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절사 한찬이 북경에서 칙서·한씨에 대한 제문·고명·묘지명 등을 받들고 오다
성절사(聖節使) 한찬(韓儹)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북경[京師]에서 돌아왔는데, 칙서에 이르기를,
"선덕(宣德)008) 사이에 왕의 나라의 여인 한씨(韓氏)가 궁중[宮闈]에 들어와서 성실하게 일에 이바지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근래에 병고(病故)009) 로 인하여 소사(所司)010) 에 명해서 장사하게 하고, 궁내에서 글을 내어 제사하였다. 시호(諡號)를 공신(恭愼)으로 하고, 고명(誥命)을 주어 지난 날의 노고에 보답하였으니, 왕도 짐(朕)의 마음을 본받아 그 집을 후하게 돌볼 것이며, 진공(進貢)할 때마다 그 친족 한 사람을 보내도록 하라. 이제 제문(祭文)·고명(誥命)과 아울러 묘지(墓誌)·묘표(墓表)를 온 사신에게 부쳐서 가지고 돌아가게 하니, 왕이 보고 곧 족친[族屬]에게 주어서 그 광영(光榮)을 영구히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짐이 생각하건대, 착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포상하고, 수고로움이 있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것은 바로 국가의 법이다. 그대 한씨는 궁중[宮闈]에 들어오면서부터 밤낮으로 일을 받들며 각근(恪勤)하고 신밀(愼密)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고, 나이 많도록 수복[壽祉]을 누렸는데, 갑자기 병을 얻어 마침내 죽게 되었으니, 지난 노고(勞苦)를 추념(追念)하여 포상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제 특별히 그대를 추증하여 공신 부인(恭愼夫人)을 삼으니, 그대 영혼(靈魂)이 있거든 공경히 받으라."
하였다. 제문(祭文)에는 이르기를,
"황제는 사설감 태감(司設監太監) 왕거(王琚)를 보내어 공신 부인 한씨에게 사제(賜祭)한다. 그대는 온유 경신(溫柔敬愼)하여 아름답고 착함이 칭찬하기에 족하며, 궁중에 일을 맡아 오랫동안 공로가 드러났고, 수복(壽福)이 강녕(康寧)하여 마땅히 큰 복을 누릴 것인데, 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부음(訃音)을 듣고는 슬퍼하고 한탄한다. 이에 특별히 공신 부인을 추종하고 관원을 보내어 유제(諭祭)하며, 인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장사하게 하였다. 아아! 살아서는 어질고 착하였으며 죽어서는 영화로운 이름을 받았다. 인생이 이와 같으면 유감이 없을 것이니 그대는 흠향할지어다."
하였다. 묘표(墓表)는 이러하였다.
"부인(夫人) 한씨(韓氏)는 성은 한(韓)이요 휘(諱)는 계란(桂蘭)인데, 대대로 조선국 재상(宰相)의 집안이다. 고(考)의 휘는 영정(永矴)이요 비(妣)는 김씨인데, 영락(永樂)011) 경인년012) 4월 9일에 부인이 났다. 선덕(宣德)013) 정미년014) 에 국왕(國王) 성휘(姓諱)가 내정(內庭)에 뽑아 올려서 이제까지 57년이 되었는데, 사조(四朝)015) 를 거쳐 섬겨서 시종(始終) 공경하고 삼가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다. 갑자기 병이 들자 황제가 좌우 사람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고, 또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력이 없이 죽으니 때는 성화(成化)016) 계묘년017) 5월 18일이다.
황제가 듣고 슬퍼하며 애석해하기를 여러 번 하여 태감(太監) 왕거(王琚)를 보내어 유제(諭祭)하고, 백금(白金) 백만과 채단(綵段) 4표리(表裏)를 하사하고, 시호(諡號)를 공신(恭愼)으로 하여 지나간 행실을 밝게 드러내고, 또 내관감 태감(內官監太監) 손진(孫振)에게 명하여 장역(葬域)018) 을 경영하게 하고, 사설감 태감(司設監太監) 왕거(王琚), 내관감 태감 우적(牛迪)·곡청(谷淸)에게 상사(喪事)를 총리(總理)하게 하였으니, 황태후(皇太后)·중궁(中宮)·안희궁(安喜宮)·동궁(東宮)이 모두 부의(賻儀)가 있었다. 장사는 이 해 6월 21일에 하였는데, 묘(墓)는 도성(都城) 서쪽 향산(香山) 언덕에 있다.
