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강에서 성균관·사학·향교 등의 역할 등에 관해 의논하다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전한서(前漢書)》를 강하다가, 공손홍(公孫弘)의 상서(上書)에 ‘풍화(風化)는 안으로부터 밖으로 미치는 것이니 폐하께서 수선(首善)796) 을 세우고 학교를 일으키소서.’ 한 데 이르러, 검토관(檢討官) 송질(宋軼)이 아뢰기를,
"삼대(三代)797) 이상은 오래 되었지만 한(漢)나라로부터 내려오면서 다 학교 세우기를 독실히 하여 인재(人才)가 여기서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성균관과 사학(四學)798) 은 오히려 아직도 풍교(風敎)의 교화(敎化)가 있으나, 군(郡)이나 현(縣)에 있는 향교(鄕校)는 수령(守令)들이 태만하게 이를 돌보지 않아 학사(學舍)가 퇴폐(頹敝)하고 유사(儒士)들이 가르치지 않아서 선비들의 풍습이 날마다 퇴폐해져가고 있습니다. 또 석채(釋菜)799) 때의 희생(犧牲)이나 채소(菜蔬)·다과(茶蔬)는 한갓 형식이 될 뿐이니, 청컨대 여러 도(道)에 유시(諭示)를 내리시어 거듭 이를 밝히소서."
하고, 시강관(侍講官) 김종직(金宗直)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수령으로 있을 때 향사례(鄕射禮)800) 와 향음 주례(鄕飮酒禮)801) 를 마련하여 효제(孝悌)하는 사람들을 먼저 참여하게 하고, 재예(才藝)가 있는 자들은 그 다음으로 하며, 불초(不肖)한 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로부터 온 고을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변화되었고 부끄럽게 여겨서 고쳤으니, 자못 풍화(風化)에 조그마한 보탬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만일 석채(釋菜)와 향음 주례 및 향사례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여러 도(道)에 있는 감사(監司)들의 책임이니, 마땅히 거듭 이 일을 밝히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157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50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고사(故事) / 풍속-풍속(風俗)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註 796]수선(首善) : 모범(模範).
- [註 797]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나라.- [註 798]
사학(四學) : 국가에서 선비를 가르쳐 기르기 위하여 서울의 중앙과 동·남·서에 세운 네 학교. 중학(中學)·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을 말함.- [註 799]
석채(釋菜) : 석전제(釋奠祭).- [註 800]
향사례(鄕射禮) : 고을의 장(長)이 봄·가을에 주민들을 모아 행하던 사례(射禮)를 말함.- [註 801]
향음 주례(鄕飮酒禮) : 온 고을 안의 유생이 모여서 읍양(揖讓)의 예를 지켜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예절임.○御夕講。 講《前漢書》, 至公孫弘上書: "風化由內, 而及外, 陛下建首善, 興學校", 檢討官宋軼啓曰: "三代以上, 尙矣, 自漢以下, 皆敦學校, 而人才多從此出。 今成均館、四學, 則猶有風敎之化, 郡縣鄕校, 則守令慢不之察, 學舍頹敝, 儒士無敎, 而士習日壞。 且釋菜之時, 犠牲、蔬菓, 徒爲文具。 請降諭諸道, 申明之。" 侍講官金宗直啓曰: "臣曾爲守令, 設鄕射、鄕飮之禮, 使孝悌者先之, 才藝者次之, 不肖者不與焉。 由是一鄕之人, 企而化之, 恥而改之, 頗有小補於風化。 以此觀之, 若釋菜、鄕飮、鄕射之禮, 亦不可廢也。" 上曰: "此皆諸道監司之責也。 當申明之。"
- 【태백산사고본】 23책 157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50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고사(故事) / 풍속-풍속(風俗)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註 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