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관 부제학 이명숭 등이 안암사 중창이 부당함을 상소하니 불러 하교하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명숭(李命崇)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이 안암사(安巖寺)의 중창(重創)이 불가(不可)하다는 일을 가지고 위로 천청(天聽)을 번독하였더니, 중사(中使)가 전하기를, ‘그대들의 차자(箚子)를 보니 가소(可笑)롭다.’ 하셨는데, 신 등은 이 말의 뜻을 알지 못하나, 중사가 잘못 전한 데에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만약 예지(睿旨)에서 나왔다면 신 등은 그윽이 미혹됩니다. 전하께서 신 등의 말을 취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기신 까닭으로 도외시(度外視)하여 내버려두시고 웃음거리의 자료로 삼으시는 것입니까? 결망(缺望)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정도(正道)를 숭신(崇信)하시고 이단(異端)을 배척하시어, 축수재(祝壽齋)와 같은 것은 비록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인데도 파(罷)하셨으므로,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전하께서 사특하지 않은 데 복을 구하신다는 미덕(美德)을 칭송(稱誦)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어찌 이제 권씨(權氏)가 임금을 위하여 청한 것으로 인해서 사찰(寺刹)의 영건을 윤허하실 줄 헤아렸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미 축수재(祝壽齋)를 파(罷)하시고 이제 사찰의 영건을 허락하셨으니, 어찌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일정하지 않습니까?
권씨(權氏)가 성상을 위하여 사찰을 창건한다는 것은 전하의 복전(福田)을 구(求)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대저 복(福)은 구하여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저들이 어찌 인주(人主)의 복(福)을 알겠습니까? 대개 지치(至治)263) 가 극진하면 천지가 청녕(淸寧)하고 일월(日月)이 정명(貞明)하며, 시국이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곡(百穀)이 홍부(紅腐)264) 하며, 백성에게 요사(夭死)함이 없고 일용(日用)의 음식(飮食)이 풍요하며 사람이 화(和)하고 기운이 화합하여 봉황(鳳凰)과 지초(芝草)의 모든 복된 물건들이 모두 이르지 아니함이 없는데, 무엇이 인주(人主)의 복(福)보다 큼이 있겠습니까? 신 등은 알지 못하나, 부처를 섬기어서 이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주공(周公)이 무일(無逸)265) 의 글을 지어서 성왕(成王)을 경계하며 말하기를, ‘〈옛날 은(殷)나라 왕〉 중종(中宗)이 국운을 누리는 데에는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지나친 안락을 취하지 않았었다.’ 하고, 고종(高宗)이 국운을 누리는 데에는 ‘대소인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원망함이 없었다.’ 하였으며, 조갑(祖甲)266) 이 국운을 누리는 데에는 ‘서민(庶民)을 잘 보호하고 은혜롭게 하여 환과(鱞寡)까지도 업신여기지 않았다.’ 하고, 문왕(文王)이 국운을 누리는 데에는 ‘소민(小民)을 생각하고 환과(鱞寡)를 은혜롭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지 않음이 없어 영년(永年)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알지 못하나, 부처를 섬겨서 이것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조칙하기를, ‘사관(祀官)의 축리(祝釐)267) 는 모두 짐(朕)의 몸에 복이 돌아가게 하고, 백성에게는 관여되지 않으니, 이것은 나의 부덕(不德)함을 중하게 함이다.’ 하고, 그 사관(祀官)으로 하여금 비는 바가 없게 하였으니, 그 백성을 사랑하는 성심(誠心)은 비록 천년(千年) 후에라도 대개 생각할 만합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마땅히 취하여 본받아야 할 것인데, 어찌 백성의 전지를 빼앗아 사찰을 창건하고 한 몸을 위하여 복(福)을 구하겠습니까?
