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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66권, 성종 15년 5월 18일 갑진 3번째기사 1484년 명 성화(成化) 20년

평안도의 역로·향호·군호·입마의 편부를 의논하게 하다

평안도(平安道)의 역로(驛路)·향호(鄕戶)·군호(軍戶)·입마(立馬)의 편부(便否)를 일찍이 그 도(道)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지낸 이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화천군(花川君) 권감(權瑊)이 의논하기를,

"역리(驛吏)의 노역(勞役)은 비록 천직(賤職)이나 신분은 양인(良人)이므로, 천한 노비와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병(騎兵)·보병(步兵)을 관군(館軍)으로 충당하여 수년간 행하여 왔으나 별로 큰 폐단이 없었으니, 다시 고침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문형(鄭文炯)·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숭원(李崇元)·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지경(金之慶)은 의논하기를,

"평안도(平安道)의 관군(館軍)은 처음에 여러 고을의 향리(鄕吏)로 돌아가며 정하였는데, 그 후에 향리 및 기병(騎兵)·보병(步兵)이 서로 반씩 돌아가며 정하였고, 지금은 향리로만 담당하게 하였는데, 북경에 가는 짐을 운반함이 그 관군의 일이므로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병·보병 및 갑사(甲士)의 자손들 중에서 관직이 있는 사람이나 음직(蔭職)이 있는 자손 외에 부실(富實)한 사람을 택하여 영구적인 관군으로 정하고 벼슬길도 터놓고 있습니다. 본도(本道)의 기병·보병은 본래 다른 부류가 아니고 부실(富實)한 자로서 말이 있으면 기병이 되고, 고단하며 말이 없으면 보병이 되는데, 모두 의관(衣冠)의 집안이 아니고 다만 그 빈부(貧富)에 따라서 오늘은 기병이 되고 내일은 보병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기병을 의관의 부류라고 하여 관군(館軍)으로 정하지 않는다면 관군으로 정한 자는 모두 가난한 부류가 되어 마침내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그대로 전과 같이 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또 관마(館馬)의 필(匹)수가 비록 다른 도(道)보다 많으나, 본도(本道)의 관군(館軍)은 다른 도의 기름진 땅을 많이 점유하고 있는 자와 다릅니다. 또 본래 역리(驛吏)가 아니어서 그 처음에 넉넉하게 인원 수를 정하였었는데, 지금 만일 감액(減額)하게 된다면 관군이 된 자는 날로 도망하여 그 폐단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옛날대로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으며,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김약균(金若鈞)은 의논하기를,

"향호(鄕戶)는 요동(遼東) 왕래의 영송(迎送)과 본관(本官)의 역사(役事)에 고생하므로, 계묘년466) 에는 실군(實軍)이 있는 3호(戶)로 1호를 삼았고 입마(立馬)467)마위전(馬位田)468) 도 각자의 원(願)에 따라 주었으나, 대로(大路)에는 왕래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臣)의 의견으로는, 사로(斜路) 부근에 각관의 실군호(實軍戶)로써 상반(相半)되게 입마(立馬)시킨다면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공평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전교(傳敎)하기를,

"여러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니, 멀리서는 헤아릴 수가 없다. 당초에 관군을 정할 때 자원에 따랐던가? 지금도 원함에 따라 법을 정함이 어떠하겠는가? 감교청 당상(勘校廳堂上)에게 묻도록 하라."

하였다.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향리(鄕吏)는 향역(鄕役)에 이바지해야지 역(驛)의 일을 겸임(兼任)할 수는 없습니다. 군호에서 뽑아 정하고 부역(賦役)을 면제시켜 전과 같이 함이 좋겠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평안도(平安道) 향리는 부실(富實)한 자가 많으니, 관군의 수를 3분하여 2분은 군호로 정하고 1분은 향호(鄕戶)로 정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모두 아뢰기를,

"만일에 자원함을 들어준다면 모든 사람이 편리한 것만을 취할 것이니, 일이 행하여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홍응(洪應)·노사신(盧思愼)의 말을 가지고,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 및 육조(六曹)의 참판(參判) 이상에게 다시 의논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166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591면
  • 【분류】
    교통-육운(陸運) / 신분-중인(中人) / 신분-신량역천(身良役賤)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농업-전제(田制) / 재정-역(役)

  • [註 466]
    계묘년 : 1483 성종 14년.
  • [註 467]
    입마(立馬) : 각역(各驛)에서 말[驛馬]을 갈아 대어 대기시키던 일.
  • [註 468]
    마위전(馬位田) : 추수한 곡식을 역마(驛馬)의 사육에 쓰기 위하여 설정된 토지.

平安道驛路, 鄕戶、軍戶、立馬便否, 令曾經其道監司、守令者議之。 花川君 權瑊議: "驛吏役雖賤, 身是良人, 非賤隷之比。 故以騎、步兵, 充館軍, 行之數年, 別無巨弊。 更改未穩。" 知中樞府事鄭文烱、吏曹判書李崇元、同知中樞府事金之慶議: "平安道館軍, 初以諸邑鄕吏輪定, 其後鄕吏及騎、步兵相半輪定, 今則以鄕吏獨當, 赴京騎駄, 其館軍之役, 勢不能當。 更以騎、步兵及甲士子枝內有職人、有蔭子孫外, 擇富實人, 永定館軍, 許通仕路。 本道騎、步兵, 本非異類, 富實有馬則爲騎兵, 單獨無馬則爲步兵, 皆不是衣冠之家, 但隨其貧富, 今日爲騎兵, 明日爲步兵。 今以騎兵爲衣冠之流, 勿定館軍, 則定館軍者, 類皆貧寒之流, 終必難堪, 不如仍舊。 且館馬匹之數, 雖多於他道, 然本道館軍, 不如他道多占膏腴田土者之類。 又本非驛吏, 其初從優定額, 今若減額, 則爲館軍者, 日就逃散, 弊不勝焉。 仍舊何如?" 掌樂院僉正金若鈞議: "鄕戶則遼東迎送及本官立役艱苦, 故在癸卯年, 以有實軍三戶爲一戶, 立馬馬位田, 則從自願擇給, 然大路, 則往來者頗多, 難堪其役。 臣意以謂 ‘以斜路附近各官有實軍戶, 相半立馬, 則勞逸適均矣。’" 傳曰: "衆議不一, 不可遙度。 當初定館軍時, 從情願乎? 今亦從願定法, 何如? 其問勘校廳堂上。" 洪應啓曰: "鄕吏則供鄕役, 不可兼任驛事。 以軍戶抄定, 而復其徭役, 仍舊爲便" 盧思愼啓曰: "臣意謂, 平安鄕吏, 富實者多, 館軍數分三分, 二分以軍戶定之, 一分以鄕戶定之, 何如?" 又僉啓曰: "若聽情願, 則人皆從自便, 事不可行。" 傳曰: "其以洪應思愼之言, 更議于領敦寧以上、政府及六曹參判以上。"


  • 【태백산사고본】 25책 166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591면
  • 【분류】
    교통-육운(陸運) / 신분-중인(中人) / 신분-신량역천(身良役賤)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농업-전제(田制)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