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전(學田)의 하사에 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주군(州郡)의 문묘 석전(文廟釋奠)1049) 은 어떻게 하는가?"
하니,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
"춘추 향사(春秋享祀)는 성균관(成均館) 의식에 의하고,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는 그 고을에 사는 생원(生員)·진사(進士)가 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는 선성(先聖)을 존중하고 성균관은 풍속 교화의 근원이다. 유생(儒生)이 모두 안(顔)·증(曾)1050) 을 배우려고 하는데 사전(祀典)1051) 을 삼가지 아니할 수 없으며 유생의 양육(養育)을 후하게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노비(奴婢)는 안유(安裕)가 바친 것이 있으나 다만 학전(學田)1052) 이 없으니, 어진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혹시 넉넉지 못할 것이므로 내가 별도로 학전을 내려서 그 수요에 이바지하여 스승을 높이고 도(道)를 존중하는 뜻을 보이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성균관 유생의 공궤(供饋)는 양현고(養賢庫)가 있고 석전 제물(釋奠祭物)은 봉상시(奉常寺)에서 모두 족히 공급하므로, 지금은 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외방(外方) 고을의 석전 제물과 교수(敎授)·훈도(訓導)의 봉급은 관(官)에서 받는데, 수령(守令)들이 소홀히 하고 마음을 쓰지 아니하여 더러는 주지 아니한 것도 있고, 또 각 관둔전(官屯田)1053) 도 수(數)에 차지 아니하여 학전(學田)이 나올 데가 없기 때문에 이제까지 아뢰지 아니하였습니다. 고을에 만일 주인 없는 땅이 있으면 향교에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전교하기를,
"만약 주인 없는 땅을 향학(鄕學)1054) 에 절급(折給)하면 유생(儒生)이 어지럽게 다투어 고하여서 도리어 이(利)를 꾀하는 마음을 열게 할 것이다. 국학(國學)1055) 은 내가 친히 제사하는 곳이라 제전(祭奠)에 수요되는 것과 유생을 공궤(供饋)하는 것이 비록 상수(常數)1056) 가 있더라도 이제 만약 학전을 별도로 하사하면 유생의 마음에 또한 반드시 국가에서 학교를 중히 여긴다고 생각하며 서로 고무(鼓舞)되어 힘쓸 것이다. 이 뜻으로써 의정부(議政府)·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예조(禮曹)·홍문관(弘文館)에 의논하라."
하니,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호(尹壕)·서거정(徐居正)·허종(許琮)·한치례(韓致禮)·이파(李坡)·이세좌(李世佐)·박숭질(朴崇質)은 의논하기를,
"성상의 하교(下敎)가 윤당(允當)합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국학(國學)은 풍속과 교화를 맡은 곳인데, 예로부터 훌륭한 제왕(帝王)이 모두 중히 여겨서 땅을 주어 후하게 길러서 인재를 양성하였으니, 성상의 뜻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전토를 주어야 할 수(數)와 나올 곳을 해당 관사(官司)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며,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이제 성균관에 전지를 주려는 전교를 살피니, 이는 진실로 성덕(盛德)의 일이나, 다만 남아도는 전지로 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봉상시(奉常寺)에서 때로 선성(先聖)·선사(先師)를 제사하고 양현고(養賢庫)에서 유생을 먹이니, 또한 넉넉하고 후합니다. 성상께서 재단하소서."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선왕조(先王朝)에서 양현고를 세웠는데 이제 별도로 학전(學田)을 세우고자 하시니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호조(戶曹)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며,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성균관에 별도로 학전을 주어 그 용도를 넉넉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성상께서 스승을 높이고 도(道)를 중하게 여기시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성(先聖)을 석전(釋奠)하는 데에는 보(簠)·궤(簋)·변(籩)·두(豆)가 본래 그 수(數)가 있는데 봉상시에서 그것을 판비(辦備)하며 유생을 먹이는 것도 수가 있는데 양현고에서 맡아 부족함이 없으니, 이제 비록 별도로 학전을 내리더라도 실지로 보탬이 없고 국용(國用)만 허비할 것입니다."
