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부원군 김수온의 졸기
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 김수온(金守溫)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예장(禮葬)하기를 예(例)대로 하였다. 김수온의 자(字)는 문량(文良)이고, 본관은 영동(永同)이며,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훈(金訓)의 아들이다. 김수온은 나면서부터 영리하고 뛰어나 정통(正統)무오년378) 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신유년379)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에 보임(補任)되었다. 세종이 그 재주를 듣고 특별히 명하여 집현전(集賢殿)에 사진(仕進)하게 하고,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수찬(修撰)하는 일에 참여하게 하였다. 임금이 때때로 글제를 내어 집현전의 여러 유신(儒臣)을 시켜 시문(詩文)을 짓게 하면, 김수온이 여러 번 으뜸을 차지하였다.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지내고, 경태(景泰)경오년380) 에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특별히 제수되고, 신미년381) 에 수전농시 소윤(守典農寺少尹)이 되고, 임신년382) 에 외임(外任)으로 나가 지영천 군사(知榮川郡事)가 되고, 병자년383) 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천순(天順)정축년384) 에 중시(重試)385) 에서 제2인으로 입격(入格)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발탁되었다. 그때 김수온이 어머니를 성문(省問)하러 영동현(永同縣)에 가는데, 세조가 중사(中使)를 보내어 한강(漢江)에서 술을 내리고 임영 대군(臨瀛大君)·영응 대군(永膺大君)과 여러 군(君)들에게 명하여 가서 전송하게 하였다. 무인년386)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제배(除拜)되고, 기묘년387) 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한성부 윤(漢城府尹)에 오르고, 경진년388) 에 외임(外任)으로 나가 판상주목사(判尙州牧事)가 되고, 갑신년389) 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다가, 이윽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제배되었다. 성화(成化)병술년390) 에 발영시(拔英試)391) 에 으뜸으로 입격하여 특별히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가자(加資)받고, 또 등준시(登俊試)392) 에 으뜸으로 입격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다. 세조가 김수온의 집이 가난하다 하여, 사옹원(司饔院)과 여러 관사(官司)를 시켜 경연(慶宴)을 준비하게 하고, 의정부(議政府)의 여러 정승들에게 명하여 궁온(宮醞)을 가져가서 압연(押宴)393) 하게 하고, 또 중사를 보내어 서대(犀帶)·금낭(錦囊)·나(羅)·기(綺)·의복·화(靴)·모(帽) 따위의 물건 40여 건(件)과 안마(鞍馬)394) 와 쌀 10석(碩)을 내렸다. 우리 조정에서 과거(科擧)를 설치한 이래로 급제의 영광에 이런 전례가 없었으며,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장원(壯元)에게 쌀을 내리는 것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무자년395) 에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기축년396) 에 금상(今上)397) 이 즉위하여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를 가자하고, 신묘년398) 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封)하고, 갑오년399) 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배하고, 정유년400) 에 다시 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이때에 졸(卒)하였는데 73세이다. 시호(諡號)는 문평(文平)인데, 배움이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고, 은혜로우나 내덕(內德)401) 이 없음이 평(平)이다. 김수온은 서사(書史)를 널리 보아 문장이 웅건(雄健)하고 소탕(疏宕)402) 하며 왕양(汪洋)403) 하고 대사(大肆)404) 하여 한때의 거벽(巨擘)405) 이었다. 전에 명(明)나라 사신 진감(陳鑑)의 희청부(喜晴賦)에 화답(和答)하여 흥을 돋우고 기운을 떨쳤는데, 뒤에 김수온이 중국에 들어가니, 중국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지칭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희청부에 화답한 사람이다.’ 하였다. 세조가 자주 문사(文士)를 책시(策試)406) 하였는데, 김수온이 늘 으뜸을 차지하였다. 전에 원각사 (圓覺寺)비명(碑銘)을 지었는데, 주문(主文)407) 한 자가 많이 고친 것을 김수온이 보고 말하기를, ‘대수(大手)가 지은 것을 소수(小手)가 어찌 능히 고치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신미(信眉)의 아우로서 선학(禪學)에 몹시 빠져 부처를 무턱대고 신봉하는 것이 매우 심하였다. 전에 회암사(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다가 그만두었는데, 그의 궤행(詭行)408) 이 이러하였다. 또 자신을 단속하는 규율이 없어, 혹 책을 깔고 그 위에서 자기도 하고, 포의(布衣)를 입고 금대(金帶)를 띠고 나막신을 신고서 손님을 만나기도 하였다. 성품이 오졸(迂拙)409) 하고 간국(幹局)410) 이 없어 치산(治産)에 마음을 두었으나, 계책이 매우 엉성하였고, 관사(官事)에 처하여서는 소략하여 지키는 것이 없어 글하는 기상(氣象)과는 아주 달리 하므로, 조정(朝廷)에서 끝내 관각(館閣)411) 의 직임을 맡기지 않았으며, 양성지(梁誠之)·오백창(吳伯昌)과 함께 상서하여 공신으로 봉해 주기를 청하여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되었다. 일찍이 괴애(乖崖)라 자호(自號)하였고, 《식우집(拭疣集)》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30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224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註 378]무오년 : 1438 세종 20년.