전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옛 터에 중수(重修)함은 《대전(大典)》에 실려 있다.’고 하시었으나, 신 등은 삼가 살펴보건대, 《대전》에 이르기를, ‘무릇 사사(寺社)는 신창(新創)을 허락하지 말라. 오직 옛 터에 중수(重修)하는 것은 양종(兩宗)에 알리어 본조(本曹)에 보고하여서 계문(啓聞)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창건함을 허락하지 말라고 이른 것은 그 근주(根株)268) 와 굴혈(窟穴)을 끊어서 인군(人君)도 없고 아비도 없는 무리로 하여금 방자하게 행할 수 없게 하고자 함이고, 그 계문(啓聞)하라고 이른 것은 윗사람으로 하여금 그 가부(可否)를 참작하게 하고자 함이며, 옛 터에 중수한다는 것은 시비(是非)를 묻지 아니하고 갑자기 허락함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 법에 의거하여서 신 등의 말을 거절하십니까? 정전(丁錢)을 납부하고 도첩(度牒)을 주는 것이 법(法)인데, 이제 영선(營繕)으로 인하여 한 달의 노고로써 반전(半錢)도 수납하지 않고 영원히 도승(度僧)이 된 자가 몇천 명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경성(京城) 안에서 승니(僧尼)로 여염(閭閻)에 유숙(留宿)하는 자는 논죄(論罪)함이 법(法)인데, 이제 중의 무리가 걸량(乞糧) 때문도 아니고 부모(父母)를 뵙는 일 때문도 아니면서 부역(赴役)을 빙자(憑藉)하여 거리에서 천 명 또는 백 명으로 무리를 지어 어깨를 맞대고 소매를 붙잡고서 횡행(橫行)할 뿐 아니라, 또 머물러 묵어도 한 사람이라도 금(禁)하고 한 사람이라도 죄주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반드시 모두 《대전》을 준수(遵守)하는 것도 아닌데 절을 창건하는 데 있어서만은 《대전》을 원용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조정이 개창(開創)한 이래 대대로 각기 법전이 있어, 《원전(元典)》이라 하고 《속전(續典)》이라 하며 《대전》의 금과 옥조(金科玉條)269) 는 때를 따라 마땅하게 제정하여 지극한 이치에 합당하도록 힘쓰지 않음이 없었으니, 만약 선왕(先王)의 법(法)을 준수(遵守)하고 잃을 수가 없다고 한다면, 어찌 변통(變通)하는 도(道)로 논(論)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제 《대전》을 교감(校勘)하고 개정(改正)한 것이 한 가지 뿐만 아니니, 법을 마땅히 먼저 혁파하여야지 〈그 법에〉 의거함은 불가합니다.
전하께서는 또 하교하시기를, ‘본래 민전(民田)이 아니고 절터를 침범하여 경작하였으니, 비록 빼앗아서 주더라도 가(可)하다.’고 하셨으나, 신 등이 또 《대전(大典)》을 살펴보건대, 이르기를, ‘무릇 전택(田宅)을 소송하는 자는 5년을 지났으면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민간에서 경작하여 전지가 된 것은 5년에 그칠 뿐만이 아니고,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자식을 기르는 바탕이 모두 여기에서 판비되는데, 어찌 권씨(權氏)가 청한 것으로 인하여 5년의 법을 폐지하고 백성이 살아가는 생업(生業)을 빼앗아 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옛 터에 중수(重修)하는 것이 《대전》에 실렸다고 하여, 무릇 사사(寺社)의 옛 터는 가부(可否)를 불문(不問)하고 다 중창(重創)을 허락한다면, 신 등은 미혹됨이 점점 더 심합니다. 대개 삼국(三國)·고려(高麗)의 즈음에 사사(寺社)를 영건(營建)함에 끝이 있지 않았으나, 유기(遺基)와 폐지(廢址)270) 는 백성이 모두 개간(開墾)하여 고조(高祖)·증조(曾祖)의 세업(世業)이 되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안암사(安巖寺)의 예(例)를 원용하여 청하기를, ‘모전(某田)은 바로 예전의 모사(某寺)이니, 원컨대 성상을 위하여 중창(重創)하게 하소서.’ 하면, 전하께서 또한 일일이 허락하시겠습니까? 이 문(門)이 한 번 열리면 말류(末流)에는 크게 침범되어, 금년에 한 절을 중창하고 명년에 한 절을 중창하며 또 명년에 한 절을 중창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마지 아니하여 옛터를 다 복구하면, 백성 가운데 직업을 잃는 자가 장차 수(數)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조종(祖宗)께서 백년토록 휴양(休養)하시고 생활하게 하시어 함포 고복(含飽扣腹)271) 하게 한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 아침에 생업을 잃고 떠돌아 다니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면, 이 어찌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또 하교하시기를 ‘3, 4인이 그 곳에 경작하였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3, 4인을 적다고 하여서 빼앗는 것입니까? 