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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42권, 성종 13년 6월 11일 무신 2번째기사 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행 지중추부사 양성지의 졸기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양성지(梁誠之)가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하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양성지의 자(字)는 순부(純夫)이고, 남원인(南原人)이며, 증 의정부 우찬성(贈議政府右贊成) 양구주(梁九疇)의 아들이다. 정통(正統)431) 신유년432) 진사(進士)·생원(生員) 시험에 합격하고, 또 문과(文科)에 제 2인으로 합격하여 처음에 경창부 승(慶昌府丞)에 제수되었다가, 성균 주부(成均主簿)로 옮겼다. 임술년433) 에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임명(任命)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되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어느 날 세조(世祖)가 상참(常參)에서 술자리를 베푸니, 양성지가 아뢰기를, ‘성체(聖體)를 상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모름지기 절주(節酒)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오직 그대가 나를 아낀다.’ 하고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加)하도록 명하였다. 이 해에 집현전이 파(罷)해지자, 임금이 세자 좌보덕(世子左輔德)으로 옮기게 하였다. 박팽년(朴彭年) 등이 주살(誅殺)되자, 사람들이 ‘양성지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니, 반드시 그들과 더불어 공모했을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이 때를 당하여 사람으로서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양성지는 이러한 일이 없었을 것을 보증한다.’ 하였다. 경진년434)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에 승진되었다가, 신사년435) 가정 대부(嘉靖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계미년436)양성지가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서적(書籍)을 간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양성지를 제학(提學)으로 삼고,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가(加)하였다. 갑신년437) 에 구현시(求賢試)에 합격하니, 세조가 일러 말하기를, ‘사람은 모두 경(卿)을 오활(迂闊)438) 하다고 하나, 나는 경과 서로 아낀다.’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제수했다가 얼마 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하였다. 병술년439)발영시(拔英試)440) 에 합격하고, 무자년441)《세조실록(世祖實錄)》 찬수(撰修)에 참여하였다. 성화(成化) 기축년442) 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전임(轉任)되고, 신묘년443) 에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고, 남원군(南原君)으로 봉하였다. 정유년444) 에 다시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가, 대관(臺官)의 논박(論駁)을 받고서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바뀌고, 신축년445) 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2품 이하의 당상(堂上) 문신(文臣)을 전정(殿庭)에 모아서 시(詩)와 논(論) 각 1편 씩을 시험하였는데 양성지가 장원을 차지하였으므로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초배(超拜)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시호(諡號)를 문양(文襄)이라 하였는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일로 인하여 공이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한다. 양성지는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박람 강기(博覽强記)446) 하고, 촉문(屬文)447) 을 잘하였으나, 혈후(奊詬)448) 하여 부끄러움이 없고, 겁나(怯懦)449) 하여 절조가 없었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을 때에 동렬(同列)들이 그를 더럽게 여겨 배척하여 함께 말을 하지 아니하였으며, 오랫동안 춘추관(春秋館)에 있었는데, 무릇 부탁이 있으면 요하(僚下)로 하여금 간략하게 글로 적게 하였다. 뒤에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전교서(典校署)의 제조(提調)가 되었는데 대중(臺中)에서 말할 일이 있어도 그대로 전교서에 앉아서 관여하지 아니하였다. 세조가 혹 자기 뜻을 거역한다 하여 대관(臺官)을 국문할 때에도 반드시 이르기를, ‘내가 양성지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였을 줄 안다.’고 하여 특별히 국문을 면하게 하였다. 그가 이조(吏曹)·공조(工曹)의 판서(判書)로 있을 때에 동취(銅臭)450) 라는 말이 파다하였으며, 말(馬)을 뇌물로 주는 자는 말편자를 박아 준다고 칭탁하고서 바치고 채단(彩段)을 뇌물로 바치는 자는 돗자리로 싸서 주므로, 그때 사람들이 이를 기롱하여 말하기를, ‘말발굽에 돈이 들어 있고 돗자리 속에 비단이 들어 있다.’고 하고, 또 오마(五馬)451) 의 조롱도 있었다. 혹자(或者)는 ‘말발굽에 돈이 들었고 돗자리에 채단이 들었다는 말은 곧 다른 재상을 가리킨 것이고 양성지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미워하여 하류(下流)에 둔 것은 이러한 것 때문이었다.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하자 양성지김수온(金守溫)·오백창(吳伯昌)과 상소(上疏)하여 논공 행봉(論功行封)을 청하여 드디어 좌리 공신에 참여하였다. 일찍이 당(唐)나라·송(宋)나라의 율시(律詩) 수십 수(首)를 초(抄)하여 《정명시선(精明詩選)》이라 이름을 붙여서 올리고 후한 상(賞)을 받았다. 그리고 상서(上書)하여 건론(建論)452) 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모두 오활(迂闊)하여 쓸 만한 것이 못되었다. 어느 날 봉장(封章) 십여 통(通)을 가지고 춘추관(春秋館)의 요속(僚屬)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평소에 아뢴 것인데 《사기(史記)》와 아울러 기록할 만하다.’고 하였으나, 여러 요속들이 증빙할 것이 없다는 것으로써 비난하자 양성지가 오히려 비밀히 청탁하였는데, 마침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크게 화를 내면서 자책(自責)하여 이르기를, ‘노부(老夫)는 쓸모가 없도다.’ 하고, 뒤에 곧 전후(前後) 소장(疏章)을 모아 집에서 간행하고, 이름을 《남원군주의(南原君奏議)》라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세조(世祖)께서 나를 왕좌지재(王佐之才)453) 가 될 만하고, 제갈량(諸葛亮)과 견주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듣는 자들이 광릉(光陵)454) 의 하교(下敎)가 농담[調戲]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14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342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431]
    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 [註 432]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 [註 433]
    임술년 : 1442 세종 24년.