하고, 안처인(安處仁)·이인형(李仁亨)·송질(宋軼)·이균(李均)·김수동(金壽童)·이거(李琚)·민보익(閔輔翼)·박증영(朴增榮)은 의논하기를,
"예로부터 잘 다스리는 임금은 선사(先師)를 높이고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급무(急務)로 삼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송(宋)나라 진종(眞宗)은 전지(田地) 1백 경(頃)을 내렸고, 철종(哲宗)은 1백 경(頃)을 보태어 내렸으므로, 이제까지 미담(美談)이 되었습니다. 국가에서 국학(國學)을 세우고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였으니 스승을 높이고 선비를 기르는 뜻이 지극한데, 또 학전을 두고자 하시니, 사문(斯文)1057) 의 큰 다행입니다. 다만 학교(學校)는 안팎의 다름이 없는데, 주현의 향교는 선비를 기르는 자본이 없어서 생도가 양식을 싸가지고 오기가 어려워서 취학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습니다. 예전에 손석(孫奭)이 연주(兗州)에 학전(學田) 10경(頃)을 주어서 학생의 양식으로 하기를 청하니, 진종(眞宗)이 그 말에 따랐는데, 여러 고을에 학전을 준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이 예(例)에 의하여 적당하게 학전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사전 절목(賜田節目)을 해당 관사(官司)에 내려서 의논해 아뢰게 하되, 전지가 만약 남는 것이 있으면 진종(眞宗)의 고사(故事)에 의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인하여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이제 홍응·노사신의 의논을 보건대, 대개 같은 뜻이다. 재(齋)에 기숙하는 가난한 선비가 비록 향학심(向學心)이 있더라도 양식을 가져오기가 어려워서 학궁(學宮)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므로, 특별히 학전(學田)을 내려 곤궁함을 구제하면 문교(文敎)에 거의 도움이 있을 것인데, 노사신이 실지로 보탬이 없다고 이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
"노사신의 뜻은 신 등도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반드시 석전(釋奠)과 양현(養賢)1058) 의 법이 이미 선왕조(先王朝)에 갖추어져서 더할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의논을 아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학에 전지를 내리는 것이 어찌 도움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학전(學田)을 두는 것을 처음 건백(建白)1059) 한 자가 없었는데 주상께서 유생(儒生)을 넉넉히 양성하고자 특별히 학전을 내리기를 명하였으니 진실로 우리 유도(儒道)의 다행인데, 노사신이 홀로 의논하기를 실지로 보탬이 없고 한갓 국용만 허비할 뿐이라고 하였으니, 사문(斯文)을 위해 꾀하는 자가 과연 이와 같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172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645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농업-전제(田制)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1049]문묘 석전(文廟釋奠) :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에게 지내는 제사.
- [註 1050]
안(顔)·증(曾) : 공자의 제자인 안자(顔子)와 증자(曾子).- [註 1051]
사전(祀典) : 제사를 지내는 예전(禮典).- [註 1052]
