眷者皆可革矣。 古人治軍府者多矣, 得其人則變荒殘爲富盛, 而士馬精强, 人民悅服; 不得其人, 則變富盛爲荒殘, 而士馬罷弱, 人民愁怨。 故自祖宗朝, 西北兩界, 用人甚重。 洪利老、金伯謙, 夷人也。 伯謙不孚人望, 則利老亦豈孚人望, 而無弊事乎? 成俊目見其弊, 欲革南道, 再爲上請。 臣意以爲人可改也, 地不可改也。" 傳曰: "從克培議, 令兵曹議啓。" 又命議吉城、明川守令除挈家事。 昌孫、尹壕議: "吉城、明川守令率眷赴任已久, 仍舊爲便。" 明澮、克培議: "請令該司議啓。" 弼商議: "吉城、明川守令, 不須挈家。 請依成俊所啓。" 洪應議: "明川、吉城依邊方諸郡例, 除率眷, 三年而遞爲便。" 思愼議: "吉城、明川守令率眷赴任, 乃祖宗舊法, 不可輕變。 博問曾爲其道觀察使者, 商議施行爲便。" 從弼商議。
- 【태백산사고본】 29책 19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14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신분(身分) / 역사-고사(故事) / 재정-국용(國用) / 재정-잡세(雜稅) / 교통-육운(陸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