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부사직 김극유가 상서하여 김국광의 시호를 고쳐 주기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김극유(金克忸) 등이 상서(上書)한 대략에 이르기를,
"신의 아비가 오랫동안 나라의 정권을 잡아 바름을 지키고 아부하지 아니하니, 소인(小人)이 속으로 꺼리는 것은 형편상 당연한 것입니다. 무릇 군자(君子)를 모함하는 자가 햇볕처럼 밝은 주상 밑에서 간사한 꾀를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비방(誹謗)하는 말을 퍼뜨려서 조정의 시청(視聽)을 현혹하게 하므로 율문(律文)에는 단지 ‘성명(姓名)을 숨긴 문서(文書)에 고해 말한 사람만 죄에 저촉되고, 피고자(被告者)는 죄주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신의 아비에게만 이 비어(飛語)871) 를 들어서 사실로 논하여 신의 아비의 시호를 ‘술의불극(述義不克)’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론(公論)입니까? 또 아비가 아들에게와 형이 동생에게는 비록 골육지친(骨肉之親)이라고 하나 아들의 범한 바가 아비에게 간여됨이 없고, 동생의 범한 바가 형에게 간여됨이 없기 때문에 단주(丹朱)872) 의 악함이 요(堯)의 덕을 더럽힐 수 없고, 관(管)·채(蔡)873) 의 악함이 주공(周公)의 착함을 더럽힐 수 없는데, 신의 아비만이 제서(弟壻)874) 의 범한 바를 들어서 실덕(實德)으로 논하여 악한 시호를 더하였으니, 또한 어찌 공론이라 하겠습니까? 봉상시(奉常寺)에서 어떤 일이 신의 아비의 잘못임을 적실히 말하지 아니하고, 단지 유언비어의 비방(誹謗)과 제서(弟壻)의 범한 것만 들어서 시호를 의논하는 사실로 삼았으니, 그 사실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되며, 후세를 경고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의 아비가 죽은 뒤에 잘못된 시호를 얻어 지하(地下)에서 원통함을 품었으나, 다만 유명(幽明)875) 이 막혔으므로, 밝은 햇볕 아래에서 스스로 억울함을 펼 수가 없어 반드시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신 등은 아비의 몸을 나누었는데 아비의 억울함을 성명(聖明)876) 밑에서 펴지 못하니, 그래도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어질고 사랑하심으로써 특별히 정(丁) 자(字) 하나만 고쳐 주시면 신의 부자(父子)가 그 억울함을 펴게 될 뿐만 아니라 공도(公道)도 이를 힘입어서 밝아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보이게 하니,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는 의논하기를,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전교하시기를, ‘재상(宰相)의 행실이 선과 악이 서로 반(半)이 되면 그 선한 것을 취하여 시호(諡號)를 정하라.’고 하였는데, 지금 김국광(金國光)의 시호 정자(丁字)는 비록 지극히 악한 것은 아니나 아름다운 시호는 아닙니다. 예전이나 우리 조정에서 모두 시호를 고친 예(例)가 있으니, 개정하기를 명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이극배(李克培)·노사신(盧思愼)·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김국광이 성조(聖朝)를 섬김에 있어 공적이 또한 드러났고, 세조조(世祖朝)에 비록 한때의 비방(飛謗)이 있었으나 어찌 다 사실이라 하겠습니까? 대저 국정(國政)을 오래 잡는 자는 헐뜯음과 기리는 것이 겸하게 됩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이미 의논해 아뢰었으니, 전부 고칠 수는 없고, 다만 의논해 올린 글자가 하나만이 아니니, 그 가운데 골라서 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제 선성(宣城)877) 의 의논을 보건대, ‘성(晟)의 일은 여태자(戾太子)의 일과 같지 아니하니, 고치는 것이 무방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정대(正大)한 의논이 아니다. 여태자는 무제(武帝)가 생존했을 때에 군사를 막고 반역하였고, 지금 성은 비록 제집의 여종이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죽여서 꺼림이 없었으니, 임금을 경멸한 것이다. 또 시호는 공론으로 정하는 것인데, 이제 만약 수의(收議)하여 고치면 뒤에 할아비와 아비의 시호를 고치려고 하는 자가 장차 어지럽게 일어날 것이니, 단서를 열 수 없다. 또 김국광(金國光)의 시호는 승정원(承政院)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도승지(都承旨) 김종직(金宗直)·좌승지(左承旨) 권건(權健)·우승지(右承旨) 성건(成健)은 아뢰기를,
"신 등이 전에 홍문관(弘文館)에 있을 때에 이미 고칠 수 없다는 뜻으로 계달하였습니다."
