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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61권, 성종 14년 12월 23일 임오 3번째기사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전교서 박사 고언겸 등이 전교서의 명칭과 관제를 조정해 줄 것을 청하다

전교서 박사(典校署博士) 고언겸(高彦謙) 등이 상소하기를,

"이름[名]이란 실상[實]의 손님이고 실상이란 이름의 주인입니다. 그 이름을 따르면 그 실상을 책(責)할 것이고, 그 실상에 의거하면 그 이름을 징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선왕(先王)이 관(官)을 설치하고 직(職)을 나누는 데에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서사(庶司)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그 직책의 경중(輕重)을 참작하여 그 아문(衙門)의 높고 낮음을 정한 뒤에야 그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하였던 것입니다.

본서(本署)의 직책으로 맡고 있는 것은 향축(香祝)·서적(書籍)·전문(篆文)인데, 역대(歷代)에서 모두 그 임무를 중하게 여겨 한(漢)나라에서는 천록각(天祿閣)이라고 하였고, 당(唐)나라에서는 비서성(秘書省)이라고 하였으며, 고려(高麗) 때에는 혹은 내서성(內書省)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비서성(祕書省)이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며, 혹은 전교시(典校寺)라고 일컫기도 하였는데, 우리 태조조(太祖朝)에 이르러서는 교서감(校書監)으로 칭호를 바꾸고 〈아문(衙門)의〉 품계(品階)는 정3품으로 하였습니다. 태종(太宗)께서 교서관(校書館)으로 고쳤는데, 아문(衙門)은 태조조의 관제(官制)대로 하여 예문관(藝文館)·성균관(成均館)과 더불어 같이 일컬어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관장하여 그 벼슬에 이바지하게 하였으니, 그 이름과 실상이 진실로 참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이르러 제도를 일신(一新)하여 삼관(三館)의 법을 혁파하고 관(館)을 바꾸어서 서(署)로 하였기 때문에 아래로 활인서(活人署)·액정서(掖庭署) 따위와 더불어 관(官)의 칭호가 서로 같아지게 되었으니, 그 이름과 실상이 비로소 서로 어긋났습니다. 이에 신이 두 번이나 천위(天威)를 모독(冒瀆)하면서도 지리(支離)함을 깨닫지 못하는 바입니다.

신은 듣건대, 나라의 큰 일은 제사(祭祀)와 군사(軍事)에 있다고 하니, 반드시 제사를 큰 일로 삼는 것은 어찌 종묘(宗廟)를 받들고 신기(神祇)1430) 를 제사한 뒤에야 친히 국가를 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희생(犧牲)1431) 이 비록 갖추어졌고 자성(粢盛)1432) 이 비록 깨끗할지라도 향축(香祝)이 갖추어지지 아니하면 신명(神明)에 교감(交感)할 수 없습니다. 전교관(典校官)은 향축을 받들고 어압(御押)1433) 을 받들어서 무릇 국가의 대(大)·중(中)·소(小) 제사에 모두 질서 있게 제사하여, 우리 전하로 하여금 그 인효 성경(仁孝誠敬)의 지극함을 다하게 하니, 그 직임이 진실로 가볍지 아니합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내려오면서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리(道理)를 중하게 여겨서, 서적(書籍)을 나라의 중한 보배로 삼아 천하의 책을 모아서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에 간직하여 고열(考閱)에 대비하였습니다. 문루(文樓)·무루(武樓)를 맡은 곳은 본서(本署)에 있으며, 또 책을 인쇄할 때에는 전교관(典校官)이 한쪽에는 정본(正本)을 가지고 한쪽에는 인쇄된 책을 가지고서 글자마다 교정하고 줄마다 검사하여, 글이 빠진 것은 보충하고 글자가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서 편차(編次)1434) 하고 장황(粧䌙)1435) 합니다. 그리하여 성상께서 독서하시는 데에 대비하여 우리 전하로 하여금 제왕(帝王)의 마음가짐과 다스리는 요지(要旨)를 연구하고 전대(前代)의 치란 흥망(治亂興亡)의 원인을 살피게 하니, 그 직임이 진실로 가볍지 아니합니다.