  • [註 434]
    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435]
    신사년 : 1461 세조 7년.
  • [註 436]
    계미년 : 1463 세조 9년.
  • [註 437]
    갑신년 : 1464 세조 10년.
  • [註 438]
    오활(迂闊) : 사정에 어둡고 실용에 적합하지 않음.
  • [註 439]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 [註 440]
    발영시(拔英試) : 조선조 7대 세조 때 임시로 베푼 과거. 세조 12년(1466) 단오절에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을 모아 술을 내리고 친히 글을 지으며 베풀었는데, 이때 선발에 합격한 사람이 40인이었음.
  • [註 441]
    무자년 : 1468 예종 즉위년.
  • [註 442]
    성화(成化)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 [註 443]
    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444]
    정유년 : 1477 성종 8년.
  • [註 445]
    신축년 : 1481 성종 12년.
  • [註 446]
    박람 강기(博覽强記) : 동서고금의 책을 두루 읽고 잘 기억함.
  • [註 447]
    촉문(屬文) : 문장을 얽어서 지음.
  • [註 448]
    혈후(奊詬) : 식견이 없음.
  • [註 449]
    겁나(怯懦) : 겁이 많고 나약함.
  • [註 450]
    동취(銅臭) : 돈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란 뜻으로, 돈으로 벼슬을 산 사람을 조소하는 말로도 쓰이고, 돈을 욕심내어 꼭꼭 모아 두는 사람을 기롱하는 말로도 쓰임.
  • [註 451]
    오마(五馬) : 한(漢)나라 때에 태수(太守)의 수레는 다섯 필의 말이 끌었으므로, 오마(五馬)라고 부르게 된 고사임.
  • [註 452]
    건론(建論) : 의논을 세움.
  • [註 453]
    왕좌지재(王佐之才) : 제왕을 도울 만한 재주. 즉 재상이 될 만한 인물.
  • [註 454]
    광릉(光陵) : 세조.

○行知中樞府事梁誠之卒。 輟朝、弔祭、禮葬如例。 誠之純夫, 南原人, 贈議政府右贊成九疇之子也。 正統辛酉, 中進士、生員, 又中文科第二人, 初授慶昌府丞, 遷成均(注)〔主〕 簿。 壬戌, 拜集賢殿副修撰, 累陞至直提學。 一日世祖於常參設酌, 誠之啓曰: "恐傷聖體。 請須節酒。" 世祖曰: "惟汝愛我。" 命加通政。 是年罷集賢殿, 遷世子左輔德。 朴彭年等誅, 人告誠之憂恐, 必與其謀。 世祖曰: "當此時, 人誰不懼? 誠之保無此事。" 庚辰, 陞嘉善同知中樞院使, 辛巳, 陞嘉靖同知中樞府事。 癸未, 誠之請設弘文館, 以藏書籍, 上從之, 以誠之爲提學加資憲。 甲申, 中求賢試, 世祖謂曰: "人皆以卿爲迂闊, 然我與卿相愛。" 除吏曹判書, 尋拜司憲府大司憲。 丙戌, 中拔英試, 戊子, 參修《世祖實錄》成化己丑, 輔工曹判書, 辛卯, 賜純誠明亮佐理功臣號, 封南原君。 丁酉, 復除大司憲, 爲臺官所駁, 遞爲工曹判書, 辛丑, 拜知中樞府事。 上會二品以下堂上文臣于殿庭, 試詩、論各一篇, 誠之居魁, 超拜崇政, 至是卒, 年六十八。 諡文襄, 勤學好問: ‘文;’ 因事有功 ‘襄。’ 誠之少好學, 博覽强記, 善屬文, 然奊詬無恥, 怯懦無節。 嘗在集賢殿, 同列鄙之, 擯不與語, 久在春秋館, 凡有干請, 使僚下書其簡。 後以大司憲, 爲典校署提調, 臺中有言事, 輒坐典校, 而不與焉。 世祖或以忤旨鞫臺官, 必曰: "吾知誠之不爲是也。" 特免。 問其判吏、工曹, 銅臭騰播, 賂馬者, 托言釘蹄而歸之, 賂彩段者, 包以席, 時人譏之曰: "馬蹄加鐵, 席裏有段。" 又有五馬之誚。 或者謂: "釘蹄席段之語, 乃指他相, 非誠之也。" 人之惡居下流以此。 上卽位, 誠之金守溫吳伯昌上疏, 請論功行封, 遂參佐理功臣。 嘗抄律詩數十首, 名曰精明詩選以進, 受厚賞。 好上書建論, 皆迂闊不可用。 一日以封章十餘通, 示春秋僚屬曰: "是余平昔所奏也, 可幷載史。" 諸僚以無據驗難之, 誠之猶密囑, 竟不得, 大怒自責曰: "老夫無用。" 後乃裒集前後疏章, 開刊於家, 名曰《南原君奏議》。 嘗自言: "世祖稱我, 爲王佐之才, 至比諸葛亮。" 聞者知光陵之敎, 出於調戲。


  • 【태백산사고본】 21책 14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342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