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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50권, 성종 14년 1월 6일 기해 1번째기사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영안도 순찰사 어유소가 도망간 귀화민을 쇄환하지 못한 것을 아뢰다

임금이 후원에 나아가서 무신(武臣)의 활 쏘는 것을 보고, 또 글을 강(講)하였는데, 충의위(忠義衛)·별시위(別侍衛)·정로위(定虜衛) 등이 참여하였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와 입직(入直)한 도총관(都摠管)·병조 당상(兵曹堂上), 지돈녕(知敦寧) 김세민(金世敏)·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예조 판서 이파(李坡)·호조 판서 어세공(魚世恭)·공조 판서 손순효(孫舜孝) 등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이때 영안도 순찰사(永安道巡察使) 어유소(魚有沼)가 종사관(從事官) 남윤종(南潤宗)을 보내어 부령(富寧)에 사는 향화인(向化人)026) 으로 도망간 사람을 쇄환(刷還)하지 못하는 일을 아뢰었는데, 임금이 입시한 재상들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강희맹(姜希孟)·서거정(徐居正)이 의논하기를,

"저들이 사납고 교만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는데 역대(歷代)에 버려두고 눈여겨보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다가 영락(永樂)027) 연간에 양목탑올(楊木答兀)거양(巨陽)에 침입하여 모두 죽이고 약탈하여 갔지만, 황제가 내버려두고 눈여겨보지 않았으며 마침내 죄를 묻지 아니하였으니, 제왕(帝王)이 오랑캐에게 대하는 것이 본디 이와 같습니다. 이제 저들의 죄는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토벌할 것이나 그 형세가 매우 어려우니, 만일 부득이하면 국경 위에서 군대의 위세(威勢)를 보여 농사철을 당할 적마다 밭갈고 김매는 것을 못하게 하여 적을 곤궁하여 피폐하게 하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하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이제 도망해 간 사람을 비록 찾아 오지 못하더라도 아홉 마리 소에 한 개의 털과 같은데 무엇이 국가에 손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일은 비록 작더라도 국가의 위신이 달렸으므로 혹은 저들에게 후하게 주어서 달래어 오게 하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사이에 보내어 빼앗아 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두 위엄을 세우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국경 위에 군사를 엄정하게 하여 들어가서 칠 형세를 보여서 저들로 하여금 농사지을 수 없게 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데리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입니다. 또 저들의 추장(酋長)이 오거든 옥(獄)에 가두어 도망간 사람을 수대로 데리고 오게 한 뒤에 석방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비록 대체에는 방해가 되나 군사는 권도(權道)를 쓰는 것을 싫어하지 아니하므로, 만약 변장(邊將)의 뜻에서 나온 것 같이 한다면 또한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파(李坡)·김세민(金世敏)은 의논하기를,

"저들을 아무리 반복하여 깨우치고 타이르더라도 즐겨 따르지 아니하며 은혜와 신의로 회유하여도 복종시킬 수 없으면, 다시 전에 간 성밑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전일에 깨우쳐 타이르던 말로써 깨닫도록 일러주되, 만약 뉘우쳐 고치지 아니하거든 장차 군사를 더하여 토벌하겠다는 뜻으로 타일러서 달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아니하거든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국경 위에서 군사의 위엄을 보여서 장차 들어가 토벌할 형상을 하면, 저들이 반드시 두려워하고 겁을 내어 안심하고 농사를 짓지 못할 것이니, 이처럼 두세 번 하면 틀림없이 생업(生業)을 잃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때를 타서 사람을 시켜서 타이르되, 만약 혹시 듣지 아니하거든 장수에게 명해서 토벌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계손(李繼孫)·여자신(呂自新)·이맹현(李孟賢)은 의논하기를,

"야인의 성질이 본래 교활하고 간사하므로 비록 여러 모로 깨닫도록 일어주더라도 듣고 따르기를 즐겨하지 아니할 것이니, 은혜와 신의로써 회유하여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이제 오을지합(吾乙之哈) 등이 도망간 사람을 숨겨 주고 처음에는 숨기지 않다가 나중에는 나갔다고 말을 하니, 그 반복하여 속이면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는 것이 심합니다. 그 사세(事勢)를 보건대, 국경 위에서 군사를 일으키지 아니하면 끝내 쇄환(刷還)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또 저들은 우리 나라 가까운 땅에 살면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깊은 곳에 사는 야인과 비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북쪽 관문을 지키는 군사를 강한 군사라고 일컫는데, 조그마한 오랑캐를 오히려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즉시 군사를 일으켜서 죄는 묻지 아니하면, 저들이 반드시 생각하기를, ‘겁내고 약하여 우리를 두려워한다.’고 하여 교활한 마음을 더욱 방자하게 굴면서 마음대로 죄를 짓고 도망한 자들의 주인이 될 것이니, 국위(國威)를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변경의 근심이 점점 늘어나면 끝내 제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군사를 선발하여 죄를 묻고 국위를 선양(宣揚)하여 후일을 징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어세공(魚世恭)은 의논하기를,

"신이 전일의 의논에서도 정벌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으며, 이제 어유소가 아뢴 것을 보건대, ‘끝내 은혜와 신의로 복종시킬 수 없다.’고 하였으니, 들어가서 정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그 의논을 보고 재상 등에게 명하여 모두 앞에 나오게 하여 쇄환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은가를 다시 물었다. 어세공(魚世恭)·이계손(李繼孫)이 대답하기를,

"얼음이 풀리기 전에 들어가서 공격하여 나라의 위엄을 드날리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정창손(鄭昌孫)·윤필상(尹弼商)은 말하기를,

"전일에 양정(楊汀) 등이 출정하였다가 패하여 우리 나라 사람을 잃은 것이 매우 많았으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가을을 기다려서 서서히 도모하는 것이 가하겠습니다."

