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를 책봉하고 교명·책보·명복을 내려 주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니, 백관(百官)이 사배(四拜)를 마쳤다. 임금이 왕비를 책봉(冊封)하고 교명(敎命)·책보(冊寶)·명복(命服)을 정사(正使)인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부사(副使)인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철견(李鐵堅)에게 주어 인정문(仁政門)을 경유하니,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는데, 다음은 교명(敎命)이고, 다음은 옥책(玉冊)이고, 다음은 보(寶)이고, 다음은 의장(儀仗)이었다. 사자(使者)가 수행하여 선정문(宣政門) 밖 막차(幕次)에 이르니, 왕비가 선정전(宣政殿) 월랑(月廊)의 배위(拜位)에 나아가 교명(敎命)·책보(冊寶)·명복(命服)을 받았는데, 그 교명에 이르기를,
"옛부터 제왕(帝王)은 반드시 현비(賢妃)를 가려서 세우는데, 이는 종묘(宗廟)를 받들어 집안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아! 내가 어린 몸으로 왕업(王業)을 이어받아 거의 내치(內治)의 도움에 의뢰하였었는데, 많은 문제가 있음으로 해서 중궁(中宮)의 자리가 두 번씩이나 비었었다. 생각하면 곤위(坤位)는 오랫동안 비워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대 윤씨(尹氏)는 명문(名門) 출신으로 숙덕(淑德)을 갖추어 어려서 궁궐에 들어와 일찍부터 드러나게 알려진 바가 있었으므로, 이에 의지(懿旨)를 받들어 왕비(王妃)로 책봉한다. 하늘과 땅의 덕이 합하는 것을 성인(聖人)이 이를 본받았는데, 이에 배필로 삼아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니, 은총의 칙명(勅命)을 받들어 힘쓰도록 하라."
하였고, 옥책(玉冊)에 이르기를,
"법(法)을 세워 백성이 잘 살게 하는 것은 오로지 외부의 보필(輔弼)에만 의뢰함이 아니며,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반드시 중궁[中闈]에게 힘입게 된다. 이에 옛 법에 따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하여 선양한다. 그대 윤씨(尹氏)는 단정하고 정숙하며 온화하고 공손하여, 후궁(後宮)으로 선발되자 궐안에 좋은 소문이 전파되었네. 삼전(三殿)502) 에게 귀여움을 받았으니 태임(太任)503) 의 휘음(徽音)을 이었고 나 한 사람을 보필하니, 거의 도산씨(塗山氏)504) 의 덕행(德行)과 같도다. 진실로 궁중[宮庭]의 기대에 부응(副應)하니, 유적(褕翟)505) 의 품위에 더욱 빛이 나는도다. 아! 갈담(葛覃)506) 의 근검(勤儉)한 풍속을 힘써 따르도록 하라. 계명(雞鳴)507) 의 경계(警戒)하는 말을 기다리겠노라."
하였다. 왕비가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하례(賀禮)를 의식(儀式)대로 받았는데, 그 악장(樂章)에 이르기를,
"장경(莊敬)하신 성후(聖后)는
하늘이 짝지워 주신 배필인데,
궐내(闕內)에 자리를 바로잡아
우리의 중궁(中宮)이 되셨네.
강원(姜嫄)508) 이 제곡(帝嚳)을 도운 것처럼
이비(二妃)509) 가 규(嬀)에서 일어난 것처럼
만년(萬年)이 지나도록
복록(福祿)을 누리소서."
하였다. 백관(百官)이 연영문(延英門) 밖에 나아가서 진하(陳賀)하였다.
왕비(王妃)가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는데, 그 전문에 이르기를,
"성화(成化)510) 11년(1480) 11월 초8일에 삼가 성상(聖上)의 은혜를 입어 첩(妾)을 왕비(王妃)로 책봉(冊封)하고, 곧 책명(冊命)과 인장(印章)을 내려 주시니, 감격(感激)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전문(箋文)을 받들어 사례합니다. 첩 윤씨(尹氏)는 진실로 황공(惶恐)하여 거듭 머리를 조아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옥책(玉冊)으로써 궁정(宮廷)에 선양(宣揚)하는 것은 요조(窈窕)511) 한 자질을 갖춘 이를 구하여 초궁(椒宮)의 자리에 나아가게 함이 마땅한데, 그릇되게 천박(賤薄)한 몸에 미치었습니다. 분수에 넘치는 일이므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품이 용렬하고, 문벌(門閥)이 비천하면서도 다행히 후궁(後宮)의 자리에 있었고, 분수에 넘치게 봉추(奉箒)의 대열에 있었는데, 외람되게 성상[震極]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감히 법가[刑家]의 의식을 바랐겠으며, 어찌 적복(翟服)의 영예와 홍호(鴻號)의 내리심을 받을 것을 기대하였겠습니까? 이는 대개 엎드려 도(道)로써 몸소 가르치셔서 은혜가 가까운 곳으로부터 미친 것을 만난 것입니다. 하늘[乾元]은 반드시 땅[坤元]에 의뢰하는 것이므로, 이에 시작을 엄정(嚴正)하게 해야 하며, 외치(外治) 또한 내치(內治)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이에 인륜의 시초를 삼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침내 잔약(孱弱)한 자질로 하여금 총명(寵命)을 얻게 하셨습니다. 삼가 마땅히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이남(二南)512) 의 아름다운 교화(敎化)를 찬미하며 너그럽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삼전(三殿)에게 휘음(徽音)을 이어받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23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172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註 502]삼전(三殿) : 정희 왕후(貞熹王后:世祖妃) 윤씨(尹氏)·소혜 왕후(昭惠王后:德宗妃) 한씨(韓氏)·안순 왕후(安順王后:睿宗妃) 한씨(韓氏)를 말함.
