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추부사 성임의 졸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임(成任)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輟朝)·조제(弔祭)를 상례(常例)대로 하였다. 성임의 자(字)는 중경(重卿)이고 자호(自號)는 일재(逸齋)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지중추부사 성염조(成念祖)의 아들이다. 정통(正統)683) 무오년684) 에 사마시(司馬試)685) 에 입격(入格)하고, 정묘년686)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에 분속(分屬)되었다가, 얼마 안 가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초배(超拜)되었다. 경태(景泰)687) 경오년688) 에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에 오르고, 임신년689) 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제배(除拜)되고, 갑술년690) 에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에 오르고, 을해년691) 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옮겼다. 천순(天順)692) 정축년693) 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고, 중시(重試)694) 에 입격하여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에 초수(超授)되고, 조금 있다가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로 옮기고, 무인년695) 에 문신 정시(文臣庭試)696) 에 으뜸을 차지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탁배(擢拜)되고, 기묘년697) 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옮겼다가, 곧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배되고, 여러 번 옮겨서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신사년698) 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초승(超陞)하고, 임오년699) 에 공조(工曹)로 옮겼다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이배(移拜)되고, 갑신년700) 에 외임(外任)으로 나가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가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체배(遞拜)되고, 성화(成化)701) 을유년702) 에 인수부 윤(仁壽府尹)에 제배되고, 병술년703) 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제배되고, 발영시(拔英試)704) 에 입격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가자(加資)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으며, 정해년705) 에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로 옮겼다가 얼마 안 가서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옮기고, 무자년706) 에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고, 신묘년(辛卯年)707) 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옮기고, 병신년708) 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재배되었다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체배되고, 임인년709) 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제배되었다가 얼마 안 가서 병 때문에 도로 지중추부사에 제배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는데, 64세이었다. 문안(文安)이라고 시호(諡號)하니,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관유(寬裕)하고, 화평(和平)한 것을 안(安)이라 한다. 성임의 사람됨은 도량이 너그럽고 넓으며, 식견이 정교하고, 넓으며,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지었는데, 율시(律詩)에 더욱 능하였다. 일찍이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본떠 고금의 기이한 소문을 편집하여 《태평통재(太平通載)》라 이름하였는데, 세상에 내어놓았다. 아들 성세명(成世明)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아우 성간(成侃)·성현(成俔)은 다 문명(文名)이 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성임은 성질과 도량이 활달하고, 문장이 화려하며 풍족하여 참으로 큰 그릇이었다. 다만 강직한 행실이 없고 산업을 경영하는 데에 힘썼으며, 일찍이 전형(銓衡)을 맡았을 때에 뇌물을 받았다는 비평이 있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169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618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출판-서책(書冊)
- [註 683]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 때의 연호.
- [註 684]
무오년 : 1438 세종 20년.- [註 685]
사마시(司馬試) : 고려와 조선조 때의 과거 제도의 하나.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소과(小科)로,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로 나뉨.- [註 686]
정묘년 : 1447 세종 29년.- [註 687]
경태(景泰) : 명나라 경제(景帝) 때의 연호.- [註 688]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註 689]
임신년 : 1452 문종 2년.- [註 690]
갑술년 : 1454 단종 2년.- [註 691]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註 692]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이 다시 즉위하였을 때의 연호.- [註 693]
정축년 : 1457 세조 3년.- [註 694]
중시(重試) : 이미 과거에 급제한 조정의 관리들에게 다시 보이던 시험. 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정3품 당상관(堂上官)에 승진 시켰음.- [註 695]
무인년 : 1458 세조 4년.- [註 696]
문신 정시(文臣庭試) : 임시 과거(臨時科擧)의 하나. 임금의 특명으로 이미 등용되어 있는 당상(堂上) 정3품 이하의 문신에게 보이는 과거. 시험 과목은 제술(製述)을 주로 하였는데, 정원은 없고 실력에 따라 합격시켰으며 합격자는 장래 더욱 중용되었음. 특별히 궁전의 뜰에서 시험을 보이므로 정시라 하였음.- [註 697]
기묘년 : 1459 세조 5년.- [註 698]
신사년 : 1461 세조 7년.- [註 699]
임오년 : 1462 세조 8년.- [註 700]
갑신년 : 1464 세조 10년.- [註 701]
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 때의 연호.- [註 702]
을유년 : 1465 세조 11년.- [註 703]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註 704]
발영시(拔英試) : 조선조 세조 때 임시로 베푼 과거. 세조 12년(1466) 단오절에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을 모아 술을 내려 주고 친히 글을 지으며 베풀었는데, 이때 선발에 합격한 사람은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김수온(金守溫) 등 모두 40인 이었음. 대개 재상(宰相)이 시험에 나아간 것은 발영시로부터 비롯되었고 종친이 시험에 나아간 것은 등준시(登俊試)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함.- [註 705]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註 706]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註 707]
○知中樞府事成任卒。 輟朝, 弔祭如例。 任字重卿, 自號逸齋, 昌寧人, 知中樞府事念祖之子。 正統戊午, 中司馬試。 丁卯, 中文科, 初屬承文院, 未幾, 超拜承政院注書。 景泰庚午陞成均主簿, 壬申拜兵曹佐郞, 甲戌陞集賢殿副校理, 乙亥遷吏曹正郞。 天順丁丑, 直藝文館, 中重試, 超授判軍器監事, 俄遷判司宰監事。 戊寅, 魁文臣庭試, 擢拜通政僉知中樞府事。 己卯, 遷工曹參議, 尋拜承政院同副承旨, 累轉爲都承旨。 辛巳超陞嘉靖吏曹參判, 壬午遷工曹移拜中樞(副使)〔府事〕 。 甲申, 出爲全羅道觀察使, 遞拜刑曹參判。 成化乙酉, 拜仁壽府尹。 丙戌, 拜戶曹參判, 中拔英試, 加資憲刑曹判書。 丁亥, 移中樞府知事, 俄遷吏曹判書。 戊子加正憲, 辛卯移工曹判書。 丙申, 拜開城府留守, 遞拜知中樞府事。 壬寅, 拜議政府左參贊, 未幾以疾還, 拜知中樞府事。 至是卒, 年六十四。 諡文安, 博聞多見: ‘文;’ 寬裕和平 ‘安。’ 任, 爲人器度寬洪, 識見精博, 善書工文, 尤長於律詩。 嘗倣《大平廣記〔太平廣記〕 》, 編輯古今異聞, 名曰: 《大平通載〔太平通載〕 》, 行于世。 子世明, 中文科, 弟侃、俔皆有文名。
【史臣曰: "任, 性度豁達, 文詞華贍, 眞偉器也。 但無剛直之行, 務營産業, 嘗典銓衡, 有納賄之譏。"】
- 【태백산사고본】 25책 169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618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출판-서책(書冊)
- [註 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