대저 천하(天下)는 본래 백성 하나하나가 모인 것이니, 천하를 크다 하고 한 백성을 작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름철에 덥고 비가 오면 소민(小民)272) 은 원망과 탄식을 하고, 겨울에 심한 추위가 와도 또한 원망과 한탄을 합니다. 서민(庶民)은 지극히 어리석어 덮고 비가 오거나 심한 추위가 와도 또 원망과 탄식을 하는데, 하루 아침에 살아가는 생업(生業)을 잃고 한탄(恨歎)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전자에 신 등으로 하여금 역대(歷代)로 불도(佛道)를 물리치는 상소가 내전에 들어온 것을 기록하라고 하시었으니, 대개 전하의 처음 마음은 조석(朝夕)으로 보시고 살피어서 감계(鑑戒)를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부혁(傅奕)의 소(疏)와 고정(高郢)의 서(書)와 손초(孫樵)의 주문(奏文)과 한유(韓愈)의 표문(表文)은 모두 천하(天下)의 충언(忠言)이며 격론(格論)입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겠으나 좌우에 두시고서 보고 살피십니까? 보시고는 케케묵은 말이며 썩은 논설이라고 생각하시어서 〈손을〉 휘두르며 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신 등의 말은 공연한 웃음거리의 자료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항상 말씀하기를, ‘내가 불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나, 근자에 유생(儒生)이 불도를 물리치면 견책(譴責)하여 거두시면서, 큰 중에게 병(病)이 있으면 의원을 보내어서 위문하시며, 사람에게 명하여 불경을 베끼게 할 경우에는 말미를 주어서 보내고, 역승(役僧)이 영선(營繕)하면 도첩을 주어서 중이 되게 하시며, 성상을 위하여 절을 창건하면 전지를 빼앗아 주셨습니다. 이와 같고서도 전하께서 바로 말씀하기를, ‘나도 불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이것은 많은 개를 몰아서 숲속에 나아가게 하면서 이르기를, ‘나는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고, 그물을 잡고 강호(江湖)에 넣으면서 이르기를, ‘나는 고기잡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대개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인신(人臣)의 책무(責務)이며, 간하는 말을 물의 흐름과 같이 따르는 것이 인주(人主)의 미덕(美德)이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하니, 어서(御書)를 승정원(承政院)에 내리기를,
"내가 홍문관(弘文館)의 소(疏)를 보건대, 매우 지나친 문장으로 나를 헐뜯었는데, 비록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뜻을 다하지는 못할 것이니, 내가 인견(引見)하여 말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윽고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홍문 관원(弘文館員)을 불러들여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불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인데, 그대들이 불도를 좋아한다고 여김은 어째서이냐? 안암사(安巖寺)의 중창(重創)은 귀인(貴人) 권씨(權氏)의 상언(上言)을 따랐을 뿐이며, 옛 터에 중창(重創)하는 것은 《대전(大典)》의 법인데, 어찌 권씨(權氏)에게만 이를 금(禁)해야 하겠느냐? 불씨(佛氏)의 허탄하고 망령됨은 내가 환히 아는 것인데, 내가 어찌 부처를 섬기어서 복(福)을 구하려고 하였겠는가? 다만 사사(寺社)의 옛 터를 백성이 몰래 도둑질하여 경작하였다면 법(法)으로 절에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되, 민전(民田)을 빼앗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대들은 경악(經幄)에서 시종(侍從)하는 신하인데도 오히려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외방에 있는 신하로서 어찌 다시 이를 아는 자가 있겠느냐?"
