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균이 야인이 황성으로 옮겨 살고자 함을 보고하니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다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치계(馳啓)하기를,
"야인(野人) 김유리개(金劉里介)가 부락 사람을 거느리고 황성(皇城) 들에 옮겨 살면서 본국(本國)316) 의 울타리가 되어 정성을 바치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노사신(盧思愼)이 의논하기를,
"김유리개가 본래 경흥(慶興) 성밑에 살다가 올적합(兀狄哈)에게 격파되어 심자라로(沈者羅老) 옛터에 옮겨 살았는데, 이제 국가에서 건주위(建州衛) 〈야인의〉 귀순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듣고 그 부락을 거느리고 황성에 머물면서 국가의 위업을 빙자하여 안심하고 살고자 하니, 그 마음의 진실과 거짓은 비록 알 수 없으나, 헤아려보건대 여기에 대한 계책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황성이 비록 변진(邊鎭)과 강(江)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나 본래 우리 땅이 아닌데, 저들이 와서 살면서 울타리가 되겠다고 하니, 금하면 그 귀순하는 마음을 막을 것이고 금하지 아니하면 오랑캐과 중국인이 섞여 사는 것과 같아서 틈이 쉽게 생기는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또 본조(本朝)에서 왜인(倭人)을 삼포(三浦)에 살게 하였는데, 날로 인구가 늘어서 지금 강성하여졌으니, 이 두 가지에 마땅히 경중(輕重)을 분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비록 겉으로 정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어찌 훗날을 보장하겠습니까? 만약 김유리개가 다시 와서 살기를 청하거든,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 땅에 살고자 하는 것은 한갓 편히 살 계책일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니 정성도 가상할 만하다. 그러나 이 땅은 애양보(靉陽堡)와 서로 가깝고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둔 지 해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런데 이제 저희들이 부락 40여 호를 거느리고 갑자기 여기 와서 살게 되면 중국 조정에서 반드시 견책(譴責)이 있을 것이니 일은 모름지기 중국에 주문(奏聞)해야 할 것이며 국가에서도 마음대로 처단할 수 없다.’고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사흔(尹士昕)·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김유리개가 황성에 옮겨 살면서 나라의 울타리가 되고자 한다 하니, 그 말은 비록 가상한 것 같으나 저들은 낭자 야심(狼子野心)317) 인데, 이제 만약 허락하여 서로 바라보는 땅에 살게 하여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보고 도둑질하는 길을 열게 되면, 이는 이른바 호랑이를 길러서 스스로 근심을 남기는 것입니다. 계축년318) 이전에는 저들이 가까운 땅에 살면서 우리 나라 사람과 서로 사귀어 혼인과 제사에 서로 왕래하며 친근함이 극진하였었는데, 곧 혐의와 틈이 생겨서 드디어 들어가서 토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뒤로부터 지금까지 변경을 수비하는 일에 사람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니 그들이 가까이 사는 데에서 생기는 폐단을 이것으로도 밝은 귀감이 됩니다. 또 세조조(世祖朝)에 저들이 또 와서 살고자 하였으나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절도사에게 명하여 춘추(春秋)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서 여러 날 관병(觀兵)하게 하여,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동요되게 하여 저들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일을 할 수 없게 하고 한편으로는 저들로 하여금 이들에 살지 못하게 하였으니, 김유리개가 비록 다시 와서 청하더라도 결단코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며, 권감(權瑊)·노공필(盧公弼)·이맹현(李孟賢)·이세필(李世弼)은 의논하기를,
"김유리개 등이 이제 비로소 귀순하여 황성에 옮겨 살고자 하나, 그 마음의 성실 여부는 진실로 알 수 없습니다. 황성이 비록 멀리 떨어진 변방에 있다고 하지만 단지 강 하나가 막혔지 우리와 접근하여 있는데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짐승의 마음을 가진 무리로 하여금 우리의 허실을 알게 하겠습니까? 이제 마땅히 말하기를, ‘너희가 가까운 땅에 와서 살면서 나라의 울타리가 되겠다고 하니 너희들의 성심은 가상할 만하다. 그러나 이 땅은 비워둔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너희가 휘하를 거느리고 홀로 와서 이곳에 살게 되면 다른 위(衛)의 사람들이 틀림없이 의심하게 되어 너희가 안심하고 살지 못할 것이며, 또 너희 자신은 성심으로 귀순하니 진실로 의심스러운 것이 없으나 너희 휘하(麾下) 및 너희 자손이 혹시라도 처음과 같지 아니하면 쉽게 흔단(釁端)이 생기게 되어 양쪽이 모두 후회가 있을 것이니 옮기지 아니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은 오랫동안 비워두고 살지 않았는데 어찌 뜻이 없었겠느냐? 너희들이 비록 원래 살던 곳에 있더라도 무릇 들은 것을 우리에게 모두 알려주면 너희들이 정성을 다한 것이 더욱 나타날 것이니 국가에서 어찌 가상하게 여겨 상을 주지 않겠는가?’라고,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또 심자라로(沈者羅老) 부락이 지금은 비록 순종하지만 아시합(阿時哈)을 죽였다는 것으로 반드시 혐의와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인데 어찌 온전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지금 황성(皇城)이 먼 변방이라고 하나 저사람들이 함부로 사냥을 행하는데 만일 이로 인하여 도둑질을 할까 염려스럽습니다. 황성 등지에 항상 체탐인(體探人)을 보내어 비밀히 순회(巡廻)하면서 적의 사정을 탐지하여 방비하는 일을 하유(下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정창손 등의 의논에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154권 7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461면
- 【분류】외교-야(野)
- [註 316]본국(本國) : 우리 나라.
