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 후 지평 한건 등과 위장 김유완의 체직·영안도의 양전 등을 논의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지평 한건(韓健)이 아뢰기를,
"근일 김유완(金有完)을 위장(衛將)으로 삼았으나, 위장은 군사를 거느리고 근시(近侍)하므로 직임이 지극히 중대한데, 김유완은 전에 삭주(朔州)를 맡았을 때에 자못 탐오(貪汚)로 알려졌고 또 장연(長淵)·숙천(肅川)을 맡아서도 다 폄출(貶黜)되었으며, 또 위장에서 갈린 지 오래지 않아 곧 제수(除授)되었으니, 미편(未便)합니다. 김거(金琚)는 전에 강릉 판관(江陵判官)을 맡아서 자기 이익만을 꾀하고, 관가의 일을 삼가지 않았고, 신천 군수(信川郡守)가 되어서는 또 염개(廉介)651) 가 없어 태감(太監) 정동(鄭同)에게 부탁하여 당상관(堂上官)에 올랐습니다. 갈려 온 뒤에는 외임(外任)이 되기를 바라서 청송 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수령(守令)이 되기를 바란 데에는 사정(私情)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장은 과연 중요한 직임이므로 마땅하지 않은 사람을 쓸 수 없으니, 김유완이 과연 그대 말과 같다면 개정하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러나 애매하지 않은가? 김거의 불법은 어느 일인가? 김거가 정동에게 청하지 않았더라도, 정동이 스스로 청하였을 것이다. 다만 사헌부(司憲府)에서 김거가 외임을 바랐다 하였으니, 어찌 들은 것이 없이 말하였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관직(官職)을 차지하는 것과 남의 청탁을 듣는 것은 다 죄가 있다. 또 수령이 되려고 청한 데에는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며, 수령에서 갈린 지 오래지 않은 자는 외임에 서용(敍用)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법이 있는데, 이것은 노고와 안일을 고르게 하려는 것이다. 다만 그럴듯한 허물을 주워 모으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다. 김거가 청탁한 정상을 사헌부에 말한 자가 있을 것이니,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정성근(鄭誠謹)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어필(御筆)로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써서 한명회(韓明澮)에게 내리셨는데, 한명회가 인쇄하여 널리 펴서 거리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 뒤에 옳지 않다고 말한 자가 있으므로 전하께서 죄다 거둬들이게 하셨는데, 요즈음에 또 병풍을 써서 한명회에게 내리고, 또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써서 승정원에 내려 벽에 걸게 하셨습니다. 글씨나 그림이 해롭지 않은 듯은 하나, 줄곧 좋아하여 뜻을 두면 도덕(道德)을 이지러지게 하는데, 더구나 만기(萬機)652) 에 어찌 무방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루원기는 다른 저술의 유가 아니고 경계한 말이다. 그러나 비난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어 승정원에 물으니, 승정원에서 무방하다고 하므로 썼다. 내 필법(筆法)은 매우 졸렬한데, 어찌 뽐내느라고 하였겠는가? 한 정승(韓政丞)이 병풍을 써 달라고 청한 지 이제 벌써 5, 6년이 되었는데, 이미 허락하였으니 신의를 잃을 수 없었다. 예전에 위(魏)나라 문후(文侯)는 우인(虞人)과의 기약을 어기지 않았는데,653) 더구나, 대신(大臣)과 말을 하고서 그것을 저버리겠는가? 옛 임금도 서적(書蹟)이 있거니와, 내가 이것 때문에 정사(政事)를 폐기한다면 말하는 것이 옳겠으나, 내가 늘 글을 읽다가 지루하면 글씨를 쓰고 글씨를 쓰다가 지루하면 글을 읽는데, 어찌 줄곧 거기에 생각을 두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또 문묵(文墨)654) 을 일삼지 않으면 다시 무엇을 일삼겠는가?"
하자, 지사(知事) 허종(許琮)이 아뢰기를,
"일장일이(一張一弛)655) 는 문(文)·무(武)656) 의 도리이니, 때때로 글씨를 쓰는 것은 무방합니다마는, 문묵에 뜻을 향하게 되면 안될 것입니다. 옛 임금 중에는 부시(賦詩)를 좋아하다가 나라를 망친 이가 있으니, 정성근이 말한 것은 대개 조짐을 막으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조짐은 기를 수 없으니, 막는 것은 참으로 마땅하다."
하자, 영사(領事) 심회(沈澮)가 아뢰기를,
"이것은 놀이삼는 글이 아니고 경계하는 글이니, 써도 무방하겠습니다."