국가에서 조정(朝廷) 관부(官府)의 부서(簿書) 가운데 모두 인신(印信)을 찍어서 간사하고 거짓됨을 방지하는데, 인전(印篆)을 쓰고 인신(印信)을 상고하는 일은 오로지 본서(本署)에 위임하였으니, 또한 가볍고 천한 일이 아닙니다.

열성조(列聖朝)로부터 내려오면서 예문관(藝文館)·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을 삼관(三館)이라고 일컬어서, 과거(科擧)를 거쳐 뛰어난 자로 하여금 모두 여기에 소속하게 하여 출신(出身)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사습(士習)을 바르게 하고 사풍(士風)을 가다듬게 하여 사문(斯文)1436) 을 숭상하고 권장하는 뜻에 있어서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서(本署)에 대해서만 관(館)이라는 한 글자를 아끼니, 어찌 선왕(先王)의 제도에 어긋남이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의 이해할 수 없는 바입니다.

신 등은 또 생각하건대, 봉상시(奉常寺)는 3품 아문(三品衙門)인데 지위가 6시(寺)·7감(監)의 위에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로지 맡은 바가 제사(祭祀)이기 때문입니다. 본서도 향축(香祝)을 맡았는데 향축은 바로 제사의 근본이니, 본서가 어찌 봉상시 밑에 있겠습니까? 신 등은 삼가 보건대, 세조 대왕께서 《대전(大典)》을 반포해 내리실 때에 사도시(司䆃寺)는 본래 5품 아문인데 3품으로 올렸고, 풍저창(豐儲倉)·광흥창(廣興倉)은 종5품 아문인데 정4품으로 올렸으니, 그 맡은 바는 전곡(錢穀)을 출납(出納)하는 것뿐인데도 오히려 그 위호(位號)를 올려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관제(官制)는 마땅히 올릴 것은 올리는 것인데,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하물며 본서의 직책은 풍저창 등의 사(司)에 비하여 만 배의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전교서는 선왕(先王)이 정한 관제이므로 가볍게 고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교서감(校書監)·교서관(校書館) 역시 선왕의 관제인데 세조께서 고쳤고, 양현고(養賢庫)도 선왕의 관제인데 전하께서 이제 이미 회복하였으니, 교서관만 홀로 칭호를 회복할 수 없겠습니까? 대저 모든 일이 그대로 따를 만하면 어지럽게 고치기를 좋아할 필요가 없고, 고쳐야 할 만하면 또한 예전대로 따르는 데에 구애될 수 없으니, 시의(時宜)를 살피고 사체(事體)를 맞게 하는 여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조종(祖宗)의 제도에 따라 서(署)를 고쳐서 관(館)으로 하는 것이 어찌 오늘날에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신 등은 삼가 듣건대, 《대전(大典)》을 산정(刪定)한다고 하기에 명(命)이 내리던 날 기뻐서 춤추고 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말하기를, ‘우리 아문(衙門)의 칭호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문(斯文)을 맡은 관사(官士)로서 이처럼 사문을 중히 하시는 임금을 만나서 이처럼 제도를 개정하는 날을 당하여 그 위호(位號)를 올려 받지 못한다면, 신 등은 태어나서 글을 좋아하는 세상을 만났으나 교서(校書)·정자(正字)가 나귀를 타고 시(詩)를 읊조리는 그 노래를 다시 들을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 있고 큰 도량으로 헤아리시어 비근한 말에 굽어 따라서, 본서를 정3품 아문으로 올리고 선왕의 제도를 회복하여 이름과 실상이 서로 맞게 하면, 비단 신 등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문(斯文)의 한 가지 큰 다행입니다."

하였는데, 감교청(勘校廳)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161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55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註 1430]
    신기(神祇) : 천지의 신(神).
  • [註 1431]
    희생(犧牲) : 천지 종묘의 제사에 제물로 쓰는 짐승.
  • [註 1432]
    자성(粢盛) : 제사 음식.
  • [註 1433]
    어압(御押) : 임금의 수결(手決)을 새긴 도장.
  • [註 1434]
    편차(編次) : 차례로 엮음.
  • [註 1435]
    장황(粧䌙) : 단장하고 꿰맴.
  • [註 1436]
    사문(斯文) : 유학(儒學).

