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부사 이손이 아룀에 따라 북쪽의 여연 등 4진에 대해 의논케 하다
이에 앞서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손(李蓀)이 진언(陳言)하기를,
"신이 일찍이 새로운 땅을 수색(搜索)하는 일로 인(因)하여 영안도(永安道)와 평안도(平安道) 두 도의 경계에 이르러, 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을 혁파(革罷)한 뒤로 이 땅이 야인(野人)의 유렵(遊獵)하는 곳이 되었음을 들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네 고을은 모두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하여 위는 삼수(三水)에 접하고 아래는 상토(上土)에 연(連)하여서 그 형세가 서로 의지하여 있고, 그 사이에 거의 4, 5백여 리의 땅이 비옥(肥沃)하여서 사람이 살 만하였습니다. 그리고 압록강은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한계이므로 압록강을 넘어서 경계로 할 수 없거니와 압록강도 못미쳐서 경계로 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수자리 사는 군졸(軍卒)이 험한 곳을 넘어서 왕래하는 것이 불편하다 하여 네 성(城)을 폐기(廢棄)하였습니다. 비록 산천이 험하게 가로막혀서 도적이 능히 들어오지 못한다 하나, 그 사이에 오히려 지름길이 있으니, 혹시 야인이 빈 땅으로 들어와서 지름길로 함흥(咸興)에 이르더라도 누가 다시 알겠습니까? 강계(江界) 이남의 희천(熙川) 등지에도 통행하는 지름길이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삼수(三水)와 함흥(咸興) 두 고을의 백성으로서 그 중간에 흩어져 있는 자가 무려 수백 집인데, 본고을과의 거리가 멀고 또 관방(關防)이 없어서 절대로 구원(救援)할 형세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극균(李克均)이 평안도에 있을 때에 사로잡힌 중국 사람[唐人]이 와서 말하기를, ‘야인이 네 개의 빈 성(城)으로 입구(入寇)할 계획이 있다.’ 하였으니, 필시 이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영안도의 육진(六鎭) 또한 폐기하기를 의논하는 자가 있었으나, 세종(世宗)께서 군의(群議)를 물리치고 따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였다면 육진도 지금은 반드시 도적의 소굴이 되었을 것입니다. 네 성이 압록강을 따라 있는 것이 마치 육진이 두만강(豆滿江)을 따라 있는 것과 같으며 그 형세도 대개 서로 같은데, 어찌 유독 네 고을을 폐기하여 도적에게 길을 열어 준단 말입니까? 또 듣건대 이 네 고을의 백성으로 딴 곳에 옮겨 사는 자가 모두 옛땅을 그리워하는 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 성보(城堡)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다시 세우는 것이 매우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재상을 불러 전교하기를,
"여연(閭延) 등의 고을을 내가 다시 세우려는 것은 아니나, 이제 이손(李蓀)의 진언(陳言)이 이와 같으니, 경(卿) 등은 전일(前日)에 혁파한 사유(事由)를 상고하고 상의(商議)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홍응(洪應)·윤호(尹壕)·어유소(魚有沼)·이덕량(李德良)·윤말손(尹末孫)·김서형(金瑞衡)·허탁(許倬)은 의논하기를,
"이제 박종우(朴從愚) 등의 계본(啓本)을 상고하여 편부(便否)를 살펴보건대, 혁파한 지 이미 오래되어서 비록 다시 세우려 해도 백성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지키겠습니까?"
하였으며, 이극균(李克均)·박성손(朴星孫)·성귀달(成貴達)은 의논하기를,
"여연 등 네 진(鎭)은 강을 따라 설치하고 그 사이에 보책(堡柵)895) 을 세웠으며, 또 압록강의 천참(天塹)896) 의 험함도 있어 다시 세울 만하나, 다만 토병(土兵)의 수가 적어서 남쪽의 군사를 빌어다가 함께 지켜야 합니다. 전날 진을 설치한 뒤에 도적이 와서는 매양 그 이익을 보고 우리는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남쪽의 군사가 이로 인하여 피폐(疲弊)하였고 평안도는 전 도(道)가 점차 소연(簫然)해지기에 이르러,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부득이 하여 혁파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이미 31년이나 되었으나 한 명의 오랑캐도 이 땅을 거쳐 입구(入寇)한 자가 없었으니, 이손의 계책을 반드시 시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181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44면
- 【분류】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先是, 金海府使李蓀陳言曰: "臣嘗因搜索新地, 到永安、平安兩道地界, 聞革罷茂昌、閭延、虞芮、慈城後, 此地爲野人遊獵之所。 臣竊惟四邑皆以鴨綠爲界, 上接三水, 下連上土, 形勢相依, 其間幾四五百餘里, 沃饒可居。 且鴨綠江天設限界, 不可過鴨綠爲境、縮鴨綠爲境。 今以戍卒之越險往來爲不便, 廢棄四城。 雖曰山川險阻賊不能入其間, 尙有蹊經, 如或野人入空虛之地, 徑至咸興, 誰復知之? 至於江界以南熙川等處, 亦有通行之徑, 不可不慮。 況三水、咸興兩邑之民散處中間者, 無慮數百家, 距本邑遠而又無關防, 絶無救援之勢。 且李克均在平安道時, 被虜唐人來言, 野人有入寇四空城之計, 必此地也。 前此, 永安六鎭亦有議棄者, 世宗排群議不從。 不然, 六鎭今必爲賊藪矣。 四城之沿鴨綠江, 猶六鎭之沿豆滿江, 其形勢大槪相同, 何獨棄四邑, 以開賊路乎? 且聞四邑之民移居他處者, 咸有懷土之情。 其城堡猶有存者, 復立甚便。" 命召領敦寧以上及知邊事宰相, 傳曰: "閭延等邑, 予非欲復立也。 今李蓀陳言如此, 卿等考前日革罷之由, 商議以啓。" 韓明澮、沈澮、洪應、尹壕、魚有沼、李德良、尹末孫、金瑞衡、許倬議: "今考朴從愚等啓本, 審定便否, 革之已久。 雖欲復立無民, 誰與守之?" 李克均、朴星孫、成貴達議: "閭延等四鎭沿江而置, 間以堡柵, 又有鴨綠天塹之險, 似可復立。 但土兵數少, 借南兵幷戍之。 向者置鎭之後, 賊來每得其利, 我無所獲。 南兵因此疲弊, 平安一道漸至蕭然, 世祖大王不得已革罷, 今已三十一年, 無一虜由此地入寇者。 李蓀之策, 不必施行。"
- 【태백산사고본】 28책 181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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