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령 이감 등이 강상죄를 범한 최습을 사면하지 말 것 등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이감(李堪)·정언(正言) 신경(申經)이 신정(申瀞)의 관찰사(觀察使) 직임을 경질(更迭)하도록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이감이 또 아뢰기를,
"최습(崔習)은 처(妻)의 삼촌 질녀(姪女)를 강간하였는데, 지금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므로 사면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사면하는 글에 이르기를, ‘강상에 관계되는 것은 제외한다.’ 하였으니, 최습의 죄는 당연히 용서하는 예(例)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이파(李坡)는 말하기를,
"처(妻)의 삼촌(三寸) 질녀를 강간한 것은 강상에 관계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중하므로 사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대사(大赦)를 지냈기 때문에 그를 용서한 것이다. 그러나 죄가 정말 중하니,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모두 말하기를,
"윤당(允當)합니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창신(李昌臣)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 민가(民家)를 철거시킨다는 일을 듣고, 궁궐(宮闕)을 임압(臨壓)한 집들뿐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들으니, 산맥(山脈)과 산등성이의 집을 모두 철거하도록 하여 그 수가 1백 99동에 이른다고 합니다. 임압한 집은 당연히 철거하여야 하겠지만, 산등성이에 있는 집을 철거하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대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거취(去就)는 덕(德)이 있고 없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리(地理)의 학설은 당(唐)·우(虞)076) 와 삼대(三代)077) 이전부터 일삼은 것은 아니며, 바로 후세의 술가(術家)078) 가 만든 것입니다. 지금 대신(大臣)과 대간(臺諫)들이 간혹 말을 하고자 하면서도 감히 못하는 것은 자제(子弟)와 친척(親戚)의 집이 철거 대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의 족친(族親)과 처남 부윤정(富潤正)의 집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어찌 감히 혐의를 피하여 말하지 않겠습니까? 옛부터 명성(明聖)한 임금이 계속하여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모든 것을 반드시 정법(正法)으로 하시기를 기대하였는데, 근자에 음양(陰陽)의 학설을 쓰실 줄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정말 이창신의 말과 같습니다. 신의 족친의 집도 철거 대상 중에 있으므로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리(地理)로 인해 화복(禍福)을 〈초래한다는〉 학설을 신이 모르긴 합니다만, 중국 같은 경우는 넓은 들이 평탄하므로 인용하여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송도(松都)079) 를 보건대 고려(高麗)는 비록 본받을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5백 년 도읍지(都邑地)에 산록(山麓)이 판국(版局) 안을 가로지른 것이 〈한양(漢陽)〉 도읍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는데도 산맥(山脈)과 산등성이에 집을 지은 사람이 많았으니, 금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궁궐(宮闕)을 임압(臨壓)하는 것이라면 철거시키는 것이 옳겠지만, 무릇 산맥과 산등성이의 집을 일제히 철거시킨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자, 이파(李坡)가 말하기를,
"신의 친척 집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뢰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었습니다. 지리 풍수(地理風水)의 학설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태종(太宗) 때에 모든 술가(術家)·잡기(雜技)의 서적은 일제히 태워버리고, 그대로 둔 것은 오직 《사대길신(四大吉神)》·《극택통서(剋擇通書)》뿐이니, 지리의 학설을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제 철거시키야 할 집이 거의 2백이나 되니, 그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리 풍수(地理風水)의 학설은 조종(祖宗)께서는 쓰지 않은 것인데, 나에 이르러 처음으로 나온 것인가? 조종조(祖宗朝)에도 산맥(山脈)을 짓밟거나 집을 짓는 자를 금지하였다. 그런데 근자에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기를 거리낌없이 하여 산을 파거나 집을 짓는 자가 매우 많은데도 풍수학(風水學)이 인정(人情)으로 금하지 못하는 까닭에 내가 그들로 하여금 살펴보고 철거시키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지리의 학설을 망령된 것이라고 한다면 풍수학을 설치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무릇 사람의 장례(葬禮)에도 땅을 가릴 필요가 없고 구학(溝壑) 가운데 두어도 될 것이다."
