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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184권, 성종 16년 10월 25일 임인 3번째기사 1485년 명 성화(成化) 21년

장성 역사의 부적절함과 의주의 3섬을 경작하는 것에 관한 이의의 상소문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의(李誼)가 상소하기를,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왕공(王公)이 설험(設險)하여 그 나라를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장성(長城)의 역사도 또한 그 유의(遺意)입니다. 그러나 한갓 설험(設險)하는 것만 알고 백성의 힘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국가의 평안하고 위태함과 생민(生民)의 휴척(休戚)이 달려 있는 것인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지난 신축년1066) 가을에 신이 순변사(巡邊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의주(義州) 등 고을의 연강(沿江)의 형세를 가서 살피었는데, 얼음이 얼면 경계[封疆] 사이의 험함이 없고 방수(防戍)와 첩입(輒入)이 없는 해가 없습니다. 한 번 장성을 쌓으면 만세를 영구히 힘입게 되니, 그 국가에 이익됨을 말로써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도(道) 백성은 본래 번성[蕃庶]하지 않아 읍리(邑里)가 소조(蕭條)1067) 하고 물억새가 눈에 보이는 데까지 멀리 뻗었으며, 거기다가 중국에서 사신이 오고 조근(朝覲)하러 가기 때문에 오는 이를 맞고 가는 이를 전송해야 하므로 백성의 피로가 극도에 달했습니다. 또 뒤쫓아서 축성하는 역사에 몰아붙인다면 백성이 조금이라도 소복(蘇復)될 수 있겠습니까? 장차 도적을 막을 때 마침 쇠잔한 백성으로써 하게 됨은 참으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신의 뜻으로는 반드시 곡식을 많이 축적한 연후에 공역(功役)을 일으켜야 된다고 여깁니다. 대저 의주(義州)위화(威化)·조몰(鳥沒)·검동(黔同)의 세 섬은 땅이 기름져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 많은데, 근래에 오랑캐의 침략 때문에 경작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진실로 국가에 이득이 있다면 어찌 작은 오랑캐의 침략을 염려하겠습니까? 적합하게 대처하여 조치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옛적에 조충국(趙充國)1068) 의 금성(金城)과 제갈량(諸葛亮)의 위빈(渭濱)과 조조(曹操)의 허하(許下)와 곽원진(郭元振)1069) 의 양주(涼州)는 혹 적국이 서로 대치하고 혹 변어(邊圉)1070) 가 매우 다급했는데도 모두 둔전(屯田)의 이(利)를 얻어서 경작하고 방수(防戍)하였으니, 이것은 그 명확한 효과를 크게 증험함이 아니겠습니까? 본도의 노강(老江)·선사(宣沙)·광량(廣梁) 3포(浦)의 수군(水軍)이 2천 6백 83명인데, 방수(防戍)가 긴요치 않으니, 본포(本浦)의 유방군(留防軍) 1천 5백 명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농군(農軍)을 삼고, 황해도의 번상(番上)하는 기병(騎兵)과 본도(本道)의 유방군(留防軍) 5, 6백 명을 수호하는 군대로 삼아 전기(田器)1071) 를 갖추고 경우(耕牛)를 준비하여, 도선(渡船)을 많이 만들어서 경운(耕耘)하는 때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척후(斥候)를 멀리 하여 아침에 건너고 저녁에 돌아오게 하며, 농한기에는 벽돌을 굽고 돌을 모르게 하면서 그 한 해에 생산되는 곡식의 수량을 계산하여 3, 4년을 기약하면 변방의 창고가 점점 축적될 것입니다. 또 경외(京外)에서 속전(贖錢)으로 징수하거나 장물(贓物)로 몰수하는 물건과 상고(商賈)와 어살[魚箭] 등의 세(稅)는 모두 의주(義州)에 운반해 와서 혹 경우(耕牛)를 사거나 혹 전기(田器)를 바꾸게 하며, 또 연변(沿邊) 부근의 군현(郡縣)에서 곡식을 무역하게 해서 이렇게 한 곡식이 10만에 가깝게 된 연후에 다른 도의 백성으로 하여금 한 해에 혹 4, 5만 혹 6, 7만을 차례로 뽑아 들여와 본도의 백성과 같이 쌓게 하고, 다른 도의 백성이 갈 때의 양식은 본인이 가지고 와서 머물며 역사하게 하고, 돌아가는 길의 양식은 면포(綿布) 한 필을 납부하면 관에서 쌀 1곡(斛)을 주고, 납부한 베[布]는 또 좇아서 곡식과 바꾸게 하여서 다음해의 용도를 삼으면, 해마다 계속해서 역사해도 본도의 백성은 피곤하고 괴로운 데에 이르지 않고, 다른 도의 백성은 식량을 싸가지고 와야 하는 걱정이 없을 것이고, 장성은 쌓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융보(邑堡)도 점점 차례로 수리하면 변방의 창고는 이로써 넉넉해 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피곤한 백성을 거느려 중대한 역사를 일으키려는 것은 신은 아마도 민력(民力)만을 수고롭게 하고 그 효과는 거두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정부(政府)에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184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65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역사-고사(故事) / 재정-역(役)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농업-전제(田制)

