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 왕후 부묘 때의 영녕전 합제 절차에 대해 논의하다
이 앞서 정희 왕후(貞熹王后)부묘(祔廟)463) 때에 영녕전(永寧殿)464) 의 합제(合祭)에 대한 여부(與否)를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고제(古制)를 널리 상고하게 하였는데, 홍문관에서 서계(書啓)하기를,
"《두씨통전(杜氏通典)》465) 에 이르기를, ‘예전에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는 3년상(三年喪)을 마치고 모두 선조(先祖)의 신(神)에 합(合)하고 향사(享祀)하였는데, 우(虞)나라·하(夏)나라에서는, 선왕(先王)이 죽으면 신왕(新王)이 2년상을 마치고 협제(祫祭)하고, 은(殷)나라에서는, 선왕이 죽으면 신왕이 2년상을 마치고 협제하였으며, 주제(周制)466) 에는, 천자와 제후는 3년상을 마치고 담제(禫祭) 후에 곧 태조(太祖)에게 협제하고, 그 이듬해 봄에 군묘(群廟)에 체제(禘祭)467) 한다.’ 하고, 그 주(註)에 말하기를, ‘협제는 훼철(毁撤)한 묘(廟)와 훼철하지 않은 묘를 모두 태조(太祖)에게 합하여 올리는 것이며, 체제는 친묘(親廟)에 미치지 못하는 것인데, 다만 문(文)·무(武)468) 이하(以下)는 훼철한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에 의하여 문·무의 묘(廟)에서 제사하고, 왕계(王季)469) 이상(以上)은 후직(后稷)의 묘(廟) 안에서 제사하였다.’ 하였고, 《한시외전(韓詩外傳)》470) 에는 말하기를, ‘체제는 훼철한 신주를 가져다가 모두 태조(太祖)에 합하여 제사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송사(宋史)》에는 예전에 새로운 임금이 왕위를 계승한 지 3년에, 선왕(先王)의 상(喪)을 27개월 만에 담제(禫祭)를 지내고, 그 뒤에 새로운 신주를 부묘(祔廟)하고 특별히 체제(禘祭)를 행하였으며, 그 해 겨울 10월에 협제(祫祭)를 행하였으니, 청컨대 예조(禮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교제(郊祭)471) 와 체제(禘祭)는 천자(天子)의 일이며 제후(諸侯)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협제(祫祭)라면, 예전에 천자와 제후가 상(喪)을 마치고 모두 선조(先祖)의 신위(神位)를 태조(太祖)의 묘(廟)에 합하여 제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정에서는 영녕전(永寧殿)을 설치한 이후로 한번도 협제한 때가 없었으니, 반드시 목조(穆祖)와 익조(翼祖)와 도조(度祖)와 환조(桓祖)가 모두 태조(太祖)의 선조(先祖)인데, 태조의 묘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옳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베풀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에 묘를 옮긴 신주가 있다면 가하지만, 만약에 묘를 옮긴 신주가 없는데도 특별히 행한다면, 아마도 선왕(先王)의 구제(舊制)가 아닌가 합니다. 세조(世祖)의 부묘(祔廟) 때에도 행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것에 의하여 한 듯하오니, 신 등은 생각건대, 행하지 않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였다. 정희 왕후(貞熹王后)를 부알(祔謁)할 때에 덕종(德宗)과 예종(睿宗)의 신주(神主)를 다른 곳으로 피하게 할 것인지의 여부(與否)를 또한 예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정희 왕후의 부묘 절차(祔廟節次)는 한결같이 의궤(儀軌)의 상례(常例)에 따라 시행해야 하므로, 부위(祔位)를 뜰 아래에서 설치해야 하는데, 이것이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뵙는 예(禮)이므로, 마땅히 뜰 아래에서 절해야 합니다. 당초에 의궤(儀軌) 때에 어찌 덕종과 예종이 정희 왕후에 앞서 부알(祔謁)하여 이런 변례(變禮)가 있을 것을 생각하였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건대, 모자(母子)·군신(君臣)의 분별과 천존 지비(天尊地卑)는 고금(古今)이 일치하고, 유명(幽明)이 한가지 이치이니, 잠시도 권도(權道)로 변경해서 바꿀 수 없습니다. 