하였다. 이명숭(李命崇)이 아뢰기를,
"신(臣)이 근밀(近密)273) 의 지위에 있으면서 어찌 전하께서 불교를 숭신(崇信)하지 않으심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권씨(權氏)의 청(請)으로 인하여 민전(民田)을 빼앗아 준다면, 무지(無知)한 백성들이 어찌 전하께서 불교를 좋아하지 않으심을 알겠습니까? 이제 만약 이 절을 영건하기를 허락하시면, 옛날의 절터가 자못 많으니, 사람들이 장차 벌떼처럼 일어나서 할 것이므로 조짐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직제학(直提學) 안침(安琛)은 아뢰기를,
"전일에 하교하시기를, ‘사찰(寺刹)을 새로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근원(根源)이 저절로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신 성상의 하교가 지금도 있습니다. 경성(京城) 안에서 절터가 있으니, 만약 옛 터에 중창(重創)하기를 청한다면 전하께서는 그것을 다 따르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전(大典)》의 법(法)은 온 나라에 행하는 것이니, 만약에 준행(遵行)하지 못한다면 입법(立法)한 것을 어디에 쓰겠느냐? 또 소(疏) 가운데 사역하는 중에게 도첩을 주는 일을 말한 것은 전일에 여러 번 내 뜻을 유시하였으니, 이제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중의 무리가 어찌 지금 비로소 머리를 깎은 자이겠느냐? 그리고 의원(醫員)을 보내어 문병(問病)한 일은 양전(兩殿)께서 하교하기를, ‘학조(學祖)가 병(病)으로 고생하니, 의원으로 하여금 진찰하게 하고자 한다.’고 하신 까닭으로 내가 감히 어기지 못했을 뿐이다. 이 중은 세조(世祖)와 정희 왕후(貞熹王后)께서 평소 중하게 대우(待遇)한 자이니, 부모(父母)가 사랑한 것은 비록 개나 말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국가에서 활인서(活人署)를 설치하여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구(救)하는데, 역사하는 중을 총괄하여 감독하는 〈중이〉 병들어 장차 죽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구원하지 않겠느냐? 불경(佛經)을 베낀 일은 본래 양전(兩殿)께서 명한 것이니, 내가 감히 중지시키지 못하였다. 내가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그대들이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하였다. 이명숭이 말하기를,
"대비(大妃)의 명(命)은 전하께서 의당 따르심이 옳으나, 권씨(權氏)가 청(請)하는 것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까? 이제 권씨(權氏)가 성상을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자 함에 전하께서 그대로 따르시고 민전(民田)을 빼앗는 데에 이르렀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어찌 성상의 뜻을 알겠습니까? 전자에 전하께서는 도첩(度牒)이 없는 승인(僧人)은 일체 충군(充軍)하라고 명하시어, 경산(京山)의 사찰(寺刹)이 날로 공허(空虛)하였으므로 중외(中外)에서 서로 경하(慶賀)하였습니다. 이제 이 중에게 도첩을 준 뒤로 승도(僧徒)가 날로 성(盛)하고 따라서 머리를 깎는 자가 무수(無數)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여염(閭閻)에 출입하면서 혹 머물러 묵는 자도 있으니, 신(臣)은 불법(佛法)이 다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권씨(權氏)의 상언(上言)이 비록 임금을 위한다고 일컬었더라도 나는 처음에 알지 못하였다. 내가 어찌 복(福)을 구하도록 하였겠느냐? 중의 무리가 영조(營造)를 빙자하여 성중(城中)에 유숙(留宿)하는 것도 내가 하교하였겠느나? 또 ‘가소(可笑)롭다.’고 말한 것은 어찌 내가 그대들의 말에 웃지 않겠느냐? 안암사(安巖寺)를 중창(重創)함은 내 소위(所爲)가 아닌데, 그대들이 내가 한다고 말한 까닭으로 내가 가소(可笑)롭다고 말한 것이다. 또 소(疏)에 우배창언(禹拜昌言)274) 을 인용하였으니, 내가 그대들의 말을 절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진실로 잘못되었으나, 비록 절하려고 하더라도 마땅히 어느 곳에다 절하겠느냐? 군신(君臣)은 마땅히 서로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인군이 신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신하가 인군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국사(國事)는 날로 잘못될 것이니, 어찌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하고, 승지(承旨) 등을 돌아보고 묻기를,
"옛 터에 중창(重創)함은 《대전(大典)》의 법이 아니냐?"