  • [註 1066]
    신축년 : 1481 성종 12년.
  • [註 1067]
    소조(蕭條) : 쓸쓸함.
  • [註 1068]
    조충국(趙充國) :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정략가.
  • [註 1069]
    곽원진(郭元振) : 당(唐)나라 예종(睿宗) 때의 정략가.
  • [註 1070]
    변어(邊圉) : 변경(邊境).
  • [註 1071]
    전기(田器) : 농구.

○司憲府掌令李誼上疏曰:

《易》曰: "王公設險, 以守其國。" 今長城之役, 亦其遺意也。 然徒知設險, 而不量民力, 則國家之安危、生民之休戚係焉, 豈不懼哉? 去辛丑秋, 臣以巡邊從事官往審義州等官沿江形勢, 氷合則無封疆之險, 防戍輒入之, 無歲無之。 一築長城, 則萬世永賴, 其有益於國家, 可勝言哉? 然此道之民本不蕃庶, 邑里蕭條, 萑葦極目, 加之以皇華之來、朝覲之行, 迎來送往, 民勞極矣。 又從而驅之築城之役, 則民夫其有少蘇乎? 將以禦寇, 適以殘民, 誠非細故也。 臣意以謂必先儲穀, 然後功役可興。 夫義州威化鳥沒黔同三島, 土地沃饒, 生穀甚多。 而近以狄人侵掠, 棄而不耕久矣。 苟有利於國家, 何慮小虜之侵掠乎? 在處置得宜耳。 昔趙充國金城, 諸葛亮渭濱, 與夫曺操許下, 郭元振凉州, 或敵國相持, 或邊圉孔棘, 而皆得屯田之利, 且耕且戍, 此非其明效大驗歟? 本道老江宣沙廣梁三浦水軍二千六百八十三人, 而防戍不緊焉。 除本浦留防一千五百人, 其餘以爲農軍。 黃海番上騎兵與本道留防軍五六百人, 以爲守護之軍, 具田器, 備耕牛, 多造渡船, 耕耘之時, 設木柵, 遠斥堠, 朝渡暮還。 居閒月則燔磚焉, 聚石焉, 計其一歲生穀之數, 期三四年則邊廩漸蓄矣。 又京外徵贖贓沒之物及商賈魚箭等稅, 皆輸入義州, 或買耕牛, 或換田器, 又於沿邊附近郡縣貿穀。 以此而粟穀幾於十萬, 然後令他道之民, 一歲或四五萬, 或六七萬, 輪次抄入, 與本道之民共築之。 他道之民, 往時之糧則自齎, 留役、回程之糧, 則納綿布一匹, 官給米一斛。 所納之布, 又從而貿穀, 以爲翌年之用, 則每歲連役, 而本道之民不至困苦, 他道之民無患贏糧, 而長城可得而築也。 邑堡漸次而修葺, 邊廩以之而足矣。 不然而率疲困之民擧重大之役, 則臣恐徒勞民力而未見其效也。

傳曰: "議于領敦寧以上及政府。"


  • 【태백산사고본】 28책 184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65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역사-고사(故事) / 재정-역(役)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농업-전제(田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