하자, 이창신이 말하기를,
"만약 지리의 학설을 옳다고 하더라도 지기(地氣)는 물이 땅속에서 유행(流行)하는 것과 같아 어디를 가나 없는 곳이 없는데, 지금의 풍수학(風水學)이 심정(審定)080) 할 적에는 얼마 안되는 땅으로써 그 혈맥(血脈)을 분간한다는 것이 가(可)하겠습니까? 그 허탄(虛誕)하고 망령된 것이 분명합니다. 최호원(崔灝元)이 전에 대구 부사(大丘府使)가 되어 풍수(風水)의 학설을 믿고서 하천의 근원을 막고 백성들의 전지(田地)에다 수로(水路)를 만들어 그 곳으로 물이 흐르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한탄하므로 이명숭(李命崇)이 어사(御史)로서 안험(案驗)081) 하여 그를 파직(罷職)시켰습니다. 더구나 지금 1백 99가(家)를 하루아침에 모두 철거시킬 수 있겠습니까? 조정의 신하로서 사리를 아는 자라면 당연히 명령을 들은 즉시 헐어버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지(無知)한 필부(匹夫)들은 여러 해 동안 편안하게 살던 집을 하루아침에 헐어버리게 한다면, 그 원망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조종(祖宗)께서 산맥의 훼손을 금지한 것이 도성(都城)의 민가(民家)만이 아닙니다. 세종조(世宗朝)에 이현로(李賢老)가 말하기를, ‘삼각산(三角山)은 나라의 진산(鎭山)인데, 그 북록(北麓)을 활용하여 길을 만들고 내도 터놓았으니, 나라의 명당수(明堂水)에다 여러 사람들이 불결(不潔)한 것을 던져서 흐리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금지하게 하소서.’ 하니, 세종이 장차 그 말을 따르려고 하였는데, 집현전(集賢殿)에서 이치에 의거하여 논하였으므로 세종께서 그것을 옳게 여겨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리(地理)의 학설은 신이 비록 모르긴 하지만 허탄하고 망령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지리의 학설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치도(治道)에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무릇 사람이 죽으면 산을 가려서 매장(埋葬)하는 것은 〈매장할〉 땅이 두텁고 양지바른 곳인가를 고르는 것이며 화복(禍福)만을 따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자(儒者)의 학설은 참으로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음양(陰陽)의 학설도 모두 폐기(廢棄)할 수는 없다."
하였는데, 이창신이 말하기를,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에서도 모두 산을 가려서 매장을 합니다. 신 등이 전하(殿下)에게 지리의 학설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도읍(都邑) 안의 산맥 가까운 곳에 지은 집은 화복(禍福)의 학설에는 관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민사건(閔師鶱)이 아뢰기를,
"궁궐을 임압(臨壓)하고 있는 개인의 집은 모두 철거하도록 하면서 내불당(內佛堂)·복세암(福世菴) 등의 절은 가장 〈궁궐을〉 임압하는 곳인데도 철거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니, 전하께서 비록 불교(佛敎)를 숭상하고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세(後世)에 논의(論議)가 있을 듯합니다."
하고, 이창신은 말하기를,
"술가(術家)의 말이 정말 이치가 있는 듯하나, 신(臣)이 문벌가(門閥家)를 보건대, 모두 한 도국(圖局) 내에 장사를 지내어 총토(塚土)082) 가 겹겹이 있습니다. 신이 그 지리(地理)가 온전하지 않을 것을 의심하여 술가(術家)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본래 같은 겨례이므로 지기(地氣)가 서로 통한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도읍에서 살고 있는 백성은 모두 전하의 적자(赤子)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섞여 살게 하는 것이 무슨 불가(不可)함이 있겠습니까? 옛날 진(秦)나라와 서한(西漢)·서진(西晉)은 장안(長安)에 도읍(都邑)을 정하였고, 동한(東漢)·위(魏)·수(隋)나라는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진(晉)·송(宋)·제(齊)·양(梁)·진(陳)나라는 건강(建康)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운조(運祚)083) 는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길흉 화복(吉凶禍福)은 지리(地理)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리의 학설은 나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에서 그것을 쓴 지가 벌써 오래 되었으니, 음양서(陰陽書) 중 가장 긴요한 것을 내가 장차 보겠다."
하였다. 이창신(李昌臣)이 말하기를,
"지금 성명(聖明)084) 이 위에 계시므로 국가가 태평하여 왜구(倭寇)들이 가옥(家屋)을 태우거나 백성을 죽이거나 재물을 빼앗는 참상(慘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도성(都城)의 안 연곡지하(輦轂之下)085) 에서 수백여 명이 술가(術家)의 말 때문에 편안하게 거처하던 가옥을 헐리게 되어 울부짖는 소리가 길에까지 들리니, 이것이 어찌 성명의 세대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백성들의 근심과 원망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천천히 상량(商量)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2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19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역사-고사(故事) / 주생활-택지(宅地)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건설-토목(土木) / 풍속-예속(禮俗)
- [註 076]당(唐)·우(虞) : 요(堯)·순(舜) 시대.