왕거 등이 조정의 사랑과 은혜가 끝까지 이처럼 거듭함으로써 글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묘 위에 돌에 기록하여 큰 덕을 영구히 전하게 하여 이에 행장(行狀)을 갖추어 안(安)019) 에게 글을 쓰기를 부탁하기에 행장을 상고해 보니, 부인(夫人)은 성품이 유순(柔順)하고 착하여 말을 망령되게 발하지 아니하고 행동에 떳떳한 법이 있으며 내의(內儀)에 하나하나 능히 알고 기억하니, 모든 집사(執事)가 함께 무사(姆師)020) 로 높이 받들었다. 무릇 음례(陰禮)021) 의 행사에는 반드시 나아가서 질의를 받으면 거의 틀림이 없었고, 결루(結縷)022) 의 공(工)에 반드시 지시를 구하였으니, 여기에 정밀함이 지극하였다. 혹시 여러 조정의 내령(內令)을 잊음이 있어서 와서 밝히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고하기를, ‘이 같음은 선묘(宣廟)의 영(令)이고, 이 같음은 영묘(英廟)의 영이다.’라고 하니, 이런 까닭에 빈어(嬪御)023) 이하가 모두 일컫기를 ‘노로(老老)’라고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여러 조정에서 하사한 것은 다 기록할 수 없고, 금상(今上)024) 에 이르러 하사한 것은 전에 비하여 더욱 후하였는데, 부인이 이따금 받으면 더욱 겸손하고 삼가며 두려워하여 감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살아서는 황가(皇家)025) 의 녹(祿)을 누리고, 죽어서는 거듭 은혜의 내림을 입음이 마땅하다.
유제문(諭祭文)에 있기를, ‘온화하고 유순하며 공경하고 삼가서 아름답고 착함이 칭찬하기에 족하다.’고 하였고, 고봉사(誥封詞)에는, ‘공경하고 부지런하며 삼가고 세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아니하였다.’는 글귀의 표창이 있었으니, 어찌 지나친 칭찬이겠는가? 부인은 어질도다! 옛을 상고하건대, 선왕(先王)의 덕과 교화의 성함이 안으로 규문(閨門)으로부터 사해(四海)·만국(萬國)에 이르니, 비록 부인·여자라도 우리 조종(祖宗)의 교화의 융성함을 입지 아니함이 없어서 왕고(往古)와 더불어 나란히 하니, 비유컨대 봄바람의 화한 기운과 같아서 간 곳마다 빛이 난다. 부인은 해동(海東)026) 에서부터 오래 금중(禁中)027) 에 있으면서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배우고 익힘이 많았으므로, 아름다운 행실과 능함이 있어서 같은 무리에게 존중을 받고 조정에 알려져서 살아서와 죽어서 넓은 은혜와 큰 덕을 받음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묘표에 기록함이 이에 미치니, 우리 조정의 교화가 널리 사무친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이로써 표한다.
이부 상서(吏部尙書) 만안(萬安)은 짓다."
묘지명(墓誌銘)은 이러하였다.
"성화(成化) 계묘년 5월 18일에 부인(夫人) 한씨(韓氏)가 졸(卒)하였다. 이 앞서 부인의 병이 중하자 황제가 좌우 사람을 자주 보내어 가서 보게 하고, 겸하여 약으로 치료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죽었다. 황제가 슬퍼하고 애석해 하기를 여러 번 하고, 사설감 태감(司設監太監) 왕거(王琚)를 보내어 유제(諭祭)한 글에, ‘온화하고 유순하며 공경하고 삼가하여 아름답고 착함이 칭찬하기에 족하다.’라는 글귀가 있고, 백금 백만과 채단(綵段) 네 표리(表裏)를 하사하였으며, 시호(諡號)를 공신(恭愼)으로 내려서 태감(太監) 손진(孫振)에게 명하여 장역(葬域)을 경영하고 태감 왕거·우적(牛迪)과 소감(少監) 곡청(谷淸)에게 상사(喪事)를 총리(總理)하게 하였으며, 황태후(皇太后)·중궁(中宮)·안희궁(安喜宮)·동궁(東宮)이 모두 후한 부의(賻儀)가 있었다. 이 해 6월 21일을 받아 도성(都城) 서쪽 향산(香山) 언덕에 장사하였으니, 부인은 영광이다.
