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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55권, 성종 14년 6월 16일 정축 6번째기사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병조에서 사신을 접대할 때의 복색을 물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을 접대(接待)할 때 칼을 차는 장사(將士)에게 무슨 옷을 입혀야 마땅하겠습니까? 만일 갑주(甲胄)를 쓰면, 갑주는 화려한 색깔이 많습니다. 구례(舊例)에는 졸곡(卒哭) 후에 중국 사신과 서로 만날 때 모두 백의(白衣)·오모(烏帽)에 궁검(弓劎)을 찼는데, 지금도 이 예(例)에 의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간(臺諫)·홍문관(弘文館)에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윤호(尹壕)·서거정(徐居正)·허종(許琮)·이극증(李克增)·어세공(魚世恭)은 의논하기를,

"모든 장수는 기복(器服)을 갖추지 않을 수 없으니, 다만 화려한 빛깔을 쓰지 말고, 흑칠(黑漆)한 갑주(甲胄)를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이극배(李克培)·이파(李坡)·조익정(趙益貞)·홍이로(洪利老)·이공(李拱)·권정(權侹)·유윤겸(柳允謙)은 의논하기를,

"병조 당상(兵曹堂上)·도총관(都摠管)·별운검(別雲劎) 등이 앞에 가까이 하여 시위(侍衛)하기 때문에 모두 빛깔이 있는 갑주(甲胄)를 착용하는 것인데, 지금 흑칠한 갑주를 쓰면 군사와 구분이 없으니, 임시 방편에 따라 백의(白衣)에 궁검(弓劎)을 차고 시위(侍衛)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이철견(李鐵堅)·김학기(金學起)·박형문(朴衡文)·김종(金悰)·이복선(李復善) 등이 의논하기를,

"융기(戎器)를 쓰는 것은 상제(喪制)와는 원래 서로 관계가 되지 않으니, 지금 상사(喪事)로 인하여 그 빛깔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였고, 박계성(朴繼姓)·김직손(金直孫)은 의논하기를,

"시위(侍衛)하는 사람은 갑주(甲胄)를 몸에서 벗을 수 없으나, 국휼(國恤)을 당하여 화려한 빛깔을 사람들에게 보일 수 없으니, 빛깔이 있는 것은 그만두고 견고한 것만을 취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였고, 유순(柳洵)·김종직(金宗直)·정성근(鄭誠謹)·김흔(金訢)·민사건(閔師騫)·안윤손(安潤孫)·송질(宋軼)·이균(李均)·이거(李琚)·황계옥(黃啓沃)·성희증(成希曾)은 의논하기를,

"시위하는 장사(將士)들이 기복(器服)을 갖추어야 마땅하다면 시복(時服)에 궁검(弓劎)을 찰 수 없고, 지금 국상(國喪)중에 있으므로 또한 빛깔이 있는 갑주(甲胄)를 쓸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잡색(雜色)의 갑주를 쓰고 시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칙사(勅使)를 맞이할 때에는 빛깔이 있는 갑주를 쓰고, 시어(侍御)할 때에는 흑칠한 갑주를 쓰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졸곡(卒哭) 뒤 갓[笠]의 빛깔을 논의하게 하였는데, 정창손(鄭昌孫) 등이 모두 의논하기를,