지금 정희 왕후는 친자(親子)인 덕종·예종이 그 예(例)가 선왕(先王)·선후(先后)의 차서(次序)에 있고, 양양(洋洋)하게 묘정(廟庭)에 엄림(嚴臨)해 있는데, 모후(母后)의 자리를 뜰 아래에 설치하는 것이 어찌 예(禮)이겠습니까? 예(禮)라는 것은 인정(人情)에서 말미암는 것인데, 만약에 인정에 적합하지 못하다면, 예(禮)는 한갓 옥백(玉帛)인 것입니다. 만약 유명(幽明)을 가지고 길이 막히어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한다면 유자(幽者)는 신(神)이고 명자(明者)는 사람이니, 신인(神人)의 사이에는 진실로 분별이 있는 것입니다. 왕후(王后)와 양종(兩宗)472) 이 유(幽)라고 한다면, 어떻게 길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묘제(廟制)의 서차(序次)에서 어찌하여 부자(父子)가 연좌(連坐)하지 아니하고 좌소 우목(左昭右穆)473) 의 제도를 만들었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건대, 다른 곳에 피하게 하였다가, 왕후가 전(殿)에 오른 뒤를 기다려서 다시 봉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겸판서(兼判書) 이파(李坡)가 의논하기를,
"정희 왕후를 부알(祔謁)할 때에 덕종과 예종이 묘반(廟班)에 있어 인정(人情)에 어긋나고 잘못된 것 같으나, 유명(幽明)은 길이 다른 것입니다. 왕후의 부묘(祔廟)는 본시 선왕과 선후를 뵙는 것이지, 덕종과 예종을 뵙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덕종과 예종은 이미 이것이 압존(壓尊)474) 이므로, 왕후를 새로 뵙기 위하여 별도로 예모(禮貌)를 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또 이미 신명(神明)이 되었는데, 절차(節次)를 어찌 산 사람과 같게 곡절(曲節)475) 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부알(祔謁)하러 입정(入庭)할 때에 전하께서 이미 위판(位版)에 계시고, 모든 향관(享官)과 소목(昭穆)의 종친(宗親)도 자리에 있고, 백관(百官)들도 반열(班列)을 지어 있으면서 국궁(鞠躬)하는 절차가 없는 것은, 그것이 압존(壓尊)이 되기 때문인데, 덕종과 예종은 이미 묘정(廟庭)의 말단(末端)에 있으니, 어찌 새로 부묘하는 왕후를 위하여 별도로 곡절(曲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세조(世祖)의 졸곡(卒哭) 뒤에 의묘(懿墓)476) 와 공릉(恭陵)477) 을 모두 길례(吉禮)로써 행하여, 집사(執事)는 제복(祭服)을 입고, 향을 받은 자는 길복(吉服)을 착용하였으므로, 신이 신숙주(申叔舟)에게 말하기를, ‘의묘와 공릉은 모두 세조의 친자(親子)와 친부(親婦)이니, 살았으면 마땅히 참최(斬裏)478) 3년을 입어야 할 것인데, 졸곡 뒤에 곧 길제(吉祭)를 받으니, 이는 곧 선왕(先王)·선후(先后)와 같은 것이다. 예문(禮文)에 어떻겠는가?’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기를 ‘우리들도 이것을 처리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서, 백방으로 생각해 보았으나, 유명(幽明)은 길이 다른데, 어찌 신명(神明)으로써 상제(喪制)를 추복(追服)479) 하겠는가?’ 하므로, 박원형(朴元亨)이 함께 의논하여 상정(詳定)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것에 의거하여 행하는데, 유독 부묘(祔廟)에만 무슨 의심이 있습니까? 송조(宋朝) 때에 고황후(高皇后)480) 의 부묘가 신종(神宗)의 뒤에 있어서 바로 이와 같았는데, 그 당시의 대신(大臣) 범순인(范純仁) 이하 예(禮)를 아는 자가 매우 많았으니, 만약에 이 예(例)를 상고하여, 만일에 서로 맞는 절차(節次)가 있다면 가하지만, 만약에 상고하지 못한다면 전에 아뢴 바에 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정부(政府)와 영돈녕(領敦寧) 이하, 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 당상(堂上)과 대간(臺諫)·홍문관(弘文館)을 불러서 함께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의논하기를,
"3년 뒤에 영녕전(永寧殿)에 합제(合祭)하는 것은 협제(祫祭)의 예(例)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조(本朝)에서는 태조(太祖) 이후로 협제의 예(禮)가 없었으니, 영녕전에 협제하는 것은 미편(未便)한 것 같습니다. 청컨대 조종(祖宗)의 고사(故事)를 따르소서."
