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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183권, 성종 16년 9월 22일 경오 1번째기사 1485년 명 성화(成化) 21년

병조 정랑 박문간이 재령에서 돌아오니, 도랑을 파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

병조 정랑(兵曹正郞) 박문간(朴文幹)재령(載寧)으로부터 돌아와서 서계(書啓)하기를,

"전탄(箭灘)의 물은 재령군(載寧郡)장수산(長壽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데, 가뭄을 만나도 물이 마르지 않으므로, 삼지강(三枝江)의 들[平] 6, 7리쯤과 율곶이[栗串]의 들 20여 리까지 도랑을 팔 만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높은 언덕이 4리쯤에 있는데, 그것은 깊이 네댓 길을 뚫어야 하나, 모래와 돌은 없고 모두 육지(肉地)946) 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관개(灌漑)하면 율곶이 들에는 1천여 석(碩)을 심을 수 있고, 삼지강(三枝江) 들에는 7, 8백 석을 심을 수 있으며, 전탄(箭灘)으로부터 도랑을 파는데 율곶이 들까지는 1만 명의 인부(人夫)가 두 달 동안의 공역(功役)이 들고, 삼지강 들까지는 5천 명의 인부가 두 달 동안의 공역이 들 것입니다."

하였는데, 전교(傳敎)하기를,

"민정(民情)은 어떠한가? 또 공역은 성취(成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박문간이 아뢰기를,

"근방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도랑을 파서 각각 그 땅을 점유(占有)하고자 합니다. 또 이르기를, ‘국가에서 〈그 일을〉 한다면 공역은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합니다."

하였다.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의 당상(堂上)을 불러 이를 의논하게 하니, 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이극배(李克培)·노사신(盧思愼)·윤호(尹壕)·이철견(李鐵堅)·이파(李坡)·정괄(鄭佸)·이숭원(李崇元)·정난종(鄭蘭宗)·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이덕량(李德良)·김승경(金升卿)·노공필(盧公弼)·이봉(李封)·이계동(李季仝)·유순(柳洵)·이칙(李則)·임수창(林壽昌)·민영견(閔永肩)·안처량(安處良)·송영(宋瑛)이 의논하기를,

"도랑을 파면 비록 큰 이익(利益)이 있다고는 하지만, 마땅히 1만 5천 명의 인부를 써야 하는데, 비록 온 도의 장정을 다 동원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뻗어 있는 길이가 20여 리이고, 두 달의 공역(功役)인데다가 황해도(黃海道)는 조잔(凋殘)하니, 백성들이 어떻게 능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또 게다가 관개(灌漑)하는 곳의 낙종(落種)하는 수량은 1천 8백 석에 불과하므로 공역(功役)은 많은데 효과를 거두는 것은 적을 것이니, 한두 사람의 말로 인하여 큰 역사(役事)를 갑자기 일으키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또 황해도는 땅은 넓지만 사람이 적어서 만약 인력(人力)만 있다면 자연히 여유가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많은 사람을 움직여 도랑을 파게 해야 합니까? 거듭 민력(民力)만 피곤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지금 여러 의논을 살펴보건대, 모두 불가(不可)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큰 일을 성취시키려면 작은 폐단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내가 듣건대, 제언(堤堰)은 폐단이 있지만, 천방(川防)은 이익이 많고 폐단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것을 하려고 한다. 삼공(三公)이 능히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여 한재(旱災)가 없도록 하였다면 천방(川防)·제언(堤堰)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뭄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비록 백성의 일을 무휼(撫恤)하는데 관심을 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보좌(輔佐)하는 사람이 있어야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을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강도(江都)를 경영하여 잔치하고 놀려고 한 계책(計策) 같은 것이 아니라, 곧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극배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어찌 천방(川防)의 이로움을 모르겠습니까? 단지 황해도의 백성은 조잔(凋殘)한 것이 막심하므로, 20여 리의 도랑을 파는 역사는 비록 한 도의 백성을 모두 역사시킨다 하더라도 능히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역사를 일으켰으나 성취시키지 못하고 중도에서 그친다면 한갓 민력을 수고롭게 하여 못쓰게 할 따름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랑을 파는 것이 비록 폐단(弊端)이 있다 하더라도 도랑이 이루어진 후에는 만세(萬世)에서 이로움을 입은 것이므로, 내가 대신(大臣)을 따로 보내어 가서 편부(便否)를 살펴보게 하고, 결단코 그것을 하려고 한다."