하였다. 허종이 또 아뢰기를,
"듣건대 이제 영안도에 양전(量田)657) 할 것이라 합니다. 북청(北靑)·길성(吉城)·회령 등지는 거의 다 향화인(向化人)이 모여들어 산밭을 일구어 생업을 삼는데, 이제 양전한다면 저들이 동요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세조조에 저들 중에서 청암리(靑巖里)에 와서 사는 자가 있었는데, 양전한다는 말을 듣고 온 가족이 돌아갔으므로, 세조께서 이를 듣고 중지하셨다 합니다. 또 호패(號牌) 때문에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선동하였거니와, 저 도의 인심은 본디 완악하여 의혹을 일으키기 쉬우므로, 이제 양전한다면 틀림없이 서로 놀랄 것이니, 후회가 있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조(該曹)에서 영안도에 먼저 양전해야 한다고 하므로 내가 따랐는데, 과연 경(卿)의 말과 같다면 놀라 동요할 걱정이 있을까 염려되니, 멈추도록 하라."
하였다. 심회가 아뢰기를,
"경기(京畿)·하삼도(下三道)는 양전한 지 이미 오래 되어서 혹 지형이 바뀌어 전지(田地)의 형상을 이루지 못한 곳도 있는데, 올해에는 경기의 농사가 조금 잘되었으니, 양전하여 경계를 바루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안된다."
하였다. 허종이 또 아뢰기를,
"만포(滿浦)는 저들이 왕래할 때에 처음 닿는 땅이므로 귀순하는 자들이 잇달아서 끊이지 않습니다. 변장(邊將)이 술과 고기를 먹이기도 하고 쌀과 소금을 주기도 하여, 한정이 있는 물건으로 끝이 없는 요구에 응하니, 이것은 임시로 변통하는 계책이고 장구한 도모가 아닐 듯합니다. 뒤에 만약 이어 가기가 어려워서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분노하고, 원망하여 장차 닥칠 폐단을 거의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니, 신의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매우 염려되어 견딜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과연 옳다. 나도 이것을 염려한 지 오래 되었다. 저들이 오는 것은 절제사(節制使)를 보기 위한 것이거나 상사(喪事)에 부물(賻物)을 요구하기 위한 것인데, 물리치면 말썽을 꾸미게 될 것이고, 낱낱이 들어준다면 그 욕심을 채워주기 어려울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변장이 여러 가지로 타이르고, 혹 이미 주었는데도 다시 청하거든 임시방편으로 말하여 들어주지 않는 것이 어떠할까 한다."
하자, 허종이 아뢰기를,
"저들의 마음은 믿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정성을 바치는 듯 하여도 속으로는 개·돼지같은 마음을 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의 마음은 믿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제 바야흐로 낯을 대하고 순종을 보이면, 우리로서는 미리 헤아려서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니, 오직 변장이 임시하여 선처하기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하자, 허종이 아뢰기를,
"만포는 참으로 야인(野人)이 바라보는 곳이므로 예전부터 반드시 당상관(堂上官)을 절제사(節制使)로 삼았으니,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를 차출하여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섬(李暹)이 지금 절제사로 있는데 내가 여러 번 본도(本道)에서 아뢴 것을 보건대, 그 야인을 접대하는 것이 거의 착오가 없다. 이런 사람이면 넉넉히 그 곳을 진어(鎭禦)할 것인데, 어찌 반드시 당상관이라야 하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169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614면
- 【분류】외교-명(明) / 역사-고사(故事)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농업-양전(量田) / 농업-개간(開墾) / 농업-농작(農作) / 호구-호적(戶籍)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어문학-문학(文學) / 예술-미술(美術) / 외교-야(野)
- [註 651]염개(廉介) : 청렴하고 결백함.