하고, 심회(沈澮)와 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윤호(尹壕)·허종(許琮)·김겸광(金謙光)·정괄(鄭佸)은 의논하기를,
"예전에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는 3년상을 마치고 모두 선조(先祖)의 신위(神位)에 합(合)하여 향사(享祀)하고, 주(周)나라 제도에는 천자와 제후가 3년상을 마치고 담제(禫祭) 뒤에 곧 태조(太祖)에게 협제(祫祭)하였는데, 지금 만약 우리 조정에서 협제의 예(禮)가 없다고 하여, 부묘(祔廟)할 때에 영녕전에 아울러 향사하지 않는다면, 예(禮)에 매우 어긋나니, 아울러 향사함이 옳습니다."
하고, 이봉(李封)과 윤보(尹甫)는 의논하기를,
"신이 고제(古制)를 상고하니, 우(虞)나라·하(夏)나라·은(殷)나라·주(周)나라에서 모두 상(喪)을 마치고 협제(祫祭)하였으니, 대저 ‘협(祫)’이란 것은 ‘합(合)’이므로, 조묘(祧廟)481) 의 신주(神主)를 아울러 합하여 제사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녕전(永寧殿)은 곧 상제(常祭)482) 의 신주이고 조묘(祧廟)의 예(例)가 아니니, 부묘(祔廟)할 때에 아울러 제사하는 것이 예(禮)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협제는 한 묘[一廟]에 합하여 제사하는 것이므로, 영녕전은 한 곳에서 모두 합하여 제사하기가 미안하니, 각각 그 실(室)에서 제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육(李陸)·김종직(金宗直)·강자평(姜子平)·이유인(李有仁)·이칙(李則)·임수창(林壽昌)은 의논하기를,
"3년상을 마치고 훼철(毁撤)한 묘(廟)와 훼철하지 않은 묘의 신주(神主)를 모두 합하여 향사(享祀)하는 것은, 우(虞)나라·하(夏)나라·은(殷)나라·주(周)나라에서도 모두 같았으니, 지금 정희 왕후(貞熹王后)를 부묘(祔廟)할 때에도 영녕전(永寧殿)에 아울러 향사하는 것이 고례(古禮)에 합(合)합니다. 만약에 ‘영녕전은 춘추(春秋)에만 제사하여 별향(別享)483) 이 불가하다’고 한다면, 융통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개 부묘는 모두 길제(吉祭)484) 를 따르는 것이 상례(常例)이니, 지금의 부묘는 상제(常祭)로 인하여 제사하는 것이 아니고, 곧 이것은 별향(別享)입니다. 이미 별향이라고 한다면 종묘(宗廟)에는 행하고 영녕전에는 폐하는 것은 역시 미안(未安)합니다."
하고, 한언(韓堰)·남기(南䄎)·이적(李績)·안진생(安晉生)은 의논하기를,
"예전에 천자와 제후는 3년상을 마친 뒤에 협제(祫祭)함이 있었으니, 협제란 것은 조묘(祧廟)의 신주를 합하여 제사하는 것입니다. 비록 친소(親疎)의 차이가 있어서 조천(祧遷)하거나 훼철하여 제도를 달리 하더라도 조상(祖上)인 것입니다. 부묘(祔廟)할 때에 영녕전(永寧殿)에서 아울러 제사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안처량(安處良)·김흔(金訢)·정성근(鄭誠謹)·기찬(奇禶)·신종호(申從濩)·송질(宋軼)·조지서(趙之瑞)·이거(李琚)·성희증(成希曾)·박증영(朴增榮)은 의논하기를,
"삼가 《통전(通典)》485) 을 상고하건대, ‘예전에 천자와 제후는 3년상을 마치고 모두 선조(先祖)의 신(神)을 합하여 향사(享祀)한다.’ 하고, 그 주(註)에 말하기를, ‘훼철(毁撤)한 묘(廟)와 훼철하지 않은 묘를 모두 태조(太祖)에게 합하여 올리는 것은 두루 군묘(群廟)에 제사하기 위한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협제(祫祭)하는 제도가 없고 춘추(春秋)로 영녕전에 제사하는 데 그치나, 예(禮)라는 것은 인정(人情)에 말미암는 것이니 지금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부묘(祔廟)에 제사가 없어서는 아니되니, 아울러 제사하는 것을 고함이 편안합니다."
