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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18권, 성종 11년 6월 12일 신유 2번째기사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상산군 황효원이 이유기의 딸과의 혼인 허락 요청에 관해 상소하다

상산군(商山君) 황효원(黃孝源)이 상소하기를,

"이유기(李裕基)가 죄를 지었으므로 그 딸자식을 신에게 급부(給付)하시었는데, 그대로 외조모(外祖母)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신이 홀아비로 있어 배우자를 구하는데 모두 늙었다 하여 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의 어미가 한스럽게 여겨 그 외조모와 더불어 매작(媒妁)을 통하여 드디어 혼례를 이루었고, 또 천은(天恩)을 입어 면방(免放)되어 전연 혐의가 없는 지 오래입니다. 병신년269) 봄에 미치어 홍윤성(洪允成)의 가속(家屬)이 적(嫡)을 다투므로 헌부(憲府)에서 청리(聽理)하였는데, 홍윤성이 이미 죽었으니 질문할 근거가 없으므로 공경히 상지(上旨)를 받들었는데, 무릇 전·후실(前後室)이 있는 자는 아울러 생시(生時)에 추문하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신(臣) 자신에게 추급(推及)하게 된 것이며, 추문하여 끝까지 핵실하여 하자를 구하였으나 혼례는 정당합니다. 그러므로 다만 급부(給付)한 것으로 사연을 만들어 박의(駁議)하여 계달하였는데, 성상께서 성심(聖心)으로 재탁(裁度)하시어 적처로 논하라고 명하시었습니다. 그런데 대간(臺諫)이 논박(論駁)하여 말하기를, ‘황효원은 공신(功臣)이니, 난신(亂臣)의 딸로 아내를 삼을 수 없다. 마땅히 첩으로 논하여야 한다.’ 합니다. 천한 여자가 공신에게 시집가서 천인(賤人)을 면한 자가 하나가 아닌데, 홀로 신의 아내가 신이 공신이라는 까닭으로 적처를 강등하여 첩이 되니, 신이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는 것은 오래 가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은 짧다.’ 하였습니다. 또 승음(承蔭)270) 하는 법이 다만 직손(直孫)에게 미치고 외손(外孫)에게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황보인(皇甫仁)·박팽년(朴彭年)의 외손(外孫)이 혹은 좋은 벼슬을 지내었고, 혹은 양시(兩試)에 올라 현달하였는데, 신의 자녀는 출생하기 전의 외조(外祖)가 범죄한 것 때문에 의관(衣冠)의 집과 더불어 혼인을 맺지 못하게 되니, 일이 궁하고 형세가 절박합니다. 천은을 바라건대, 신의 자녀로 하여금 인류(人類)에 복귀하여 사족(士族)의 집과 혼인하도록 허락하소서. 지극한 소원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였다.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보이니,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사흔(尹士昕)·한계희(韓繼禧)·강희맹(姜希孟)·권감(權瑊)·어세공(魚世恭)은 의논하기를,

"이유기(李裕基)와 처가(妻家)가 모두 사족(士族)이고 또 왕실(王室)의 친척이었으나, 그러나 이미 난신(亂臣)의 딸이 되었고, 비록 은혜를 입어 면방(免放)되었으나 처음에 장가들 때에 성례(成禮)해서 성혼(成婚)하였는지도 알 수 없으니, 적실로 논하는 것은 미안(未安)합니다. 청컨대 처음 장가들 때에 성례하였는지 안하였는지를 상고하여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고, 김국광(金國光)·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예전에 이르기를, ‘예를 갖추어 장가들면 아내가 되고 예를 갖추지 않고 혼인하면 첩이 된다.’ 하였으니, 비록 죄인의 딸이라도 성례하여 장가들었으면 첩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면방되었으면 본래 사족의 딸이니, 아내 되기에 무슨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처음에 장가들 때의 성례하고 안한 것을 세밀히 핵실하여 논정(論定)하소서."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그 성례한 여부를 상고하게 하니, 승정원에서 황효원의 혼서(婚書)를 취하여 아뢰었다. 또 명하여 정승(政丞)에게 보이어 의논하게 하니, 정창손·한명회·윤사흔·윤필상은 의논하기를,

"지금 혼서(婚書)를 보건대 급부(給付)하던 때에 있었으니,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심회·김국광은 의논하기를,

"황효원이씨(李氏)에게 장가든 것과 혼서를 이룬 것이 모두 급부하던 때에 있었으니, 후처(後妻)로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씨의 파계(派系)가 왕실(王室)에 연하였고, 이제 이미 면천(免賤)되었으니, 성상의 뜻으로 재처(裁處)하소서."