"졸곡 뒤에 백립(白笠)을 쓰는 것은 조종조(祖宗朝)에서 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오례의(五禮儀)》에도 이것으로 인하여 정했습니다. 그러나 졸곡 뒤에 성상은 익선관(翼善冠)에 오서대(烏犀帶)를 갖추었고 조신(朝臣)은 오사모(烏紗帽)에 흑각대(黑角帶)를 썼으니, 예복(禮服)은 이미 검은 색을 입었는데 편복(便服)만 백색(白色)을 입는 것은 예(禮)에 있어서 서로 어긋나므로, 흑립(黑笠)을 쓰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였으나, 다만 사헌부(司憲府)에서 의논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졸곡(卒哭) 후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에 갓은 흰색을 쓰도록 되어 있어 조종조(祖宗朝)에서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또한 대체(大體)에도 무방합니다. 한때의 의논으로 번거롭게 고칠 수 없는 것이니, 마땅히 한결같이 《오례의(五禮儀)》를 따르소서."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지금 뭇사람들의 논의(論議)를 듣건대 과연 정의(情義)에 합당하니, 마땅히 흑립(黑笠)을 써야 한다. 다만 상제(喪制)는 점차 길복(吉服)을 따르면서 흉복(凶服)을 바꾸어야 옳은데, 흉복을 버리고 갑자기 길복을 따르니, 상례(喪禮)에 어긋나는 듯하고, 후세(後世)에 의논이 있을까 염려스럽다. 또한 사헌부(司憲府)의 의논은 무엇을 고집하기에 혼자 다른가?"

하니,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의 주(註)는 선왕(先王)이 참작(參酌)해서 정한 것이니, 다시 고칠 수 없기 때문에 별도로 의논한 것입니다."

하였고, 정창손(鄭昌孫) 등이 다시 아뢰기를,

"백립(白笠)의 제도는 원래 의거한 바가 없으니, 지금 흑색을 쓰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15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472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군사-군기(軍器) / 의생활-예복(禮服)

○兵曹啓: "天使接待時, 佩劍將士, 當用何服? 若用甲冑, 則甲冑多有華色。 舊例, 卒哭後, 天使相見時, 皆以白衣、烏帽, 佩弓劍, 今依此例, 何如?" 命議政府、六曹、臺諫、弘文館議之。 鄭昌孫沈澮尹弼商尹壕徐居正許琮李克增魚世恭議: "諸將不可不具器服, 但不可用華色, 用黑漆甲冑何如?" 李克培李坡趙益貞洪利老李拱權侹柳允謙議: "兵曹堂上、都摠管、別雲劍等, 近前侍衛, 故皆着有色甲冑, 今用黑漆甲冑, 則與軍士無別, 從權以白衣, 佩弓劍, 侍衛何如?" 李鐵堅金學起朴衡文金悰李復善議: "戎器之用, 與喪制, 元不相干, 今不可仍喪事, 變其色也。" (朴繼性)〔朴繼姓〕 金直孫議: "侍衛之人, 甲冑不可去身, 然當國恤, 不可以華麗示人, 去其有色, 取其堅牢爲便。" 柳恂金宗直鄭誠謹金訢閔師騫安潤孫宋軼李均李琚黃啓沃成希曾議: "侍衛將士, 當具器服, 則不可以時服佩弓劍。 今在國喪, 亦不可用有色甲冑。 用雜色甲冑, 侍衛何如?" 傳曰: "迎勑時, 用有色甲冑, 侍御時, 用黑漆甲冑。" 又議卒哭後笠色, 鄭昌孫等僉議曰: "卒哭後白笠, 祖宗朝行之已久, 故《五禮儀》亦因此爲定。 然卒哭後, 上具翼善冠、烏犀帶。 朝臣烏紗帽、黑角帶, 禮服旣用玄色, 而便服獨用白色, 於禮相違。 用黑笠爲便。" 獨司憲府議以爲: "《五禮儀》, 卒哭後, 白衣、烏紗帽, 笠則用白。 祖宗朝行之已久, 且無妨於大體。 不可以一時之議, 紛更也。 當一從《五禮儀》。" 傳曰: "今觀群議, 果合情義, 宜用黑笠。 但恐喪制由吉, 而變於凶, 可也, 捨凶而從吉, 似違喪禮, 慮有後世之議。 且憲府之議, 何所執而獨異乎?" 憲府啓曰: "《五禮儀註》, 先王參酌以定, 不可更改, 故別議之。" 昌孫等更啓曰: "白笠之制, 本無所據, 今用黑色, 似爲無妨。"


  • 【태백산사고본】 23책 15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472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군사-군기(軍器) / 의생활-예복(禮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