그 생일은 영락(永樂) 경인년 4월 9일인데, 수(壽)가 74세이다. 왕거가 장(狀)을 가지고 우(珝)028) 에게 주며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유택(幽宅)029) 에 넣게 하므로 지(誌)한다. 부인의 휘(諱)는 계란(桂蘭)이니 대대로 조선국 청주(淸州)의 재상 집안이다. 아버지의 휘는 영정(永矴)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선덕(宣德) 정미년에 국왕 성휘(姓諱)가 내정(內庭)에 선발해 올려서 이제 57년이 되었는데, 네 조정을 거쳐 섬기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게 조심하여 말을 망령되게 발하지 아니하고 행동이 떳떳함이 있으며, 또 성품이 착하여 능히 여러 사람과 화목하므로 빈어(嬪御)의 무리가 신임하고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혹시 음례(陰禮)의 행사를 당하면 반드시 몰래 질문을 구하는데, 부인은 말하기를, ‘무엇이 행할 만하고 무엇이 행할 수 없다.’고 하며, 혹시 전뉴(剪紐)030) 의 제도에 있어서도 반드시 몰래 가르치기를 구하면 부인이 말하기를, ‘무엇은 만들 만하고 무엇은 만들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혹시 옛 내령(內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 반드시 몰래 밝히기를 청하면 부인은 말하기를, ‘내 기억으로는, 선성(宣聖)031) 의 영(令)은 이와 같고, 영성(英聖)032) 의 영은 이와 같다.’라고 하였으니, 빈어(嬪御) 이하가 모두 비겨 말하기를, ‘여사(女師)’라고 하였다.
지금 황상(皇上)의 은혜가 천지와 같아서 무릇 넓은 하늘 밑과 땅 위에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라도 모두 그 덕택을 입는데, 하물며 부인은 궁중에서 일을 받든 것이 오래인데이겠는가? 그러므로 불시(不時)에 하사하는 것이 전일보다 더욱 후하였는데, 부인은 더욱 조심을 더하여 마치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황가(皇家)의 녹(祿)을 누렸고 죽은 뒤까지 은전(恩典)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아아! 부인의 고국에는 대가 거족(大家巨族)033) 이 있고 억만 백성이 있는데, 그 안에 한 번 중국에 이르러 누대 전각(樓臺殿閣)과 의관 문물(衣冠文物)의 성함을 보게 되면 돌아가서 자랑하기를, ‘내가 중국(中國)의 문물(文物)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제 부인은 몸이 중원(中原)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네 조정을 거쳐 섬기고, 금내(禁內)034) 에 거처하면서 중원에서 보지 못한 바를 보았으며 일생이 영화롭고 귀하며 이름을 간책(簡策)035) 에 썼으니, 어찌 이같으면서 오히려 유감이 있겠는가? 이에 명(銘)한다
‘동국에 태어나서 중원으로 진출하였네.
천부(天府)036) 를 공경히 섬기고 몸은 향산에 묻혔네.
부인(夫人)을 추증하며 아름다운 시호를 내렸으니,
주는 은혜 두터우매 아리따운 넋이 길이 편안하리.
비석에 글을 새겨 세상에 전하노라.’
호부 상서(戶部尙書) 유우(劉珝)는 짓다."
