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명소하여 장리들에게 직첩을 되돌려 주는 일 등을 의논하게 하다
재상(宰相)을 명소(命召)하여 장리(贓吏)들에게 직첩을 되돌려 주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조보(趙普)의 말을 어떻게 본받을 만하겠습니까? 지난번 의논에 의거하여 되돌려 주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변수(邊脩)·성현(成俔)·채수(蔡壽)·이길보(李吉甫)·이공(李拱)은 의논하기를,
"무릇 장죄를 범한 사람은 영구히 서용하지 못하게 하고 그 자손은 금고(禁錮)시키게 되어 있으니, 큰 은혜를 내려 줄 적에 직첩을 돌려주어도 가할 것입니다."
하니, 정창손 등의 의논에 따랐다.
그리고 의시(議諡)052) 에 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정창손은 의논하기를,
"의시(議諡)는 옛부터 봉상시 박사(奉常寺博士) 1인이 독단(獨斷)으로 의정(議定)하였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때에〉 구양수(歐陽脩)가 무슨 일 때문에 그의 아들 구양비(歐陽棐)를 낙양(洛陽)에 보내게 되었는데, 막 떠나려 할 즈음에 그 아들에게 교훈(敎訓)하기를, ‘네가 낙양에 가거든 모름지기 소옹(邵雍)053) 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나의 뜻을 전하라.’ 하였는데, 구양비가 낙양에 가서 소옹을 찾아뵈니 소옹이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평생 사적(平生事跡)을 역서(歷敍)054) 하였습니다. 구양비가 돌아와서 얼마 되지 않아 태상 박사(太常博士)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낙양에서 소옹이 졸(卒)한 것을 상주(上奏)하고 시호를 청하여 태상에 회부되었을 때입니다. 구양비가 박사(博士)로서 의시하게 되었는데, 구양비가 시호를 짓기를 ‘강절(康節)’이라고 하고, 곧 이르기를, ‘내가 행장(行狀)을 보지 않고 시호를 지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의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박사가 단독으로 의정한 고사(故事)입니다. 본조(本朝) 세종조(世宗朝)에 《속육전(續六典)》을 편찬할 때에는 봉상 소윤(奉常少尹) 이하가 의정하고 제조(提調)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윤(尹)과 판사(判事)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의정하는 사람이 많으면 사사로운 의사가 섞여서 공정하지 않을 듯해서였습니다. 지금 만약 춘추관(春秋館)과 함께 의정하게 한다면 옛법과 본조의 제도에 어긋나니, 예전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심회·윤필상·이극배는 의논하기를,
"의시하는 담당 관서(官署)는 예전에는 태상시(太常寺)였으며, 지금은 봉상시(奉常寺)입니다. 그래서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내려오면서 옛제도에 의거하여 대신(大臣)이 졸(卒)하면 반드시 봉상시에 명령하여 행장을 근거로 의의(擬議)하게 하여 낙점(落點)을 받게 하였으므로, 선악(善惡)이 빠뜨려지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간혹 사실이 아닌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일시(一時)의 잘못으로 선왕(先王)의 옛제도를 변경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과연 경(卿) 등의 의논과 같다. 의시하는 사람이 참되고 올바르다면 무엇 때문에 사사로운 것을 생각한다고 근심하겠는가? 예전대로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그리고 야인(野人) 아망개(阿忘介)에 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심회·윤필상·이극배·이파·김자정은 의논하기를,
"아망개가 지난 임진년055) 에 나왔으므로 국가에서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말하기를, ‘명년에 회령(會寧) 성밑의 옛땅에 돌아와 살면서 힘을 다하여 섬기겠습니다.’라고 정녕(丁寧)하게 말을 하였는데, 되돌아간 뒤로 지금까지 오지 않으니, 그의 의사(意思)를 알 만합니다. 아무리 서찰을 보내어 효유(曉諭)하여서 나오게 하지만,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중국에 죄를 지었으니, 만일 이 서찰이 요동(遼東) 등지에 전파되고 또 중국에서 그것으로 인하여 알게 되면 틀림없이 우리 나라에서 그들을 불러 들여 회유(懷綏)하려 한다고 할 것이므로, 혹시라도 책망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또 아합(阿哈)은 직첩 아망개에게서 물건을 받은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받았으므로 또한 믿을 만한 서신(書信)도 없습니다. 그러나 서신을 부친다 하더라도 중간에서 전달되고 안되는 것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예조(禮曹)에서 통사(通事)로 하여금 그의 어미가 보고 싶어한다는 뜻을 말로 전달하게 하고, 또 그 어미로 하여금 모자(母子)간의 사사로운 인정을 진술하게 하여 서찰을 써서 부치게 한다면, 그가 오고 안오는 것은 국가의 대체(大體)에는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사학(四學) 유생(儒生)의 도회(都會)에 관한 일을 의논하게 하니, 정창손·심회·윤필상·이극배는 의논하기를,
"사학(四學) 도회(都會)의 법도[規矩]와 시취(試取)하는 일은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으며, 특별히 큰 폐단도 없으니, 예전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25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186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탄핵(彈劾) / 외교-야(野) / 역사-고사(故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52]의시(議諡) : 시호를 의정(議定)함.