하고, 좌부승지(左副承旨) 한찬(韓儹)·우부승지(右副承旨) 안침(安琛)·동부승지(同副承旨) 이세우(李世佑)는 아뢰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이미 시호를 정하였으니, 고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내가 만약 고칠 수 있다면 창원군(昌原君)은 나에게 숙부(叔父)가 되니, 마땅히 먼저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호는 공론이 있는 바인데, 한 번 그 단서를 열면 끝에 가서는 금하기 어려우니, 모두 고치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17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632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註 871]비어(飛語) : 유언비어.
- [註 872]
단주(丹朱) : 요(堯)임금의 아들.- [註 873]
관(管)·채(蔡) :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모두 주공(周公)의 형제임.- [註 874]
제서(弟壻) : 매부(妹夫).- [註 875]
○行副司直金克忸等上書。 略曰:
臣父久柄國鈞, 執正不阿, 小人陰忌, 勢所必至。 凡有陷君子者, 不得售奸於白日之下, 則必爲飛謗, 以惑朝廷之視聽。 故律文只 "坐隱匿姓名文書告言人罪者, 而被告者不坐" 獨於臣父, 擧此飛語, 論以實事, 諡臣父, "述義不克," 是豈公論乎? 且父之於子, 兄之於弟, 雖曰: "骨肉之親," 然子之犯無與於父, 弟之犯無與於兄。 故丹朱之惡, 不能累帝堯之德, 管、蔡之惡, 不能累周公之聖。 獨於臣父, 擧此弟壻之犯, 論以實德, 加以惡諡, 亦豈公論乎? 奉常不能的言某事是臣父之失, 而但擧飛語之謗、弟壻之犯, 以爲議諡之實, 其於紀實何? 其於垂式何? 臣父死得謬諡, 抱冤地下, 只以幽明之隔, 未得自伸於白日之下, 目必不暝。 則臣等分父之體, 而未得伸父之冤, 於聖明之下, 尙爲人乎? 伏惟聖慈, 特改一丁字, 非但臣父子, 得伸其冤, 公道亦賴之以明。
命示領敦寧以上。 鄭昌孫、韓明澮議: "世宗嘗傳曰: ‘宰相行實, 善惡相半, 取其善者定諡。’ 今國光之諡丁字, 雖非至惡, 然非美諡。 古事與我朝, 皆有改諡之例, 命改正, 何如?" 沈澮、尹弼商、洪應、李克培、盧思愼、尹壕議: "國光逮事聖朝, 而功績亦著, 世祖朝, 雖有一時飛謗, 豈可盡以爲實? 大抵久柄國政者, 毁、譽兼之。 臣等以謂: ‘奉常旣已議啓, 不可全改,’ 但議上字數非一, 其中擇而用之, 何如?" 傳曰: "今觀宣城議云: ‘晟之事與戾太子事不同, 改之無妨。 此非正大之論也。 戾太子當武帝之存, 阻兵以叛。 今晟雖自家之婢, 擅殺無忌, 輕蔑君上矣。 且諡號, 公論所定, 今若收議而改之, 則後之欲改祖父之諡者, 將紛然而起, 不可開端。 且金國光之諡, 政院意何如?" 都承旨金宗直、左承旨權健、右承旨成健啓曰: "臣等前在弘文館時, 已啓以不可改之意。" 左副承旨韓儧、右副承旨安琛、同副承旨李世佑啓曰: "奉常旣已定諡, 不可改也。" 傳曰: "予若改之, 則昌原君, 於予叔父, 當先改之, 然諡號公論所在, 一開其端, 末路難禁, 竝勿改。"
- 【태백산사고본】 26책 17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632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註 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