하고, 정창손·윤필상·김겸광·정괄은 의논하기를,
"예(禮)라는 것은 인정(人情)에서 말미암는 것으로, 그것이 절문(節文)486) 이 된 것입니다. 지금 정희 왕후의 부묘시에 묘정(廟庭)에서 고알(告謁)하는데, 덕종(德宗)과 예종(睿宗)의 신주가 안연(安然)하게 자리에 있는 것은 매우 인정(人情)과 예(禮)에 어긋납니다. 소연(昭然)하게 하늘에 계신 혼령이 모후(母后)를 공경하는 마음이 어찌 평시(平時)와 다르겠습니까? 부묘할 때를 당하여 덕종과 예종의 신주는 막차(幕次)로 모셔 피(避)하게 하였다가, 정희 왕후가 승부(陞祔)하기를 기다려 다시 봉안하는 것이 정리(情理)에 매우 합당합니다."
하고, 심회·홍응·윤호·이육은 의논하기를,
"예(禮)가 비록 인정(人情)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유명(幽明)은 서로 막혀서 산 사람의 예(禮)로써 신명(神明)에게 모두 요구할 수 없습니다. 덕종과 예종은 정희 왕후의 3년상을 당하여 길의장(吉儀仗)과 길제(吉祭)를 버리지 못하였는데, 어찌 부묘(祔廟) 때에 있어서만 왜곡(歪曲)되게 의심을 내어, 산 사람이 평석(平昔) 때에 공경하고 삼가는 예(禮)로써 반드시 피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까? 하물며 종묘(宗廟)라는 것은 조종(祖宗)의 종묘이므로, 조종에게 압존(壓尊)이 되는데, 덕종과 예종이 어찌 모후(母后)의 부알(祔謁)로 인하여 별처(別處)에 나가 피하여야겠습니까? 그리고 나가 피할 때에는 마땅히 옮기고 다시 봉안하는 제사가 있어야 하니, 예도(禮度)가 매우 번거롭습니다. 신도(神道)는 간략한 것을 숭상하므로, 이를 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약에 반드시 인사(人事)로써 요구한다면, 양종(兩宗)이 어찌 다만 퇴피(退避)만 해서 되겠습니까? 문 밖의 노방(路傍)에 나가서 맞이해야만 비로소 예(禮)에 맞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건대, 피하지 않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고, 이봉과 윤보는 의논하기를,
"덕종과 예종은 모두 정희 왕후의 후사(後嗣)이므로, 부묘(祔廟)하고 뜰에서 알현할 때에 다른 곳으로 퇴피(退避)하는 것이 인정(人情)에 당연한 것이나, 신도(神道)는 고요한 것을 숭상하고 예(禮)가 번거로우면 어지러워지니, 정희 왕후가 뜰에서 알현할 때를 당하여 양왕(兩王)의 실(室)을 그대로 담아 두고 열지 말며, 뜰에서 알현이 끝나고 승부(陞祔)한 뒤에 모두 열어서 제사하는 것이 인정(人情)에 합하고 신도(神道)에 마땅합니다."