- [註 379]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380]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註 381]
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註 382]
임신년 : 1452 문종 2년.- [註 383]
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384]
정축년 : 1457 세조 3년.- [註 385]
중시(重試) : 이미 과거에 급제한 조정의 관리들에게 다시 보이던 시험. 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정 3 품 당상관(堂上官)에 승진시켰음.- [註 386]
무인년 : 1458 세조 4년.- [註 387]
기묘년 : 1459 세조 5년.- [註 388]
경진년 : 1460 세조 6년.- [註 389]
갑신년 : 1464 세조 10년.- [註 390]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註 391]
발영시(拔英試) : 세조 때 임시로 베푼 과거. 세조 12년(1466) 단오절에 종친과 문무 백관을 모아 술을 내리고 친히 글을 지으며 베풀었는데, 이때 선발에 합격한 사람은 김수온 등 모두 40인이었음.- [註 392]
등준시(登俊試) : 세조 때에 특별히 베푼 과거. 세조 12년 7월에 종친과 재상 이하의 문관으로서 장원하는 사람을 시험보게 하였는데, 이때 김수온 등 12인을 선발하였으며, 그 뒤 9월에 무과 등준시에서 최적(崔適) 등 모두 51인을 선발하였음.- [註 393]
압연(押宴) : 잔치를 관리함.- [註 394]
안마(鞍馬) : 안장 갖춘 말.- [註 395]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註 396]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註 397]
금상(今上) : 성종을 가리킴.- [註 398]
신묘년 : 1471 성종 2년.- [註 399]
갑오년 : 1474 성종 5년.- [註 400]
정유년 : 1477 성종 8년.- [註 401]
내덕(內德) : 안으로 갖춘 덕.- [註 402]
소탕(疏宕) : 도량이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음.- [註 403]
왕양(汪洋) : 문장의 기세가 충만하고 큼.- [註 404]
대사(大肆) : 매우 거침 없음.- [註 405]
거벽(巨擘) : 대가(大家).- [註 406]
책시(策試) : 책문(策問)으로 시험함.- [註 407]
주문(主文) : 문사를 주관함. 시험관.- [註 408]
궤행(詭行) : 상도(常道)를 벗어난 행동.- [註 409]
○庚戌/永山府院君 金守溫卒。 輟朝、弔祭、禮葬如例。 守溫字文良, 永同人, 贈領議政訓之子也。 守溫生而穎秀, 正統戊午, 中進士, 辛酉, 中文科, 補校書正字。 世宗聞其才, 特命仕集賢殿, 預撰《治平要覽》。 上時時命題, 令集賢諸儒製詩文, 守溫屢居首。 歷訓鍊主簿、承文校理, 景泰庚午, 特除兵曹正郞, 辛未, 守典農少尹, 壬申, 出知榮川郡事, 丙子, 除成均司藝。 天順丁丑, 中重試第二人, 擢通政僉知中樞院事。 時守溫省母永同縣, 世祖遣中使, 賜醞于漢江, 命臨瀛大君、永膺大君及諸君, 往餞之。 戊寅, 拜嘉善同知中樞院事, 己卯, 陞嘉靖漢城府尹, 庚辰, 出判尙州牧事, 甲申, 資憲知中樞院事, 俄拜工曹判書。 成化丙戌, 魁拔英試, 特加崇政, 又魁登俊試, 陞判中樞府事。 世祖以守溫家貧, 命司饔院諸司, 供辦慶宴, 命政府諸相, 齎宮醞往押宴, 又遣中使, 賜犀帶、錦囊、羅、綺、衣服、靴、帽等物四十餘件, 鞍馬及米十碩。 自國朝設科以來, 登第之榮, 無此比也。 文武科壯元賜米, 自此始。 戊子, 陞崇祿, 己丑, 上卽位, 加輔國, 辛卯, 賜純誠佐理功臣號, 封永山府院君, 甲午, 拜領中樞府事, 丁酉, 復封永山府院君。 至是卒, 年七十三。 諡文平, 學勤好問: ‘文;’ 惠無內德 ‘平。’ 守溫博覽書史, 爲文雄健疏宕, 汪洋大肆, 爲一時巨擘。 嘗和大明使陳鑑喜晴賦, 蹈厲發越, 後守溫入朝, 華士爭指之曰: "此是和喜晴賦者耶。" 世祖屢策試文士, 守溫輒居魁。 嘗撰圓覺寺碑銘, 主文者多有刪改, 守溫見之曰: "大手所作, 小手其能竄改乎?" 然以信眉之弟, 酷耽禪學, 侫佛太甚。 嘗投檜巖寺, 欲爲髡不果, 其詭行如此。 又無檢身之律, 或鋪書籍, 寢處其上, 或衣布, 加金帶履屐見客。 性迂拙無幹局, 有心治産, 而居計甚疏, 處官事, 闊略無執守, 殊不類爲文氣象, 朝廷終不以館閣之任畀之, 與梁誠之、吳伯昌, 上書請封功臣, 得參佐理。 嘗自號乖崖, 有《拭疣集》行于世。
- 【태백산사고본】 19책 130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224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註 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