하고, 허종은 말하기를,

"도망한 사람이 이른 곳에는 반드시 추장(酋長)이 있을 것이니, 그 추장이 만약 나오거든 잡아서 옥에 가두고 〈도망한 사람을〉 모두 쇄환하기를 기약한 뒤에 석방한다면, 저들의 족속이 반드시 다 돌려보낼 것입니다."

하고, 이파는 말하기를,

"추장을 가두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추장이 한 사람뿐이 아닌데 어찌 다 잡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한 명의 추장을 가둔다고 하더라도 쇄환하는 데에는 보탬이 없을 것이고 한갓 나라의 신의만 잃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윤필상이 말하기를,

"길가에서 집을 짓게 되면, 삼 년이 되어도 완성시키지 못하는 것이니, 신총(宸聰)028) 으로 결단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유소는 이제 올라오는 것이 가하며, 다가오는 가을에 들어가서 공격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 때에 임하여 처치하되 뜻밖에 공격하게 하여 만전(萬全)의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150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425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왕실-행행(行幸) / 왕실-경연(經筵) / 외교-야(野) / 호구-이동(移動)

  • [註 026]
    향화인(向化人) : 귀화인.
  • [註 027]
    영락(永樂) : 명(明)나라 성조(成祖)의 연호.
  • [註 028]
    신총(宸聰) : 임금의 총명.

○己亥/上御後苑, 觀武臣射, 又講書。 忠義衛、別侍衛、定虜衛等與焉。 領敦寧以上、議政府、入直都摠管、兵曹堂上、知敦寧金世敏達城君 徐居正、禮曹判書李坡、戶曹判書魚世恭、工曹判書孫舜孝等入侍時, 永安道巡察使魚有沼, 遣從事官南潤宗, 啓富寧居向化逃去人不得刷還事, 上令入侍宰相等議之。 昌孫明澮沈澮希孟居正議: "彼人桀驁難制, 自古而然, 歷代皆置之度外。 永樂間, (楊木答几)〔楊木答兀〕 入寇巨陽, 盡殺掠而去, 皇帝置之度外, 遂不問罪。 帝王之於夷狄, 待之固如此。 今彼之罪, 所當興兵致討, 然其勢甚難, 如不得已, 則觀兵境上, 每當農時, 使不得耕耨, 使之困敝, 可也。" 許琮議: "今逃去人, 雖不刷來, 如九牛一毛, 何有損於國家? 然事雖小, 而國家之輕重係焉。 或厚遺彼人, 誘而致之, 或間遣人奪來, 皆非取威之道。 臣以謂 ‘嚴兵境上, 以示入攻之勢, 使彼不得耕耨, 悔過率來, 上策也。’ 又彼人酋長之來, 囚繫於獄, 使之盡數刷來, 然後放之。 此雖有妨大體, 然兵不厭權, 似若出於邊將之意而爲之, 亦無害焉。" 李坡世敏議: "彼輩雖反覆開諭, 尙不肯從, 不可以恩信懷服, 更令前去城底人, 復以前日開諭之言曉之。 若不悛, 則諭以將加兵致討之意, 且誘且脅。 如又不聽, 則令大臣, 耀兵境上, 將爲入討之狀, 彼必恐怖不得安心耕種。 如此再三, 失業必矣。 乘其危懼之時, 使人諭之, 若或不聽, 則命將致討, 亦不難也。" 李繼孫呂自新李孟賢議: "野人性本狡詐, 雖多方曉諭, 不肯聽從, 不可以恩信懷服。 今吾乙之哈等, 容隱逋逃, 初不爲諱, 終以出去爲辭, 其反覆詐黠, 無所畏忌, 甚矣。 觀其事勢, 非稱兵境上, 終無刷還之理。 且彼人居國近地, 世蒙國恩, 非深處野人之比。 北門號稱强兵, 而於蕞爾小醜, 尙且疑畏, 不卽擧兵問罪, 則彼必以爲: ‘怯弱而畏我也’, 益肆桀黠之心, 任爲逋逃之主。 非徒虧損國威, 邊患滋蔓, 終難制矣。 抄兵問罪, 以揚國威, 以懲後來何如?" 世恭議: "臣前日議以爲: ‘可征。’ 今觀有沼所啓, 終非恩信可服, 入征何如?" 上覽其議, 命宰相等皆就前, 更問刷還便否。 世恭繼孫對曰: "莫如迨氷未泮入攻, 以揚國威。" 昌孫弼商曰: "前日楊汀等兵敗, 喪我人甚多, 不可輕動。 待秋徐圖之, 可也。" 許琮曰: "逃人所至, 必有酋長。 其酋長若出來, 捕囚于獄, 期以盡數刷還, 然後放之, 則彼人族屬, 必能盡還矣。" 李坡曰: "囚酋長, 甚不可。 酋長非一, 豈能盡捕? 雖囚一酋長, 固無益於刷還, 徒失國信。" 弼商曰: "作舍道傍, 三年不成, 莫如斷自宸聰耳。" 上曰: "有沼則今可上來。 來秋不可不入攻, 臨時處置, 出其不意, 以圖萬全, 可也。"


  • 【태백산사고본】 22책 150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425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왕실-행행(行幸) / 왕실-경연(經筵) / 외교-야(野) / 호구-이동(移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