하니,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
"《대전(大典)》에 이르기를, ‘옛 터에 중수(重修)하는 것은 양종(兩宗)에 알리어 해사(該司)에 보고하여 계문(啓聞)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명숭이 말하기를,
"《대전(大典)》에 비록 있더라도 이제 마땅히 감교(勘校)하여 개정함이 가합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이명숭이 재삼 논계(論啓)하였으나, 임금이 물러나도록 명하고 상량(商量)하기를 세 차례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유생을 구타한 중은 지극히 간악(奸惡)하다. 처음에는 내가 유생(儒生)이 학궁에 있으면서 어찌 중들에게 묶이는 바가 되었을까 의심하였는데, 지금 추안(推案)을 보니, 그 날 학궁에 있었던 유생이 매우 적어서 중들이 난입(闌入)하여 머리를 휘어잡고 때린 것이 명확하다. 조짐을 자라게 할 수는 없으니, 내가 장차 엄하게 징치(懲治)하겠다."
하니, 도승지(都承旨) 김여석(金礪石)이 아뢰기를,
"이는 중이 백주(白晝)에 대도(大都)에서 유생(儒生)의 머리를 휘어잡고 때리면서 구박(驅迫)하며 다니기를 거리낌없이 하였으니,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16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572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법제(法制) / 사상-불교(佛敎) / 재정-역(役)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농업-전제(田制)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군사-군역(軍役) / 건설-건축(建築)
- [註 263]지치(至治) : 이상적으로 잘 다스려진 정치.
- [註 264]
홍부(紅腐) : 곡식이 변질되어 붉게 되는 것을 말함.- [註 265]
무일(無逸)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註 266]
조갑(祖甲) :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아들.- [註 267]
축리(祝釐) : 신(神)에게 제사드리며 복(福)을 기원하는 것.- [註 268]
근주(根株) : 근본.- [註 269]
금과 옥조(金科玉條) : 금이나 옥같이 귀중한 법이나 규정.- [註 270]
폐지(廢址) : 건물을 헐고 난 뒤의 버려둔 빈터.- [註 271]
함포 고복(含飽扣腹) :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림.- [註 272]
소민(小民) : 미천한 백성.- [註 273]
근밀(近密) : 측근.- [註 274]
우배창언(禹拜昌言)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편에 있는 내용으로, 우왕(禹王)은 도리에 합당한 말을 들으면 절하면서 받아들였다는 것임.○弘文館副提學李命崇等上疏曰:
臣等將安巖寺重創不可事, 上瀆天聽。 中使傳曰: "觀汝等箚子, 可笑。" 臣等未知此言出於中使之誤傳耶。 若出於睿旨, 則臣等竊惑焉。 殿下以臣等之言, 不足取, 故置之度外, 而爲戲笑之資耶? 不勝缺望。 殿下崇信正道, 斥去異端, 如祝壽齋, 雖祖宗故事, 亦罷之, 一國臣民, 無不誦殿下求福不回之美德, 豈料今因權氏爲上之請, 許建寺刹乎? 殿下旣罷祝壽齋, 今則許建寺刹, 何操舍之無常也? 權氏之爲上創寺者, 不過爲殿下求福田耳。 夫福非可求得之物也, 彼豈知人主之福哉? 蓋至治之極, 乾坤淸寧, 日月貞明, 時和歲豐, 百穀紅腐, 民無夭折, 日用飮食, 人和而氣和, 鳳凰、芝草諸福之物, 莫不畢臻, 人主之福, 孰有大於此乎? 臣等不知事佛, 而可致此乎。 周公之作《無逸》, 戒成王也, 言中宗之享國, 則曰: "治民祗懼, 不敢遑寧"; 高宗之享國, 則曰: "至于小大, 無時或怨" 祖甲之享國, 則曰: "能保惠于庶民, 不敢侮鰥寡"; 文王之(亨)〔享〕 國, 則曰: "懷小民惠解鰥寡, 無不以愛民, 爲永年之基。" 臣等未知事佛, 而可致此乎。 漢 文帝詔曰: "祀官祝釐, 皆歸福於朕躬, 百姓不與焉, 是重吾不德也。" 其令祀官, 無有所祈。 其愛民之誠心, 雖千載之下, 蓋可想矣。 此殿下所當取則者也, 豈可奪民田創寺, 爲一身求福乎? 殿下敎曰: "重修古基, 《大典》所載。" 臣等謹按, 《大典》云: "凡寺社勿許新創。 唯重修古基, 告兩宗, 報本曹, 啓聞。" 其曰: "勿許創之" 者, 欲絶其根株窟穴, 而使無君、無父之徒, 不得肆行。 其曰: "啓聞" 云者, 欲使上之人, 酌其可否, 而爲之。 非謂修古基者, 則不問是非, 而輒許之也。 殿下何據此法, 以拒臣等之言乎? 納丁錢, 給度牒, 法也。 今因營繕, 以一朔之勞, 不收半錢, 永度爲僧者, 不知其幾千人。 且京城之內, 僧尼留宿閭閻者論罪, 法也。 今僧徒不因乞糧, 不因見父母, 憑藉赴役, 街巷之間, 千百爲群, 肩相磨而袂相連, 不徒橫行, 又止宿焉, 未聞禁一人, 而罪一人也。 以此而觀, 未必盡遵《大典》, 而乃於創寺, 獨援《大典》, 何也? 我朝自開創以來, 代各有典,〔曰〕 元典, 曰《續典》, 曰《大典》, 金科玉條, 莫不因時制宜, 務合至理。 若曰: "先王之法, 遵守而不可失也", 則何足與論變通之道乎? 況今勘校《大典》改正者非一, 此法宜當先革, 而不可據也。 殿下又敎曰: "本非民田, 侵耕寺基, 雖奪而與之, 可也。" 臣等又按《大典》云: "凡訟田宅者, 過五年則勿聽。" 今民之耕爲田者, 非止五年, 其仰事俯育之資, 皆於此而辨焉, 豈可因權氏之請, 廢五年之法, 奪斯民生生之業, 與之乎? 若曰: "重修古基, 《大典》所載", 凡寺社古基, 不問可否, 盡許重(刷)〔創〕 , 則臣等之惑, 滋甚。 蓋三國、高麗之際, 營建寺社, 無有紀極, 遺基廢址, 民皆開墾, 爲高、曾之世業矣。 假有人焉, 援安巖之例, 爲之請曰: "某田卽古之某寺也, 願爲上重創", 則殿下亦一一許之乎? 此門一開, 末流浸大, 今年創一寺, 明年創一寺, 又明年創一寺。 如此不已, 而古基盡復, 則民之失業者, 將不可勝數矣。 使祖宗百年休養生息含飽扣腹之民, 一朝流離失所, 散而之四方, 此豈聖朝之美事乎? 殿下又敎曰: "三四人耕之", 是則殿下以三四人爲小, 而奪之耶? 夫天下, 本一民之積也, 不可以天下爲大, 一民爲小也。 夏暑雨, 小民惟曰: "怨咨", 冬祈寒, 亦惟曰: "怨咨。" 庶民至愚, 暑雨、祈寒, 尙且怨咨, 一朝失生生之業, 能無憾乎? 殿下前者, 令臣等, 書歷代闢佛疏入內, 蓋殿下初心, 將欲朝夕觀省, 而爲之鑑戒也。 如(博奕)〔傅奕〕 之疏、高郢之書、孫樵之奏、韓愈之表, 皆天下忠言、格論也。 今不知猶置諸左右, 而觀省之乎。 無乃觀以爲陳言腐說, 而揮去之乎? 若然, 則臣等之言, 空爲戲笑之資也。 殿下常曰: "我不好佛", 然近者儒生闢佛, 則譴責而囚之, 巨髡有病, 則遣醫而問之, 命人寫經, 則賜暇而遣之, 役僧營繕, 則給牒而度之, 爲上創寺, 則奪田而給之。 如此而殿下乃曰: "我不好佛", 是何異於驅群犬, 而赴林藪曰: "我非好獵也", 操網罟而入江湖曰: "我非好漁也?" 蓋知無不言, 人臣之責也; 從諫如流, 人主之美也。 伏願殿下留神焉。