- [註 053]
○命召宰相, 議贓吏職牒還給事。 鄭昌孫、沈澮、尹弼商、李克培議: "趙普之言, 何足法哉? 依前議, 勿給爲便。" 邊脩、成俔、蔡壽、李吉甫、李拱議: "凡犯贓者, 旣永不敍用, 子孫禁錮, 則大霈鴻恩之時, 雖給職牒可矣。" 從昌孫等議, 議議諡事, 鄭昌孫議: "議諡, 自古奉常博士一人, 獨議之。 昔(歐陽脩)〔歐陽修〕 , 以事送其子棐于洛陽, 將行, 敎之曰: ‘汝往洛陽, 須見邵雍, 問其寒暄, 幷致吾意。’ 棐往洛陽, 見邵雍, 雍無他語, 但歷敍平生事跡。 棐還到未幾, 拜太常博士, 洛陽奏邵雍卒, 請諡, 下太常時, 棐爲博士, 次當議諡, 棐諡曰康節, 仍云: ‘予不見行狀撰諡, 此則不與他人議之。’ 惟博士獨議之故事也。 本朝世宗朝, 撰《續六典》時, 奉常少尹以下議之, 不告提調, 而尹與判事, 亦不與焉, 議者多, 則恐其私意雜, 而不公也。 今若與春秋館同議之, 則有違古法與本朝之制, 仍舊爲便。" 沈澮、尹弼商、李克培議: "議諡之官, 古則太常, 今則奉常。 自祖宗朝以來, 依古制, 大臣之卒, 必令奉常, 據行狀, 擬議受點, 善惡不沒。 雖間有不得其實者, 以一時之誤, 變先王之舊制, 恐爲未可。" 御書: "果如卿等之議。 議諡者眞正人, 則何患懷私? 仍舊可。" 議野人 阿忘介事, 沈澮、尹弼商、李克培、李坡、金自貞議: "阿忘介, 去壬辰年出來, 國家待之甚厚。 其言曰: ‘明年會寧城底舊土, 還來居生, 效力事。’ 丁寧說道, 入歸後, 至今不來, 其意可知。 雖致書諭之使來, 恐無可來之勢。 況彼人等, 得罪上國, 若此書, 傳播遼東等處, 朝廷因而知之, 則必以我國, 爲招來懷綏之也, 恐或有責。 且阿哈, 非親受物於阿忘介, 傳傳受來, 又無信書。 雖付書, 其中間傳與不傳, 亦未可知也。 但禮曹, 令通事, 傳說其母欲見之意。 且令其母, 開陳思想之情私, 修書付送, 則來與不來, 無關國家大體。" 議四學儒生都會事, 鄭昌孫、沈澮、尹弼商、李克培議: "四學都會規矩試取之事, 載在《大典》, 別無巨弊, 仍舊何如?" 皆從之。
- 【태백산사고본】 19책 125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186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탄핵(彈劾) / 외교-야(野) / 역사-고사(故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