- [註 077]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註 078]
술가(術家) : 술수(術數)에 정통한 사람.- [註 079]
송도(松都) : 개성(開城).- [註 080]
심정(審定) : 자세히 조사하여 정함.- [註 081]
안험(案驗) : 조사하여 증거를 세움.- [註 082]
총토(塚土) : 무덤.- [註 083]
운조(運祚) : 하늘로부터 받은 복조.- [註 084]
성명(聖明) : 제왕(帝王)의 고명함을 일컬음.- [註 085]
연곡지하(輦轂之下) : 임금이 타는 수레 밑이란 뜻으로 서울을 말함.○御經筵。 講訖, 掌令李堪、正言申經, 請遞申瀞觀察使之職, 不聽。 李堪又啓曰: "崔習, 强奸妻之三寸姪女, 而今蒙宥。 罪關綱常, 不可赦也。" 上問諸左右, 昌孫曰: "赦文曰: ‘關係綱常外, 則習之罪, 當不在原例。"’ 同知事李坡曰: "强奸妻之三寸姪女, 不可謂關係綱常。 然罪重不可赦也。" 上曰: "旣經大赦, 故宥之。 然罪果重矣, 當全家徙邊。" 僉曰: "允當。" 侍讀官李昌臣啓曰: "臣初聞民家撤去事, 意謂, 宮闕臨壓家舍而已, 今聞山脈山脊, 幷令撤去, 其數至於一百九十九。 臨壓家舍, 則當撤去, 在山脈家舍, 撤去未便。 大抵天命、人心之去就, 在於德與不德耳。 地理之設, 非唐、虞、三代以上之事, 乃後世術家之所爲也。 今大臣臺諫, 或有欲言, 而不敢者, 以子弟、親戚之家, 在撤去之中也。 臣族親及妻娚富潤正之家, 亦與焉。 然臣豈敢引嫌, 而不言? 自古明聖之君, 不世出。 臣常期聖上, 動必以法, 而不意今者, 用陰陽之說也。" 上顧問左右, 昌孫曰: "果如昌臣之言。 臣族親家, 亦在撤中, 故未敢啓耳。 地理禍福之說, 臣未之知也, 中原, 則平衍廣野, 不可援以爲言。 以我國松都觀之, 高麗雖不足法也, 五百年都邑之地, 山麓橫走於局內者, 比此都倍之, 而家於山脈山脊者, 亦多有之, 知其不禁也。 若臨壓宮闕, 則撤之可也, 凡山脈山脊之家, 一切撤去未便。" 李坡曰: "臣之親戚家, 亦有之。 故欲啓, 而不能。 地理風水之說, 臣未之知也, 然太宗時, 凡術者雜技之書, 一切焚之, 所存者, 惟《四大吉神》、《剋擇通書》而已, 其不用地理之說, 明矣。 今撤去之家, 幾二百, 其弊不小。" 上曰: "地理風水之說, 祖宗所不用, 而至於予身, 始出歟? 祖宗朝, 亦禁其山脈之踐踏與造家者。 今者下人, 慢上無忌, 堀山造家者, 甚多, 風水學, 亦以人情, 而不禁, 故予使之審視撤去。 若以地理之說, 爲妄也, 則風水學, 不必設也, 凡人之葬, 不必擇地, 而置溝壑中, 可也。" 昌臣曰: "若以地理之說爲可, 則地氣猶水之流行於地中, 無所往而不在, 今風水學之審定也。 以尺寸之土, 而分其穴脈, 可乎? 其爲誕妄, 明矣。 崔灝元, 前爲大丘府使, 信風水之說, 壅其川源, 濬民之田而導之, 民咸怨咨, 李命崇, 以御史, 案驗罷黜之。 況今百九十九家, 一朝盡撤乎? 如朝臣之識理者, 固當聞命卽毁。 至如匹夫無知之人, 以積年安居之室, 一朝而毁之, 其怨, 可勝言哉? 且祖宗之禁山脈者, 非都城民家也。 世宗朝李賢老言: ‘三角, 國之鎭山, 其北麓用之, 而成路開川, 國之明堂水, 群投不潔, 使之溷濁。 請禁之。’ 世宗將從其說, 集賢殿據理論之, 世宗嘉納之。 地理之說, 臣雖不識, 決知其誕妄也。 雖不用地理之說, 其於治道何害? 凡人之死, 看山埋葬者, 擇其土厚向陽之處也, 非獨以禍福也。" 上曰: "儒者之說, 則固當如是。 然陰陽之學, 不可盡廢也。" 昌臣曰: "士大夫之家, 皆看山埋葬。 臣等非欲殿下, 不用地理之說也。 但都內山脈近處造家, 則非關於禍福之說也。" 檢討官閔師騫啓曰: "宮闕臨壓私家, 則皆令撤去, 而內佛堂、福世菴等寺, 最臨壓, 而不與撤去之中, 殿下雖非崇信佛敎, 然於後世, 恐有議焉。" 昌臣曰: "術家之言, 果若有理, 臣觀門閥之家, 皆葬一圖局之內, 塚土壘壘。 臣疑其地理之不全, 問諸術家, 則曰: ‘本是一族, 地氣相通。’ 以此觀之, 都邑所居之民, 皆殿下赤子。 使之雜居, 有何不可? 昔者秦及西漢、西晋, 都于長安, 東漢、魏、隋, 都于洛陽, 晋、宋、齊、梁、陳, 都于建康。 然而運祚不一。 然則吉凶禍福, 不在地理也。" 上曰: "地理之說, 予亦不識。 然國家用之已久, 其陰陽書之最要者, 予將覽焉。" 昌臣曰: "方今聖明在上, 國家昇平, 非有倭寇焚蕩廬室, 殺掠人民之慘。 而都城之內, 輦轂之下, 數百餘人, 以術家之言, 見毁安居之室廬, 號哭之聲, 相聞於道, 此豈聖明之世, 所宜有也?" 上曰: "予亦知民之愁怨。 徐當商量焉。"
- 【태백산사고본】 19책 12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19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역사-고사(故事) / 주생활-택지(宅地)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건설-토목(土木) / 풍속-예속(禮俗)
- [註 0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