하고, 김종직·강자평·이유인·이칙·임수창은 의논하기를,
"선왕(先王)의 제도에 종묘에 향사(享祀)하는 예(禮)를 만든 것은 효도하는 도리를 도탑게 하기 위함이고,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사람을 섬기는 것처럼 하는데, 어찌 유명(幽明)이 다르다고 해서 다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정희 왕후가 뜰 아래에서 부알(祔謁)하는 것도 대개 조종(祖宗)에게 공경함을 표하는 것인데, 덕종과 예종만이 모후(母后)에게 공경함을 표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곳으로 피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고, 유순(柳洵)과 박치(朴䎩)·박안부(朴安阜)·이계남(李季男)은 의논하기를,
"예전에 천자와 제후는 3년상을 마치고 태묘(太廟)에 협제(祫祭)하였으니, 협제란 것은 훼철(毁撤)한 묘(廟)와 훼철하지 않은 묘의 신주를 모두 제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서 선왕을 부묘할 때에 영녕전(永寧殿)에 아울러 제사하였는가의 여부(與否)는 비록 상고할 수 없으나, 예(禮)라는 것은 인정(人情)에서 말미암아 베풀어진 것입니다. 지금 정희 왕후의 상(喪)을 이미 대왕(大王)에 의하여 3년상을 행하였으니, 상을 마친 뒤에 부묘하는 제사도 마땅히 예전의 협제의 예(例)에 의하고, 영녕전에 아울러 제사하는 것이 정리(情理)에 합(合)합니다. 그리고 유명(幽明)이 비록 차이가 있다고 하나 존비(尊卑)의 분별 또한 잊어서는 아니되니, 왕후의 신주가 뜰에서 알현할 때를 당하여 덕종과 예종의 혼령이 어찌 편안히 전상(殿上)에 처하여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정에 미안(未安)한 것입니다. 부묘할 때에 이안(移安)하고 부묘한 뒤에 다시 봉안하는 것이 또한 정리에 적합합니다."
하고, 한언·남기·이적·안진생은 의논하기를,
"예(禮)란 인정(人情)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정희 왕후가 묘정(廟庭)에서 부알(祔謁)하는 것은 선왕(先王)에 공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예종과 덕종이 어찌 모후(母后)에게 공경을 표하지 않겠습니까? 권도(權道)로 그 자리를 피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안처량과 김흔·정성근·기찬·신종호·송질·조지서·이거·성희증·박증영은 의논하기를,
"정희 왕후의 부묘 때에 덕종과 예종의 신주는 마땅히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다른 곳으로 피하게 한다면 복위(復位)할 적에 또한 마땅히 〈정희 왕후의〉 새 신주에게 알현(謁見)하는 예(禮)가 있어야 합니다. 경전(經傳)과 사기(史記)를 상고해 보아도 모두 그러한 제도가 없습니다. 지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으니, 여러 신주를 독(櫝)487) 에게 꺼낼 때에 양종(兩宗)의 신주는 독을 열지 말아 피하는 뜻을 보이고, 새 신주가 부묘한 뒤에 독을 열고 제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무방(無妨)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영녕전(永寧殿)의 신주를 종묘에 합하여 제사하면, 이는 선공(先公)께서 하위(下位)에게 굽히는 것이므로, 예(禮)에 미안(未安)하니, 따로 제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양종(兩宗)의 자리를 피하게 하는 일이 과연 홍문관(弘文館)의 의논과 같다면, 예(禮)가 번요(煩擾)하지도 아니하고 손피(遜避)488) 하는 뜻도 있으니, 그것을 다시 물으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윤당(允當)합니다."