명하여 위의 족축(簇軸) 다섯과 출장도축(出葬圖軸) 하나를 좌참찬(左參贊) 한치례(韓致禮)에게 부쳐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16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556면
- 【분류】외교-명(明) /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 / 예술-미술(美術)
- [註 008]선덕(宣德) :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 [註 009]
병고(病故) : 병으로 인한 사고. 곧 병사(病死).- [註 010]
소사(所司) : 일을 맡아 다스리는 관사.- [註 011]
영락(永樂) : 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 [註 012]
경인년 : 1410 태종 10년.- [註 013]
선덕(宣德) : 명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註 014]
정미년 : 1427 세종 9년.- [註 015]
사조(四朝) : 명나라 선종(宣宗)·영종(英宗)·대종(代宗)·헌종(憲宗).- [註 016]
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註 017]
계묘년 : 1483 성종 14년.- [註 018]
장역(葬域) : 장지(葬地).- [註 019]
안(安) : 묘문(墓文)을 지은 사람. 만안(萬安).- [註 020]
무사(姆師) : 여자 스승.- [註 021]
음례(陰禮) : 부인(婦人)의 예의(禮儀) 또는 혼인(婚姻)의 예(禮).- [註 022]
결루(結縷) : 실로 맺는 일.- [註 023]
빈어(嬪御) : 빈첩(賓妾).- [註 024]
금상(今上) : 헌종(憲宗).- [註 025]
황가(皇家) : 황실(皇室).- [註 026]
해동(海東) : 조선(朝鮮).- [註 027]
금중(禁中) : 궁중(宮中).- [註 028]
우(珝) : 묘지명(墓誌銘)을 지은 사람. 유우(劉珝).- [註 029]
유택(幽宅) : 무덤.- [註 030]
전뉴(剪紐) : 여공(女工).- [註 031]
선성(宣聖) : 선종(宣宗).- [註 032]
영성(英聖) : 영종(英宗).- [註 033]
대가 거족(大家巨族) : 명문 대가.- [註 034]
○聖節使韓儧奉勑, 回自京師。 勑曰:
宣德間, 王國有女韓氏, 進入宮闈, 供事恪勤, 積有年紀。 邇因疾故, 命所司營葬, 內出文祭之。 諡曰恭愼, 錫以誥命, 用酬往勞。 王亦體朕之懷, 厚恤其家, 每進貢, 仍遣其族一人來。 今將祭誥文幷墓誌、表, 付差來齎回。 王觀訖, 仍付其族屬, 以示光榮于永永。
誥命曰:
朕惟有善必褒, 有勞必酬, 此國家之典也。 爾韓氏自入宮闈, 夙夜供事, 恪勤愼密, 始終不渝, 年歲滋深, 享有壽祉。 忽焉遘疾, 竟至云亡, 追念往勞, 可無褒䘏? 今特贈爾爲恭愼夫人, 爾靈如在, 尙克欽承。
祭文曰:
皇帝遣司設監太監王琚, 賜祭于恭愼夫人 韓氏。 曰惟爾溫柔敬愼, 令善足稱。 給事宮闈, 久著勞勩。 壽考惟寧, 宜享祺福。 一疾而逝, 聞訃悼嗟。 玆特贈爲恭愼夫人, 遣官諭祭, 乃勑有司, 爲營葬事。 嗚呼! 生而賢淑, 沒荷榮名。 人生如此, 可無憾矣。 爾其享之。
墓表曰:
夫人韓氏, 姓韓, 諱桂蘭, 世爲朝鮮國宰相族。 考諱永矴, 妣金氏。 以永樂庚寅四月九日生夫人。 宣德丁(酉)〔未〕 國王姓諱, 選進內庭, 迄今五十七載, 歷事四朝, 始終敬愼如一日。 忽遘疾, 上遣左右往視, 且命內醫療之, 不效而卒, 時成化癸卯五月十八日也。 上聞悼惜再四, 遣太監王琚諭祭。 賜白金百萬、綵段四表裏。 諡曰: "恭愼", 以昭往行。 又命內官監太監孫振, 營葬域, 司設監太監王琚、內官監太監牛迪ㆍ谷淸, 摠理喪事。 皇太后、中宮、安喜宮、東宮, 俱有賻。 葬以是歲六月二十一日, 墓在都城西香山之原。 琚等以: "朝廷寵終, 恩禮若此稠疊, 不可無文", 記諸墓上之石, 用傳大德於永久, 乃具狀, 屬筆於安。 按狀, 夫人性柔淑, 言不妄發, 動有常規, 於內儀, 一一能識記之, 諸執事咸尊信爲姆師。 凡陰禮之行, 必詣取質, 庶不差忒, 結縷之工, 必求指示, 斯至精緻。 或累朝內令有遺忘, 來請明者, 輒告曰: "如斯爲宣廟之令, 如斯爲英廟之令。" 以故嬪御以下, 咸稱曰: "老老", 而不名云。 累朝錫予, 不可殫記, 逮上錫賚, 比之前, 尤加厚。 而夫人往往受之, 愈益謙謹兢惕, 若不敢當者。 宜其生則與享皇家之祿, 沒則重荷䘏恩之頒。 而諭祭文, 有溫柔敬愼, 令善足稱。 誥封詞, 有恪勤愼密, 始終不渝之句之褒, 豈溢美耶? 夫人其賢矣乎! 稽之曩古, 先王德敎之盛, 內自閨門, 以及四海、萬國, 雖婦人、女子, 罔不沾被, 我祖宗敎化之隆, 與往古竝驅。 比如春風和氣, 所在生耀。 夫人自海東, 久于中禁, 自少至長, 薰蒸而灸之益多, 所以粹有行能, 推重儕輩, 知聞朝廷, 而存、沒冒蒙洪恩大德也, 豈偶然哉? 表以及之, 我朝敎化旁達, 亦於斯焉見。 是爲表。 吏部尙書萬安撰也。
墓誌銘曰:
成化癸卯五月十八日, 夫人韓氏卒。 先是, 夫人病力, 上數遣左右往眎, 兼療以藥, 無何就木。 上悼惜至再, 遣司設監太監王琚諭祭文, 有溫柔敬愼, 令善足稱 之句; 賜白金百萬、綵段四表裏; 諡恭愼, 命太監孫桭營葬域, 太監王琚ㆍ牛迪、少監谷淸, 摠理喪事, 皇太后、中宮、安喜宮、東宮, 俱有厚賻。 卜是歲六月二十一日, 葬都城西香山之原, 夫人榮矣。 其生永樂庚寅四月九日, 得壽七十有四。 琚以狀授珝爲誌銘, 納諸幽, 乃誌曰: "夫人諱桂蘭, 代爲朝鮮國 淸州相族。 考諱永矴, 妣金氏。 宣德丁未國王姓諱, 選進內庭, 曁今五十七載。 歷奉四朝, 始終敬愼如一, 言不妄發, 動止有恒, 且性淑善能睦衆, 肆嬪御之屬, 雅信不疑。 或遇陰禮之行, 必默取質, 夫人曰: ‘某可行, 某不可行。’ 或有剪紐之制, 必默求敎, 夫人曰: ‘某可制, 某不可制。’ 又或舊內令之失記者, 必默請明, 夫人曰: ‘我猶記, 宣聖之令如此, 英聖之令如此。’ 嬪御以下, 咸擬曰: ‘女師。’ 今皇上恩同天地, 凡普天率土, 一夫一婦, 皆被其澤, 況夫人供事宮闈之舊者? 是以不時錫賚愈厚于前, 夫人愈加小心, 若不敢當。 自少至老, 與享天家之祿, 迄沒後, 恩典罔替。 噫! 夫人舊國, 有大家巨族也, 有億姓兆民也。 內獲一到中原, 覩樓臺、殿閣、衣冠、文物之盛, 必歸而慶曰: ‘吾獲覩上國之光。’ 今夫人不但身到中原, 而又歷事四朝, 居處禁內, 見中原所未見者, 一生榮貴, 名書簡策, 豈如是而尙有憾乎? 乃銘曰: ‘生乎東國, 進乎中原。 恭事天府, 埋玉香山。 夫人之贈, 美諡之頒。 䘏恩惟腆, 懿魄永安。 勒銘墓石, 傳播人寰。’ 戶部尙書劉珝撰也。"
命以右件簇軸五、出葬圖軸一, 付左參贊韓致禮。
- 【태백산사고본】 24책 16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556면
- 【분류】외교-명(明) /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 / 예술-미술(美術)
- [註 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