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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93권, 성종 17년 7월 15일 무오 1번째기사 1486년 명 성화(成化) 22년

아성군 어세공의 졸기

아성군(牙城君) 어세공(魚世恭)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輟朝)·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대로 하였다. 어세공의 자(字)는 자경(子敬)이고, 함종(咸從)이 본관(本貫)이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어효첨(魚孝瞻)의 아들이다. 경태(景泰) 계유년516) 에 생원 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고 병자년517)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뽑혀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補任)되고 옮겨서 박사(博士)까지 되었다. 천순(天順) 경진년518) 에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에 제배(除拜)되고 공조 좌랑(工曹佐郞)·병조 정랑(兵曹正郞)·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다. 성화(成化) 병술년519) 에 초탁(超擢)되어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배되고 옮겨서 좌승지(左承旨)까지 되었다. 정해년520)이시애(李施愛)가 반역하여 관찰사(觀察使)·절도사(節度使)가 다 살해당하자 세조(世祖)가 초탁하여 가정 대부(嘉靖大夫)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에 올리고, 적(賊)이 평정된 후 함길도를 남·북 두 도로 나누었는데 어세공을 북도 관찰사로 삼고 정충 출기 적개 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올리고 아성군(牙城君)에 봉(封)하였다. 경인년521) 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 제배되었다가 신묘년522) 에 갈려서 아성군(牙城君)이 되고 임진년523) 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정유년524) 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제배되고 호조(戶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의 판서(判書)와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지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나이는 55세이다. 시호(諡號)는 양숙(襄肅)인데, 일에 말미암아 공이 있는 것이 양(襄)이고 마음을 지켜 결단하는 것이 숙(肅)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어세공은 영민(英敏)하여 복잡한 일을 잘 처리하였고, 무격(巫覡)·부도(浮屠)·지리(地理)의 구기(拘忌)에 대해서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으며, 늘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남들이 그 효성에 감탄하였다. 다만 심정원(沈貞源)이 버린 아내에게 재산이 매우 많았는데, 이를 후처(後妻)로 삼았으므로 남들이 비루하게 여겨 비웃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193권 3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133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 인사-관리(管理) / 가족-가산(家産)

○戊(子)〔午〕 /牙城君 魚世恭卒。 輟朝、弔、祭、禮葬如例。世恭子敬, 咸從人, 判中樞府事孝瞻之子也。 景泰癸酉中生員進士, 丙子中文科, 選補承文院正字, 轉至博士。 天順庚辰拜漢城參軍, 歷工曹佐郞、兵曹正郞、成均司藝。 成化丙戌擢拜承政院同副承旨, 轉至左承旨。 丁亥李施愛叛, 觀察使、節度使皆遇害, 世祖擢陞嘉靖咸吉道觀察使。 賊平, 分咸吉爲南北二道, 以世恭爲北道觀察使, 賜精忠出氣敵愾功臣號, 陞資憲, 封牙城君。 庚寅拜京畿觀察使, 辛卯遞爲牙城君。 壬辰陞知中樞府事, 丁酉拜漢城判尹, 歷戶ㆍ兵ㆍ刑ㆍ工曹判書, 議政府右參贊。 至是卒, 年五十五。 諡襄肅: 因事有功 ‘襄’, 執心決斷 ‘肅’,

【史臣曰: "世恭英敏, 善治煩劇。 巫覡、浮屠、地理拘忌, 絶於言議, 常以悅親爲事, 人歎其孝。 但以沈貞源棄妻財産甚饒, 娶爲後妻, 人鄙笑之。"】


  • 【태백산사고본】 29책 193권 3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133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 인사-관리(管理) / 가족-가산(家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