하였으나, 오직 김겸광·정괄·김종직·유순·이칙·한언·임수창은 아뢰기를,
"〈신주의 독(櫝)을〉 열지 아니하는 것으로 자리를 피한다 함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고, 이파(李坡)가 아뢰기를,
"양종을 만약 부득이하여 피하게 한다면 홍문관의 의논이 채택할 만하고, 막차(幕次)를 따로 설치하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영녕전(永寧殿)에는 마땅히 별제(別祭)를 행하고, 왕후의 부알(祔謁)시에는 양종의 실(室)을 그대로 닫아 두고 열지 말며, 왕후가 승부(陞祔)한 뒤에 독(櫝)에서 꺼내어 제사를 행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17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6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
- [註 463]부묘(祔廟) : 삼년상을 마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
- [註 464]
영녕전(永寧殿) : 조선조 때 임금이나 왕비로서 종묘(宗廟)에 모실 수 없는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던 곳. 종묘 안 서쪽에 있는데, 태조(太祖)의 4대조(四代祖)와 그 비(妃), 대(代)가 끊어진 임금과 그 비(妃)를 모시었음.- [註 465]
《두씨통전(杜氏通典)》 : 당(唐)나라의 두우(杜佑)가 찬술한 책.- [註 466]
주제(周制) : 주나라의 제도.- [註 467]
체제(禘祭) : 천자가 조상에게 지내는 큰 제사.- [註 468]
문(文)·무(武) :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 [註 469]
왕계(王季) : 주나라 문왕의 아버지.- [註 470]
《한시외전(韓詩外傳)》 : 한(漢)나라 때의 한영(韓嬰)이 지은 책.- [註 471]
교제(郊祭) :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 [註 472]
양종(兩宗) : 덕종과 예종.- [註 473]
좌소 우목(左昭右穆) :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왼쪽 줄을 소(昭),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여, 시조(始祖)의 1세(一世)를 가운데 모시고, 2·4·6세를 소(昭)에, 3·5·7세를 목(穆)에 모심. 소목(昭穆).- [註 474]
압존(壓尊) : 웃어른 앞에서 그 위엄에 눌려 행동을 자유로이 못함.- [註 475]
곡절(曲節) : 몸가짐 등의 상세한 예절.- [註 476]
의묘(懿墓) : 덕종(德宗:성종의 생부)이 의경 세자(懿敬世子)로서 임금으로 추숭(追崇)되기 이전의 묘호(墓號). 성종이 즉위한 뒤 임금으로 추숭되면서 능호(陵號)를 경릉(敬陵)으로 하였음.- [註 477]
공릉(恭陵) : 장순 왕후(章順王后)의 능호(陵號).- [註 478]
참최(斬裏) : 외간상(外艱喪)에 입는 상복(喪服). 거친 베로 짓는데, 아랫도리 가장자리 끝을 꿰매지 않은 상복임.- [註 479]
추복(追服) : 어떤 사정에 의하여 입지 못했던 거상옷을 뒷날에 가서 입음.- [註 480]