○典校署博士高彦謙等上疏曰:

名者實之賓也, 實者名之主也。 循其名, 則可以責其實, 據其實, 則可以驗其名。 是故先王之設官分職也, 上自公卿, 下至庶司, 必酌其職任之重輕, 而定其衙門之高下, 然後其名與實相孚矣。 本署職掌, 則曰香祝, 曰書籍, 曰篆文, 而歷代皆重其任。 在天祿閣, 在爲秘書省, 在高麗或稱內書省, 或稱秘書省, 或稱典校寺。 逮我太祖朝, 改稱校書監, 秩正三品。 太宗改爲校書館, 衙門則仍太祖官制, 與藝文館、成均館竝稱, 而使文臣掌之, 以供其職, 其名與實, 誠不僭矣。 及乎世祖大王, 一新制度, 革罷三館之法, 而改館爲署, 下與活人署、掖庭署之類, 官號相等, 而其名、實, 始相乖戾。 此臣所以再瀆天威, 不覺支離也。 臣聞, 國之大事, 在祀與戎, 其必以祭祀爲大事者, 豈非以奉宗廟、享神祇, 然後可以爲天下國家也? 是故犧牲雖備, 粢盛雖潔, 而香祝不具, 則無以交於神明矣。 典校官奉香祝, 承御押, 凡國家大、中、小祀, 咸秩序, 而祭之, 使我殿下, 得盡其仁、孝、誠、敬之至, 則其職任, 誠非輕矣。 本朝自祖宗以來, 崇儒重道, 以書籍爲國之重寶, 聚天下之書, 藏之隆文隆武樓, 以備考閱。 而武樓所掌, 在本署, 又於印書之時, 典校官一執正本, 一執印書, 字字讎校, 行行檢會, 書之脫落者補之, 字之魯魚者正之, 編次之, 粧纊之。 以備聖上乙夜之覽, 使我殿下, 硏帝王存心、出治之要, 究前代治亂、興亡之由, 則其職任, 誠非輕矣。 國家於朝廷官府簿書之間, 皆着印信, 以防奸僞, 而書印篆, 考印信, 專委於本署, 則亦非輕賤事也。 自列聖以來, 設藝文館、成均館、校書館, 而稱爲三館, 使由科目顯者, 皆屬此以爲出身之地。 于以正士習、勵士風, 其崇奬斯文之意, 可謂至矣, 而獨於本署, 靳一館字, 豈不有違於先王之制歟? 此臣等之所未解也。 臣等又謂, 奉常寺爲三品衙門, 而位冠六寺、七監之上者, 無他, 專以所掌者祭祀也。 本署亦典香祝, 而香祝乃祭祀之本, 則本署豈下於奉常寺哉? 臣等伏覩, 世祖大王頒降《大典》, 司䆃寺本五品衙門, 而陞爲三品, 豐儲倉、廣興倉從五品衙門, 而陞爲正四品, 其所掌不過錢、穀出納而已, 猶得陞其位號, 則我國官制, 當陞則陞之, 又何疑哉? 況本署職任, 視豐儲倉等司, 萬萬哉! 儻曰: "典校署, 先王官制, 不可輕改", 校書監、校書館, 亦先王官制, 而世祖改之; 養賢庫, 亦先王官制, 而殿下今旣復之, 則校書館獨不可復稱乎? 大抵凡事有可因循, 則不必好爲紛更, 有可更張, 則又不可泥於因循, 在乎審時宜, 而中事體如何耳。 遵祖宗之制, 改署爲館, 豈不在今日乎? 臣等伏聞刪定《大典》, 命下之日, 不勝抃躍, 相與語曰: "復我衙門, 正在今日。" 以如此掌斯文之司, 得如此重斯文之主, 當如此改制度之日, 不獲陞其位號, 則臣等竊恐生逢好文之世, 復聞校書、正字騎驢詠詩之謠矣。 伏望, 殿下廓恢大度, 俯從邇言, 陞本署爲正三品, 以復先王之制, 使名、實相稱, 則非徒臣等之幸, 抑亦斯文之一大幸也。

命下勘校廳。


  • 【태백산사고본】 24책 161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55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