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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66권, 성종 15년 5월 21일 정미 2번째기사 1484년 명 성화(成化) 20년

평안도·황해도의 역로 운용 방식에 대해 논의하다

정창손(鄭昌孫)이파(李坡)가 의논하기를,

"평안도는 원래 향리(鄕吏)가 매우 적고 지금 이(吏)라고 이름하는 자들도 모두 임시입니다. 그러나 임시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한 고을의 대소사(大小事)를 그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경에 가는 행차에 짐바리를 전담하고 있는데, 지금 만약 관군(館軍)에 분속시키면 남은 것이 얼마 안되어서 본관의 향역(鄕役)이나 북경으로 가는 짐바리를 누가 담당하겠습니까? 있는 자들도 이미 감당하지 못하여 날이 갈수록 쇠잔해 가는 형편이어서 저것을 빼앗아 여기에 주고 동쪽 것을 헐어다가 서쪽을 보충함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장차 평안도 한 도는 모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군호(軍戶)·관군(館軍)에는 폐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득이한 것으로서 어찌 작은 폐단을 헤아리겠습니까? 저들은 모두 양인(良人)인데 천역(賤役)을 하고 있으며, 또 개통(開通)477) 의 길도 없으니, 그 마음을 위로할 수도 없습니다. 원하건대 공로를 가려서 벼슬길을 열어 주고 기름진 전토(田土)도 주어 소생하여 살게해 줌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군호(軍戶)·관군(館軍)을 제외시키면 서도(西道)의 역로(驛路)는 다시 일으킬 묘책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이보다 앞서 향리(鄕吏)가 관역(館役)을 할 때에 북경으로 가는 짐바리와 본관(本官)의 역사(役事)를 한 몸으로 겸했으므로 힘겨웠었는데, 군호(軍戶)로 관역을 하게 한 후부터 향호(鄕戶)의 마음에는 스스로 그 역(役)을 영원히 면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일 다시 정한다면 반드시 원한이 생겨서 장차 도망하여 흩어지게 될 것이니, 향리와 관군(館軍)을 다 잃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어천도(魚川道)의 각참(各站)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모두 군호로써 관리하고 있었으니, 군호(軍戶)·관역(館驛)의 법을 고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고치려다가 폐단이 생기기보다는 예전대로 두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평안도(平安道)의 관로(館路)에 군호(軍戶)를 전용(專用)하면 군액(軍額)이 감소할 것이니, 전대로 향호(鄕戶)를 병용(竝用)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서거정(徐居正)·한치례(韓致禮)·어세공(魚世恭)·어세겸(魚世謙)·홍이로(洪利老)·홍귀달(洪貴達)·성준(成俊)은 의논하기를,

평안 일로(一路)에는 본래 역리(驛吏)가 없었습니다. 이보다 앞서서는 향호를 쓰기도 하고, 향호와 군호를 섞어 쓰기도 하였었는데, 폐단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주 군호로 정하여 시행하였으나 폐단이 없었으니, 다시 고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권찬(權攅)·이극증(李克增)·이세좌(李世佐)·이경동(李瓊仝)·김승경(金升卿)은 의논하기를,

"평안도의 참로(站路)에는 이보다 앞서서는 오로지 향호(鄕戶)로만 공역(供役)을 번갈아 정하다가 중간에 와서 군호(軍戶)를 병용하여 공역(供役)을 윤차(輪次)로 정하였으므로, 노역하고 쉬는 것이 고르게 되어 홀로 그 노고를 받는 폐단이 없었습니다. 지금 향호(鄕戶)를 제거하고 다만 군호(軍戶)로만 영구히 정한다면, 한편으로 돌려가며 휴식함이 없어지고 또 한편으로 양인(良人)이 천인으로 들어가는 원한이 있을 것입니다. 또 지금 영구히 정해진 자가 그 노역을 감당하지 못하여 점점 흩어지게 되면, 부득이 군호(軍戶)에서 뽑아내어 그것을 채울 것이니, 그렇게 되면 방위가 가장 중요한 곳에 군호(軍戶)가 날로 줄어들 것이므로,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전례에 의하여 향호와 군호를 겸용하여서 돌려가며 차역(差役)시킴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군호(軍戶)는 본래 양민(良民)이었고 향호(鄕戶)는 본래 천민(賤民)이었는데, 지금 양민으로 천역(賤役)을 하게 함은 옳지 못하다. 더구나 당초에 이미 향호로 역사에 붙이게 하였는데, 지금 향호와 군호를 겸용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당초에 향호로 정한 것이 폐단이 있어서 군호로 고쳐 정했는데, 지금 다시 고친다면 반드시 소요스러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향호를 역(驛)에 소속시킴은 이미 옛부터의 법이고, 더구나 본도(本道)는 방어를 맡고 있는 곳이니, 군사가 단약(單弱)해서는 안되는데,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아도 향호와 군호를 겸용하지 않을 수 없겠다. 다시 물어보도록 하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군호를 역에 소속시켜 행한 것이 오래 되지 아니하였으나 폐단은 없으니, 그들이 비록 원망한다 하더라도 뚜렷이 억울함을 호소한 자도 없습니다. 청컨대 이를 점차 시행하여 우선 3, 4년을 기다려 보고 폐단이 있으면 그런 후에 다시 고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허종(許琮)·이파(李坡)가 아뢰기를,