학전(學田) : 성균관(成均館)·사학(四學), 주부 군현(州府郡縣)의 향교(鄕校) 및 사액 서원(賜額書院)에 획급(畫給)한 전지(田地). 성균관에는 4백 결, 사학에는 각 10결, 주·부 향교에는 각 7결, 군·현 향교에는 각 5결, 사액 서원에는 3결로 규정되어 있음.- [註 1053]
관둔전(官屯田) : 고려·조선조 때 각 지방 관아에 둔 둔전(屯田). 본래는 군자(軍資)에 보충하려고 두었던 것이나 실지는 지방 관아의 일반 경비에 충당했으며, 경작자도 주현(州縣)의 관노비(官奴婢)나 농민(農民)으로 사역시켰음.- [註 1054]
향학(鄕學) : 향교.- [註 1055]
국학(國學) : 성균관(成均館).- [註 1056]
상수(常數) : 일정한 수량.- [註 1057]
사문(斯文) : 유교(儒敎)의 학문을 말함.- [註 1058]
양현(養賢) : 현재(賢才)를 양성한다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조선조 때 성균관 유생의 식량을 맡아 보던 양현고(養賢庫)를 이르는 말임. 이 양현고는 태조(太祖) 원년(1392)에 설치하여 고종(高宗) 31년(1894)에 폐(廢)하였음.- [註 1059]
건백(建白) : 의견을 진술함.○己酉/傳于承政院曰: "州、郡文廟釋奠, 何以爲之?" 承旨等啓曰: "春秋(亨祀)〔享祀〕 , 依成均儀, 其獻官、執事, 則其邑所居生員、進士爲之。" 傳曰: "我國尊崇先聖, 而成均館風化之源。 儒生皆欲學顔、曾, 祀典不可不謹, 而儒生養育不可不厚。 奴婢則有安裕所納, 但無學田, 其於養賢, 或不贍也。 予欲別賜學田, 以供其需, 以示尊師重道之意, 何如?" 對曰: "成均儒生供饋, 則有養賢庫, 釋奠祭物, 則奉常寺, 皆足以供之, 今無可爲之事。 但外方州、郡釋奠祭物及敎授、訓導之廩, 受之於官, 守令慢不致意, 或有不給者, 各官屯田, 亦不盈數, 學田無出處, 故迄今未啓耳。 州、郡如有無主之田, 則給鄕校, 何如?" 傳曰: "若以無主田, 折給鄕學, 則儒生紛紛告爭, 反開謀利之心矣。 若國學, 則予所親祭之處, 祭奠所需、儒生供饋, 雖有常數, 今若別賜學田, 於儒生之心, 亦必以爲: ‘國家重學校,’ 相與鼓舞勉勵矣。 其以此意, 議于政府、領敦寧以上及禮曹、弘文館。" 鄭昌孫、韓明澮、沈澮、尹壕、徐居正、許琮、韓致禮、李坡、李世佐、朴崇質議: "上敎允當。" 尹弼商議: "國學, 風化之地, 自古聖帝明王, 咸重之, 給田厚養, 作成人才, 上意允當。 給田之數及出處, 令該司議啓, 後更議何如?" 洪應議: "今審成均館給田之敎, 此實盛德事, 但無餘剩之田, 可以賜給。 奉常以時祀先聖、先師, 養賢庫餉儒生, 亦甚優厚。 上裁。" 李克培議: "先王朝立養賢庫, 今欲別立學田, 甚盛擧也。 令戶曹議啓, 何如?" 盧思愼議: "成均館別給學田, 以贍其用, 誠聖上尊師重道之意。 然釋奠先聖, 則簠、簋、籩、豆, 自有其數, 奉常辦之。 饋餉儒生, 則亦自有數, 而養賢庫掌之, 無所不足。 今雖別賜學田, 無益於實, 祇費國用。" 安處仁、李仁亨、宋軼、李均、金壽童、李琚、閔輔翼、朴增榮議: "自古善治之主, 莫不以尊先師、養人材爲急務。 宋 眞宗賜田百頃, 哲宗添賜百頃, 至今以爲美談。 國家建國學, 設養賢庫, 其尊師養士之意, 至矣, 而又欲置學田, 斯文之大幸也。 但學校無內外之殊, 而州、縣鄕校, 未有養士之資, 學徒難於贏糧, 不肯赴學者有之。 昔孫奭請給兗州學田十頃, 以爲學糧, 眞宗從之, 諸州給學田始此。 乞依此例, 於州、縣, 量宜給學田, 何如?" 御書曰:
賜田節目, 下該司議啓, 田若有餘, 依眞宗故事, 可也。
仍傳于政院曰: "今觀洪應、盧思愼議, 大槪一意。 寄齋寒儒, 雖有向學之心, 難於齎糧, 未得久留學宮者, 必多。 故特賜學田, 以周其窮, 庶有益於文敎, 思愼以謂: ‘無益於實,’ 何也? 予未之知也。" 承旨等啓曰: "思愼之意, 臣等亦未詳知也。 然其意必曰: ‘釋奠養賢之規, 已備於先王朝, 無以加矣,’ 故如是議啓耳。 然賜田國學, 豈爲無益乎?
【史臣曰: "置學田, 初無建白者, 而上欲贍養儒生, 特命賜之, 誠吾道之幸也。 思愼獨議以謂: ‘無益於實, 徒費國用,’ 爲斯文之計者, 果如是乎?"】
- 【태백산사고본】 26책 172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645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농업-전제(田制)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1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