御書下承政院曰:
予觀弘文館疏, 極筆詆予, 雖使內官傳語, 必不盡意, 予欲引見言之。
俄而御宣政殿, 召弘文館員以入。 上曰: "予不好佛, 國人所共知, 爾等以爲: ‘好佛’, 何也? 安巖重創, 從貴人權氏上言耳, 重創古基, 《大典》法也, 何獨於權氏, 而禁之乎? 佛氏誕妄, 予所洞知, 予豈欲事佛邀福哉? 但寺社舊址, 民潛盜耕, 則法當還寺, 不可謂奪民田也。 爾等以經幄侍從之臣, 猶不知予心, 則外臣豈復有知之者乎?" 命崇啓曰: "臣居近密之地, 豈不知殿下不崇信佛敎乎? 然今因權氏之請, 奪民田以與之, 則無知之民, 豈知殿下不好佛也? 今若許建此寺, 則古寺之基頗多, 人將蜂起而爲之, 漸不可長也。" 直提學安琛啓曰: "前日敎云: ‘寺刹勿許新創, 則根株自絶矣’, 上敎至今在耳。 京城之內, 亦有寺基, 若以爲古基, 而請重創, 則殿下其盡從之乎?" 上曰: "《大典》之法, 行於一國, 若不當遵行, 何用立法? 且疏中所言役僧給度事, 前日屢諭予意, 今不必更說。 然此僧徒, 豈今始剃髮者? 遣醫問病事, 兩殿敎曰: ‘學祖病苦, 欲使醫診視’, 故予不敢違耳。 此僧, 世祖及貞熹王后待遇素重者也, 父母所愛, 雖犬馬, 不可忽也。 國家置活人署, 以救人死, 脫有都監役僧得病將死, 其不救乎? 寫經事, 本兩殿所命, 予不敢止耳。 予雖不言, 爾等豈不知?" 命崇曰: "大妃之命, 則殿下宜若可從, 權氏之請, 亦不可不聽乎? 今權氏欲爲上創寺, 殿下從之, 至奪民田, 愚民豈知上意? 前者殿下, 命無度牒僧人, 一切充軍, 京山寺刹, 日以空虛, 中外相慶。 今此度僧之後, 僧徒日盛, 從而剃髮者無數, 至於出入閭閻, 或有止宿者焉。 臣恐佛法復興矣。" 上曰: "權氏上言, 雖稱爲上, 我則初不知也, 予豈求福, 而使爲之乎? 僧徒依憑營造, 留宿城中, 亦豈予敎之也? 且云: "可笑" 者, 豈予非笑爾等之言哉? 重創安巖, 非予所爲, 而爾等謂予爲之, 故予言可笑耳。 且疏引禹拜昌言, 予之不拜爾等之言, 固非矣。 雖欲拜之, 當於何處拜之? 君臣當相知心, 若君不知臣心, 臣不知君心, 國事日非, 何能有成?" 顧問承旨等曰: "古基重創, 無乃《大典》法乎?" 承旨等啓曰: "《大典》云: ‘重修古基者, 告兩宗, 報該司啓聞。" 命崇曰: "《大典》雖有之, 今當勘校, 可改也。" 不聽。 命崇再三論啓, 上命退, 而商量者三。 仍敎曰: "敺儒之僧, 至爲奸惡。 當初予疑儒生在學, 豈爲僧所縛, 今觀推案, 其日在學儒生甚少, 僧之闌入捽縛, 明矣。 漸不可長, 予將痛懲。" 都承旨金礪石啓曰: "此僧白晝大都, 捽縛儒生, 驅迫而行, 無所畏忌, 不可不痛懲。"
- 【태백산사고본】 25책 16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572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법제(法制) / 사상-불교(佛敎) / 재정-역(役)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농업-전제(田制)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군사-군역(軍役) / 건설-건축(建築)
- [註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