고황후(高皇后) :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후(后).- [註 481]
조묘(祧廟) : 천주(遷主)를 모신 묘당(廟堂).- [註 482]
상제(常祭) : 평소에 정해져 있는 제사.- [註 483]
별향(別享) : 특별히 지내는 향사(享祀).- [註 484]
길제(吉祭) : 종묘(宗廟)의 시향제(時享祭)를 말함.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五禮儀)〉 「부묘의(祔廟儀)」조에 보면, "담제(禫祭) 후 길제(吉祭) 때에 부묘(祔廟)하는데, 길제는 곧 종묘(宗廟)의 시향제(時享祭)이다." 하였음.- [註 485]
《통전(通典)》 : 《두씨통전(杜氏通典)》.- [註 486]
○先是, 貞熹王后祔廟時永寧殿合祭與否, 令弘文館博考古制。 弘文館書啓曰:
《杜氏通典》云: "古者, 天子諸侯三年喪畢, 皆合先祖之神而享之。 虞、夏, 先王崩, 新王二年喪畢而祫;殷, 先王崩, 新王二年喪畢而祫;周制, 天子諸侯三年喪畢, 禫祭之後, 乃祫於太祖, 來年春禘于群廟。" 註: "祫, 毁廟、未毁廟, 皆合升於太祖;禘則不及親廟。 但文、武以下, 毁主, 依昭穆, 於文廟祭之;王季以上, 於后稷廟中祭之。" 《韓詩外傳》曰: "禘, 取毁廟之主, 皆合食於太祖。" 《宋史》: "古者, 新君踐祚之三年、先王之喪二十七月爲禫祭, 然後新主祔廟, 特行禘祭, 是冬十月行祫祭。" 請令禮曹議啓。
禮曹啓曰: "郊禘, 天子事, 非諸侯所得爲;若祫祭, 則古者天子諸侯喪畢, 皆合先祖之神於太祖廟而祭之。 然我朝自設永寧殿以後, 一無祫祭之時, 必以穆、翼、度、桓皆太祖之先, 不宜來就於太祖之廟故不設耳。 若有遷廟之主則可, 如無遷廟之主而特行, 恐非先王之舊制也。 世祖祔廟時不行, 恐亦依此爲之。 臣等以爲不行爲便。" 貞熹王后祔謁時德宗、睿宗神主出避與否, 亦令禮曹議啓。 禮曹啓曰: "貞熹王后祔廟節次, 一從《儀軌》常例施行, 故設祔位於庭下。 是謁先王先后禮, 宜拜於庭下也。 當初《儀軌》之時, 豈期德宗、睿宗先貞熹王后祔謁而有此變禮乎? 臣等以爲母子君臣之分, 天尊地卑, 古今一致, 幽明一理, 不可造次須臾權宜變易也。 今貞熹王后親子德、睿兩宗, 例在先王先后之序, 洋洋如在, 嚴臨廟庭, 而母后之位設於庭下, 豈禮也哉? 禮緣人情, 若不合人情, 則禮徒玉帛也。 如以幽明爲路隔無妨, 則幽者神也, 明者人也, 神人之間, 固自有分矣。 王后與兩宗則一般幽云爾, 何以云路異乎? 若然則廟制序次, 何不父子連坐, 而爲左昭右穆之制? 臣等以爲出避, 俟王后上殿後還安何如?" 兼判書李坡議: "貞熹王后祔謁時德宗、睿宗在廟班, 於人情似乎舛錯。 然幽明路異, 王后之祔廟, 本是謁於先王先后, 非謁於德、睿也。 且德、睿旣是壓尊, 不宜爲新謁王后, 別加禮貌。 且旣爲神明, 節次何得與生人同爲曲節哉? 且祔謁入庭之時, 殿下旣在版位, 諸享官及昭穆宗親又在位, 百官亦列其班, 而無鞠躬節次者, 以其壓尊也。 則德、睿旣在廟庭之末, 豈爲新祔王后, 別有曲節哉? 且世祖卒哭之後,, 懿墓、恭陵, 皆以吉禮行之, 執事服祭服, 受香者着吉服。 臣謂申叔舟曰: "懿墓、恭陵, 皆是世祖親子親婦, 生則應服斬衰三年。 而卒哭之後, 便受吉祭, 乃與先王先后同, 於禮文何如?’ 叔舟答曰: ‘吾等亦處之極難, 百計商度。 然幽明路異, 豈以神明而追服喪制乎?’ 故朴元亨同議詳定, 至今依此爲之。 獨於祔廟何疑? 宋朝高皇后祔廟, 在神宗之後, 正與此合, 而其時大臣范純仁以下知禮者甚多。 若考此例, 倘有相合節次則可, 如不可考, 依前所陳何如?" 命召政府、領敦寧以(下)〔上〕 六曹、漢城府堂上、臺諫、弘文館, 僉議以啓。 鄭昌孫議: "三年之後合祭永寧殿, 似是袷祭之例。 然本朝太祖以後, 無袷祭之禮, 袷祭於永寧殿, 似爲未便。 請從祖宗故事。" 沈澮、尹弼商、洪應、尹壕、許琮、金謙光、鄭佸議: "古者, 天子諸侯三年喪畢, 皆合先祖之神而享之。 周制, 天子諸侯三年喪畢。 禫祭之後, 乃袷於太祖。 今若以我朝無袷祭之禮, 袝廟時不幷享永寧殿, 於禮甚違, 幷享爲便。" 