하였다. 이숭원이극균은 전의 의논을 지키며 바꾸지 아니하였는데, 이극배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아뢰기를,

"상교(上敎)와 같이 대신을 보내어 다시 편부를 살펴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가노(家奴)가 안악(安岳)의 땅에 사는데, 대군(大君)을 통하여 계책(計策)을 바치기를, ‘군(郡)에 전탄(箭灘)이 있는데, 도랑을 파서 〈전탄의 물을〉 끌어대어 연진(延津)에 이르게 하면 논 4천여 경(頃)에 물을 댈 수 있으며, 해마다 반드시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듣고 도랑을 파기로 뜻을 결정하고, 박문간(朴文幹)을 보내어 가서 그 지역을 살펴보게 하였다. 박문간은 임금의 뜻이 이미 굳어 있음을 보고, 와서 쉽사리 공역(功役)을 성취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아뢰니,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공역을 감독하게 함에 따라 온 도의 장정을 모두 징발(徵發)하여 그 일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탄의 하류(下流)를 끊어 제방(堤防)을 산과 같이 쌓았는데, 거친 물살이 거세게 들이쳐 깨뜨리면 따라서 쌓고, 〈그리고 다시 물살이 들이쳐〉 곧 깨뜨려지곤 하였으며, 또 도랑을 파서 전탄을 끌어대는데 모래가 문득 무너져 막으니, 물이 통할 수가 없었다. 전탄에서 연진(延津)에 이르기까지 거의 3백여 리인데, 그 사이에 준령(峻嶺)이 많아서 이를 뚫으려면 깊이가 혹 4, 50길이나 되어 양쪽 언덕이 허물어져, 역정(役丁)으로서 죽은 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끝내 성취하지 못하고 중지(中止)하였다. 정난종은 공역(功役)이 성취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직 뜻에 따라 복종하여 민력을 무휼(撫恤)하지 않고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황해도(黃海道) 백성들은 지금에 이르도록 원망(怨望)하는 마음이 골수(骨髓)에까지 사무쳤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18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55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수리(水利) / 건설-토목(土木) / 재정-역(役)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註 946]
    육지(肉地) : 흙으로만 된 땅.

○庚午/兵曹正郞朴文幹回自載寧, 書啓曰:

箭灘之水出載寧郡 長壽山, 遇旱不竭。 開渠至三枝江平六七里許, 至栗串平二十餘里, 其間有高岸四里許, 鑿之深可四五丈, 無沙石皆肉地。 其所灌漑, 栗串平可種一千餘碩, 三枝江平可種七八百碩。 自箭灘開渠栗串平, 則一萬夫兩月之役, 至于三枝江平則五千夫兩月之役。" 傳曰: "其民情何如? 且以謂功役可就乎?" 文幹啓曰: "傍近居民皆欲開渠, 各占其地。 且云國家爲之, 則役可成矣。 命召領敦寧以上、政府、六曹、漢城府堂上議之。 鄭昌孫沈澮李克培盧思愼尹壕李鐵堅李坡鄭佸李崇元鄭蘭宗李克均成俊李德良金升卿盧公弼李封李季仝柳洵李則林壽昌閔永肩安處良宋瑛議: "鑿之縱有大利, 當用一萬五千人, 雖擧道出丁, 無由而得。 況延袤二十餘里, 兩月之役, 黃海彫殘之民, 何以能堪? 又況灌漑之處落種之數, 不過千八百碩, 則用功多而收效少, 不宜因一二人之言遽興大役。 且黃海道地廣人稀, 若有人力, 則自有餘地, 何必動衆鑿渠, 重困民力?" 傳曰: "今觀諸議, 皆以爲不可, 然成大事者不顧小弊。 予聞堤堰有弊, 川防利大而無弊, 故予銳意欲爲之。 三公能爕理陰陽, 使無旱災, 則川防堤堰不必爲也; 如其不然, 則不可不備旱也。 予雖勤恤民事, 必有輔佐者, 乃可成事也。 此事非如 煬帝營江都爲宴遊之計, 乃爲民也。" 克培等啓曰: "臣等豈不知川防之利哉? 但黃海之民淍殘莫甚, 穿渠二十餘里之役, 雖盡役一道之民, 恐不能堪。 興役未成, 中道而止, 則徒爲勞敝民力而已。" 傳曰: "開渠雖若有弊, 渠成之後, 萬世蒙利矣。 予欲別遣大臣往審便否, 決意爲之。" 崇元克均守前議不變, 克培等諸人僉啓曰: "如上敎, 遣大臣更審便否可也。" 乃命鄭蘭宗往審之。

【史臣曰: "有月山大君家奴居安岳地面, 因大君獻策曰: ‘郡有箭灘, 鑿渠引之以達延津, 則可灌稻田千餘頃, 歲獲利必多。’ 上聞之, 決意開渠, 遣(朴文斡)〔朴文幹〕 往審其地, 文幹視上意已堅, 來啓功可易就。 命蘭宗督役, 盡發一道丁壯而赴之, 截箭灘下流, 築堤如山, 狂瀾盪擊而破, 隨築卽破。 且開渠引灘, 沙輒塡塞, 水不能通。 自箭灘延津幾三百餘里, 其間多峻嶺, 鑿之深或至四五十丈, 兩岸崩頹, 役丁死葬其中者, 不可勝數, 竟未就而止。 蘭宗非不知功之難成, 專志承順, 不恤民力如此, 黃海之民, 至今怨入骨髓。"】


  • 【태백산사고본】 28책 18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55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수리(水利) / 건설-토목(土木) / 재정-역(役)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