"신 등은 그 도(道)의 일을 자세히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향호는 본 고을의 역사에도 제공되고 또 북경으로 가는 짐바리 운반에도 제공되고 있으니, 한 몸으로 두가지 역사를 겸한 자가 아주 많습니다. 방어하는 일도 긴요한 일이지만 역로(驛路) 또한 가장 긴요하니, 그대로 옛날과 같이 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여러 사람의 논의가 이와 같으니, 그대로 옛날과 같이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166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593면
  • 【분류】
    교통-육운(陸運) / 사법-법제(法制) / 신분-중인(中人) / 신분-신량역천(身良役賤)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외교-명(明)

  • [註 477]
    개통(開通) : 벼슬길이 열림.

鄭昌孫李坡議: "平安道, 元來鄕吏甚少, 今名爲吏者, 皆假也。 然假之旣久, 故一鄕大、小事, 彼皆辦之。 又赴京之行, 專供騎駄, 今若分屬館軍, 則所餘無幾, 其本館鄕役, 赴京騎駄, 伊誰辦之? 存者旣不能堪, 日就凋殘, 奪(皮)〔彼〕 與此, 破東補西而已, 將擧平安一道, 而盡棄之也。 軍戶、館軍, 弊亦有之。 然不得已耳, 何計其小弊哉? 彼皆良人也, 役之旣賤, 而又無開通之路, 則無以慰其心。 乞揀功勞, 俾通仕路, 給膏膄之田, 使之蘇活爲便。 若除軍戶、館軍, 則西道驛路, 興復無術。" 韓明澮沈澮尹弼商許琮議: "前此鄕吏館役之時, 其赴京騎駄及本官之役, 一身兼之, 黽勉當之。 自軍戶館役之後, 鄕戶之心, 自以爲永免其役。 今若復定, 則必生怨咨, 將至逃散, 鄕吏、館軍, 兩失之矣。 且如魚川道各站, 自古及今, 皆以軍戶爲之, 軍戶、館驛之法, 不可更改。 與其更張而生弊, 不如仍舊。" 尹壕議: "平安館路, 專用軍戶, 則軍額減少, 依前用鄕戶, 何如?" 徐居正韓致禮魚世恭魚世謙洪利老洪貴達成俊議: "平安一路, 本無驛吏, 前此或用鄕戶, 或雜用鄕戶與軍戶, 而不能無弊。 故今以軍戶永定, 行之無弊, 不必更改。" 權攢李克增李世佐李瓊仝金升卿議: "平安道站路, 前此專以鄕戶, 輪定供役, 中間竝用軍戶, 亦輪次立役, 故緊歇均齊, 無獨受其苦之弊。 今則除鄕戶, 只以軍戶永定, 一則無輪番休息之期, 一則有由良入賤之冤。 且今永定者, 不勝其役, 漸至流亡, 則不得已抽出軍戶以實之, 如此, 則防戍最緊之地, 軍戶日蹙, 甚非細故。 依前例, 兼用鄕戶、軍戶, 輪次差役, 何如?" 傳曰: "軍戶本是良民, 鄕戶本是賤人, 今以良民, 供賤役未便。 況當初旣以鄕戶屬役, 今兼用鄕軍戶, 何如?" 僉啓曰: "當初以鄕戶定之, 而有弊, 故今若更改, 則必有騷擾之弊。" 傳曰: "以鄕戶屬驛, 旣是古法, 況本道防禦之地, 軍士不可單弱, 反覆籌之, 不可不兼用鄕戶與軍戶。 其更問之。" 僉啓曰: "軍戶屬驛, 行之未久而無弊, 彼雖怨咨, 無有顯然訴怨者。 請行之以漸, 姑待三四年, 有弊然後更改, 何如?" 許琮李坡啓曰: "臣等於彼道之事, 備嘗知之。 鄕戶則供本邑役, 又供赴京騎駄, 一身兼役者頗多。 防禦雖緊, 驛路亦是最緊, 仍舊爲便。" 傳曰: "群議如是, 其仍舊施行。"


  • 【태백산사고본】 25책 166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593면
  • 【분류】
    교통-육운(陸運) / 사법-법제(法制) / 신분-중인(中人) / 신분-신량역천(身良役賤)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