- [註 503]
태임(太任) : 주(周)나라 왕계(王季)의 비(妃). 문왕(文王)의 어머니.- [註 504]
도산씨(塗山氏) : 우(禹)임금의 비(妃).- [註 505]
유적(褕翟) : 꿩무늬를 수놓은 왕후의 의복.- [註 506]
갈담(葛覃) : 《시경(詩經)》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편명으로, 후비(后妃)의 근본을 노래한 것임. 즉 후비가 여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한 것을 칭송하였음.- [註 507]
계명(雞鳴) : 《시경(詩經)》 국풍(國風) 제풍(齊風)의 편명으로, 왕비가 임금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하도록 내조(內助)하는 것을 말함. 《모시(毛詩)》에 의하면, 제(齊)나라 애공(哀公)이 황음(荒淫)하자 현비(賢妃)가 새벽에 닭이 울고 동녘이 밝았으니 정청(政廳)에 나아가라고 권고(勸告)한 데에서 나온 말임.- [註 508]
강원(姜嫄) : 제곡(帝嚳)의 비(妃). 후직(后稷)의 어머니.- [註 509]
이비(二妃) : 요(堯)임금의 딸. 모두 순(舜)임금에게 출가했음.- [註 510]
성화(成化) :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年號).- [註 511]
요조(窈窕) : 여자의 마음이 얌전하고 고운 것.- [註 512]
이남(二南) : 《시경(詩經)》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두 편명(篇名). 주남(周南)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수신 제가(修身齊家)한 일을 노래한 것이고, 소남(召南)은 남국(南國)의 제후(諸侯)가 후비(后妃)의 덕화(德化)를 입은 것을 읊은 것임.○甲申/上, 御仁政殿, 百官四拜訖。 上, 以封王妃敎命、冊寶、命服, 授正使領議政鄭昌孫、副使戶曹判書李鐵堅, 由仁政門, 鼓吹前導, 次敎命、次玉冊、次寶、次命服、次儀仗。 使者隨行, 至宣政門外幕次, 王妃出就宣政殿月廊拜位, 受敎命、冊寶、命服, 其敎命曰:
自古帝王, 必擇建賢妃, 所以承宗(朝)〔廟〕 , 而御家邦也。 粤予眇末, 嗣守丕基, 庶賴我內治之助, 屬玆多故, 中闈再缺。 念惟坤位, 不可久曠。 咨爾尹氏, 名門淑德, 早充宮庭, 夙有顯聞, 玆承懿旨, 冊爲王妃。 於戲, 乾坤合德, 聖人則之, 爰立厥配, 以正位號, 服玆寵命, 勖之哉。
玉冊曰:
建極立民, 非獨資於外輔; 齊家治國, 亦必賴於中闈。 玆率舊章, 哉揚顯冊。 惟爾尹氏, 齊莊貞靜, 徽柔懿恭, 膺妙選於後宮, 播令聞於內壼。 媚于三殿, 可嗣太任之徽音; 輔予一人, 庶幾塗山之至德。 允副宮庭之望, 光增褕翟之儀。 於戲, 葛之覃兮, 勉率勤儉之俗; 雞旣鳴矣, 佇聞箴警之言。
王妃御宣政殿, 受內外命婦賀如儀。 其樂章曰: "思齊聖后, 天作之合, 正位于內, 立我坤極。 姜嫄佐嚳, 二妃興嬀, 於萬斯年, 福履綏之。" 百官詣延英門外陳賀。 王妃上謝箋曰:
成化十六年十一月初八日, 敬蒙上恩, 封妾爲王妃, 仍授冊命、印章, 不勝感激。 謹奉箋稱謝者。 妾尹氏, 誠惶誠恐, 稽首稽首。 伏以玉冊揚庭, 宜求窈窕之質, 椒宮履位, 誤及賤薄之軀。 揆分踰涯, 措躬無地。 伏念性識庸下, 門戶卑微, 幸備後陳, 叨添奉箒之列; 濫陪震極, 敢望刑家之儀, 何期翟服之榮, 驟膺鴻號之錫? 玆蓋伏遇, 道以身敎, 恩自近推。 謂乾元, 必賴坤元, 聿嚴正始, 而外治亦由內治, 乃謹造端。 遂令孱資, 獲紆寵命。 謹當兢兢業業, 贊美化於二南; 委委佗佗, 嗣徽音於三殿。
- 【태백산사고본】 18책 123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172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註 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