李封、尹甫議: "臣按古制, 虞、朝〔夏〕 、殷、周, 竝喪畢而袷。 夫袷者, 合也, 竝合祧廟之主而祭之。 況永寧殿乃常祭之主, 非祧廟例也, 其於祔廟之時幷祭之, 似合於禮。 然祫則合於一廟而祭之, 永寧殿則竝合祭一處未安, 各於其室祭之何如?" 李陸、金宗直、姜子平、李有仁、李則、林壽昌議: "三年喪畢, 毁廟、未毁廟之主, 皆合而享之, 虞、夏、殷周皆同。 今貞熹王后祔廟時幷享永寧殿, 合於古禮。 若曰永寧殿止祭春秋, 不可以別享云爾, 則似乎不通。 凡祔廟皆因吉祭, 是常例也。 今之祔廟, 非因常祭而祭之, 乃是別享也。 旣云別享, 則行於宗廟而廢於永寧殿, 亦爲未安。" 韓堰、南椅、李績、安晋生議: "古者, 天子諸侯三年喪畢後有袷祭, 袷者所以合祧廟之主而祭之。 雖親疎有間, 祧毁異制, 莫非祖也。 祔廟時, 永寧殿幷祭何如?" 安處良、金訢、鄭誠謹、奇禶、申從濩、宋軼、趙之瑞、李琚、成希曾、朴增榮議: "謹按《通典》: ‘古者, 天子諸侯三年喪畢, 皆合先祖之神而享之。’ 註: ‘毁廟、未毁廟, 皆合升於太祖。’ 所以徧祀群廟之意也。 國家無祫祭之制, 而止於春秋祭永寧殿。 然禮緣人情, 今貞熹王后之祔, 似不可無祭告, 幷祭之便。" 昌孫、弼商、謙光、佸議: "禮緣人情而爲之節文者也。 今貞熹王后祔廟時, 在庭告謁, 而德宗、睿宗之主安然在位, 甚違情禮。 昭然在天之靈, 敬母后之心, 何異於平時乎? 當祔廟之時, 德、睿兩宗之主出避幕次, 俟貞熹王后陞祔還安, 於情理甚合。" 澮、應、壕、陸議: "禮雖緣於人情, 然幽明相隔, 不可以生人之禮盡責神明。 德宗、睿宗當貞熹王后三年之喪, 不得去吉儀仗與吉祭, 豈獨於祔廟之時, 曲生疑阻, 責以生人平昔敬跪曲拳之禮而必避乎? 況宗廟者, 祖宗之宗廟, 祖宗壓尊, 二宗豈得以母后之祔謁而出避於別處乎? 又出避之時, 當有移還之祭, 禮度甚煩, 神道尙簡, 行之似難。 必若責以人事, 兩宗豈但退避? 出迎於門外路傍, 始謂稱禮, 其可行乎? 臣等謂勿避爲便。" 封、甫議: "德宗、睿宗皆是貞熹王后之嗣, 其於祔廟庭謁之時, 退避他所, 人情所當然。 然神道尙靜, 且禮煩則亂, 當貞熹王后庭謁之時, 兩王之室仍閉不開, 庭謁陞祔後, 竝開以祭, 庶合於人情, 宜於神道。" 宗直、子平、有仁、則、壽昌議: "先王制爲宗廟享祀之禮, 所以敦孝理也。 事亡如事存, 豈以幽明而有異哉? 今貞熹王后祔謁庭下, 蓋伸敬於祖宗也, 德宗、睿宗獨不伸敬於母后乎? 出避爲便。" 柳洵、朴䎩、朴安阜、李季男議: "古者, 天子諸侯三年之喪旣畢而祫于太廟, 祫則毁廟、未毁廟之主, 皆祭焉。 我朝先王祔廟時永寧殿幷祭與否, 雖不得考, 而禮緣人情而設者也。 今貞熹王后之喪, 旣依大王行三年之喪, 則喪畢後祔廟之祭, 亦當依古祫祭例, 幷祭永寧殿, 於情理爲當。 且幽明雖曰有間, 尊卑之分亦不可忘。 當王后神主庭謁之時, 德宗、睿宗之靈, 豈宜寧處殿上? 是人情所未安者也。 於祔廟時移安, 旣祔後還安, 亦合情理。" 堰、椅、績、晋生議: "禮緣人情, 貞熹王后祔謁於庭, 所以伸敬先王也, 德宗、睿宗盍伸敬于母后乎? 權避其位何如?" 處良、訢、誠謹、欑、從濩、軼、之瑞、琚、希曾、增榮議: "貞熹王后祔廟之時, 德宗、睿宗之主, 當避位。 然若出避, 則其復位之際, 亦當有謁見新主之禮, 稽諸經史, 幷無其制, 今不可輕議。 於群主出楯之時, 兩宗之主勿開櫝, 以示避之之意, 及新主已祔之後開櫝與祭, 似乎無妨。" 傳曰: "永寧殿神主合祭於宗廟, 則是先公屈於下位, 於禮未安, 別祭何如? 兩宗避位事, 果如弘文館之議, 則禮不煩擾而有遜避之意。 其更問焉。" 僉啓曰: "上敎允當。" 唯金謙光、鄭佸、金宗直、柳洵、李則、韓堰、林壽昌啓曰: "以不開爲避位, 似乎未可。" 李坡啓曰: "兩宗若不得已而避, 則弘文館之議爲可採也。 別設幕次, 大不可也。" 傳曰: "永寧殿當行別祭, 而王后祔謁時, 兩宗之室仍閉不開, 王后陞祔後, 出櫝行祭可也。"
- 【태백산사고본】 27책 17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6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
- [註 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