- [註 652]
만기(萬機) : 임금의 온갖 정무(政務).- [註 653]
위(魏)나라문후(文侯)는 우인(虞人)과의 기약을 어기지 않았는데, :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우인(虞人:동산 관리자)과 사냥하기로 약속하고서 그날 술을 마시고 즐겼는데, 마침 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문후가 나가려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오늘은 술을 마셔 즐거우며 또 비가 내리는데, 공(公)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하자, 문후가 말하기를, "내가 우인과 사냥을 하려고 약속을 하였는데, 아무리 즐겁기는 하지만 어찌 약속을 지키지 않겠는가?" 하고, 떠난 고사임.- [註 654]
문묵(文墨) : 시문(詩文)을 짓거나 서화(書畫)를 그리는 일.- [註 655]
일장일이(一張一弛) : 활 시위를 죄었다 늦추었다 한다는 뜻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백성을 적당히 쉬게 하며 혹은 엄하게 하고, 혹은 너그럽게 하여야 한다는 말임.- [註 656]
문(文)·무(武) : 문왕과 무왕.- [註 657]
양전(量田) : 전지를 측량함.○壬戌/御經筵。 講訖, 持平韓健啓曰: "近日以金有完爲衛將。 衛將將兵近侍, 職任至重。 有完曾任朔州, 頗以貪墨聞, 又爲長淵、肅川, 皆見貶黜, 且遞衛將不久, 而旋卽除授, 未便。 金琚前任江陵判官, 只營己利, 不謹官事, 及爲信川郡守, 又無廉介, 托於太監鄭同, 陞堂上官。 遞來後, 求爲外任, 得拜靑松府使, 其求爲守令, 必有情。 請竝改正。" 上曰: "衛將, 果是重任, 不可用非其人, 有完果如爾言, 改之何難? 然無乃曖昧乎? 金琚不法, 何事耶? 琚雖不請於鄭同, 同自請之矣。 但憲府謂: ‘琚求爲外任’, 豈無所聞而云? 然自占官職與聽人請托, 皆有罪。 且請爲守令, 必有求利之心, 遞守令未久者, 勿敍外任, 已有法, 是欲均勞逸也。 但捃摭疑似之愆, 予所不忍也。 金琚請托之狀, 必有言於憲府者。 其鞫以啓。" 侍講官鄭誠謹啓曰: "曩者御書《滕王閣序》, 賜韓明澮, 明澮鋟梓廣布, 遍於街巷。 其後有言不可者, 殿下悉令收入, 今者又書屛風, 以賜明澮。 且書《待漏院記》, 賜政院, 揭壁書。 書畫雖若無害, 然一向好着, 虧損道德, 況於萬機, 豈無妨乎?" 上曰: "《待漏院記》, 非他著述之比, 乃規警之語也。 然慮有非之者, 問諸政院, 政院以爲無妨, 故書之。 予之筆法甚拙, 豈誇張而爲耶? 韓政丞請書屛風, 今已五六年矣, 業已許之, 不可失信。 昔魏 文侯不失虞人之期, 況與大臣言, 而負之乎? 古之帝王, 亦有書蹟, 予若以此, 而廢棄政事, 則言之可也, 予常讀書, 倦便書字, 書字倦又讀書, 豈一向着意而然乎? 且不事文墨, 更爲何事?" 知事許琮啓曰: "一張一弛, 文、武之道, 有時書字無妨, 但於文墨向意, 則不可。 古之人君, 有好賦詩, 而亡國者焉。 誠謹所言, 蓋欲防之於漸也。" 上曰: "此漸不可長也, 防之固宜。" 領事沈澮曰: "此非玩戲之書, 乃箴規之書, 則書之無妨矣。" 琮又啓曰: "聞今將量田永安道。 北靑、吉城、會寧等處, 率皆向化之淵藪, 而起耕山田, 以資生業, 今若量田, 彼必動搖。 臣聞 ‘世祖朝, 有彼人來居靑巖里者, 聞量田, 擧族還去, 世祖聞之乃止。’ 且以號牌之故, 李施愛煽亂, 彼道人心本頑愚, 易生疑惑。 今若量田, 必相驚駭, 恐有後悔。" 上曰: "該曹以爲: ‘永安道, 宜先量田’, 故予從之。 果如卿言, 慮有驚動之患。 其停之。" 沈澮曰: "京畿下三道, 量田已久, 或陵谷變遷, 不成田形。 今年京畿農事稍豐, 宜量田, 以正經界。" 上曰: "不可。" 琮又啓曰: "滿浦, 乃彼人往來初面之地, 歸順者絡繹不絶。 邊將或饋酒肉, 或贈米鹽, 以有限之物, 應無窮之求, 是乃姑息之計, 恐非長遠之圖也。 後若難繼, 少不如意, 則彼必憤怨, 將來之弊, 殆不可救。 臣每念及此, 不勝痛慮。" 上曰: "卿言果是。 予亦慮此, 久矣。 彼人之來, 或以謁見節制使, 或以喪事求賻, 拒之則必搆釁隙, 如其一一聽從, 則其欲難盈。 予意以爲: ‘邊將多般開諭, 如或已給, 而再請則權辭勿從’, 何如?" 琮曰: "彼人之心, 不可信也。 外若投誠, 內懷犬、豕之心。" 上曰: "彼人之心, 縱曰難信, 今方向面効順, 則我不可逆料, 而拒之也。 惟在邊將臨時善處而已。" 琮曰: "滿浦, 實野人觀(贍)〔瞻〕 之地, 自古必以堂上官爲節制使。 請以有位望者差遣。" 上曰: "李暹今爲節制使, 予屢見本道所啓, 其接待野人, 略無差誤。 如此人, 足以鎭禦此地矣, 何必堂上官乎?"
- 【태백산사고본】 25책 169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614면
- 【분류】외교-명(明) / 역사-고사(故事)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농업-양전(量田) / 농업-개간(開墾) / 농업-농작(農作) / 호구-호적(戶籍)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어문학-문학(文學) / 예술-미술(美術) / 외교-야(野)
- [註 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