- [註 317]
낭자 야심(狼子野心) : 이리 새끼는 길들여 복종시킬 수 없다는 뜻으로, 흉포한 것을 비유한 것임.- [註 318]
계축년 : 1433 세종 15년.○平安道節度使李克均馳啓: "野人 金劉里介率部落, 欲徙居皇城之野, 藩衛本國, 以輸誠款, 何以處之?" 命議領敦寧以上。 鄭昌孫、沈澮、盧思愼議: "劉里介本居慶興城底, 爲兀狄哈所破, 移住沈者羅老古基。 今聞: ‘國家受建州衛歸順’, 率其部落, 欲居皇城, 憑恃國家之威, 安心住活。 其心誠僞, 雖不可知料, 應有此計也。 皇城雖與邊鎭, 只隔一水, 然本非我地, 彼人欲來居, 作爲藩籬, 禁之, 則阻其向化之心, 不禁, 則有戎夏雜處, 嫌隙易生之患。 且本朝處倭人於三浦, 日益繁滋, 至今爲梗, 於此二者, 宜權輕重。 今雖陽爲效款, 安保其異日乎? 若劉里介更來請居, 令邊將語之曰: ‘汝等之欲居此地, 非徒安生之計, 欲爲國家効力, 誠亦可嘉。 然此地與靉陽堡相近, 曠無人居, 歲月已久, 今汝等率部落四十餘戶, 忽來啓此, 中朝必有譴責, 事須奏聞, 國家亦不可擅斷。’ 以此開說, 何如?" 尹士昕、尹弼商議: "劉里介欲移居皇城, 爲國藩籬, 其言雖若可嘉, 然彼輩狼子野心。 今若許之, 移居相望之地, 窺覘我虛實, 以啓作賊之路。 是所謂養虎自遺患也。 癸丑年以前, 彼人居於近地, 與我國人相交, 婚姻、祭祀, 互相往來, 親昵之極, 乃生嫌隙, 遂有入征之擧。 自後迄今, 戍邊之役, 人不堪苦, 其居近之弊, 此亦明鑑。 且世祖朝, 彼人亦欲來居, 不之許, 命節度使, 於春秋領軍越江, 累日觀兵, 一以恐動之, 使彼不得有爲於其間; 一以使彼不得居於此野。 劉里介雖更來請, 斷不可許。" 權瑊、盧公弼、李孟賢、李世弼議: "劉里介等, 今始歸順, 欲移居皇城, 其心誠否, 實未可知。 皇城雖在越邊, 只隔一江, 逼近於我, 豈可使人面獸心之類, 知我虛實也? 今當語之曰: ‘汝欲來居近地, 爲國藩籬, 汝之誠心, 可嘉。 然此地空曠已久, 汝今率麾下, 獨來居此, 則他衛之人, 心生疑貳, 汝不得安心住活, 且在爾身誠心效順, 固無可疑。 若其麾下及汝子孫, 或不如初, 則易生釁端, 兩俱有悔, 不若不移之爲愈也。 此地久空不居, 豈無意耶? 汝等雖在元居之地, 凡有所聞, 悉通於我, 則汝之效誠益著, 國家豈不嘉賞?’ 以此開說爲便。 且沈者羅老部落今雖效順, 然以阿時哈之死, 必懷嫌恨, 豈可全信? 且今皇城越邊, 彼人等恣行田獵, 萬一因此作耗, 亦爲可慮。 皇城等處, 常遣體探, 秘密巡哨隄, 備事下諭, 何如?" 從昌孫等議。
- 【태백산사고본】 23책 154권 7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461면
- 【분류】외교-야(野)
- [註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