하고, 홍응은 의논하기를,

"혼서가 비록 급부하던 때에 있었으나, 본래 사족의 딸이고 혼서가 있으니, 처로 논정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다. 또 승정원(承政院)·대간(臺諫)·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김승경(金升卿)·김계창(金季昌)·채수(蔡壽)·변수(邊脩)·이세좌(李世佐)·성형(成俔)은 의논하기를,

"황효원이유기의 딸에게 장가든 것이 비록 면방한 뒤에 있었으나, 훈구(勳舊)의 대신으로서 난신의 딸에게 장가들어 적처(嫡妻)를 삼았으니 이미 불가한데, 더구나 급부할 때를 당하여 어찌 주인으로서 종과 혼인할 리가 있겠습니까? 도리에 거슬리고 윤상(倫常)을 어지럽힌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청컨대 첩으로 논정하소서."

하고, 정괄(鄭佸)·이덕숭(李德崇)·구치곤(丘致崐)·이인속(李仁錫)·최한후(崔漢侯)·정지(鄭摯)는 의논하기를,

"황효원이유기의 딸에게 장가들은 것은 급부받아 종을 삼았을 때에 있었으니, 종과 주인 사이에 성례해서 성혼하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혼서는 추후에 기술한 것이 또한 의심이 없습니다. 또 공신으로서 난신의 딸에게 장가들어 적처를 삼고자 하여 성상의 총명을 번거롭게까지 하였으니, 매우 불가합니다. 청컨대 전대로 첩으로 논정하소서."

하였고, 이세필(李世弼)·김성경(金成慶)·윤석보(尹碩輔)는 의논하기를,

"황효원이 난신의 딸에게 장가든 것이 급부한 때에 있었으니, 어찌 성례해서 성혼하였다 이르겠습니까? 청컨대 첩으로 논정하소서."

하였고, 최숙정(崔淑精)·권건(權健)·이세광(李世匡)·조숙기(曺淑沂)·정성근(鄭誠謹)은 의논하기를,

"이유기가 자신이 난적(亂賊)을 범하여 그 처자를 공신의 집에 주어서 노예를 삼았으니, 이유기의 딸은 곧 황효원의 집 종입니다. 그 종[婢]에게 장가들 때에 어찌 혼례가 있었겠습니까? 무릇 사대부(士大夫)로서 조금 뜻이 있는 자라면 모두 난적의 자손과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는데, 더구나 면천(免賤)을 하지 못한 자이겠습니까? 황효원은 공신이고 또 재상입니다. 만일 재혼하기를 구한다면 얻지 못할 리가 없으니, 난적을 범하여 몸이 천인을 면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적체(嫡體)의 배우자를 삼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집에 급부한 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처음 장가들 때에 첩으로 하고 아내로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어찌 능히 후일에 은혜를 입어 면방(免放)될 것을 예측하여 성례해서 성혼하였겠습니까? 가령 성례하여 자기 집 종에게 장가든 자가 그 종이 후일에 양인(良人)이 되었다면 처(妻)로 논하여 벼슬길을 통할 수 있겠습니까? 또 혼서는 사사집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어서 다 믿을 수 없습니다. 두 아내가 적(嫡)을 다툴 때에는 이것으로 질정하는 것이 가하지마는, 첩으로 처를 삼으려고 하는 자야 어찌 혼서의 있고 없는 것을 묻겠습니까?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규구(葵丘)의 맹세에 이르기를, ‘첩으로 처를 삼지 말라.’ 하였으니, 대저 첩으로 처를 삼는 것은 옛사람이 미워하는 것인데, 어찌 처음에 첩이 된 자를 나중에 처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첩으로 논정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고, 성숙(成俶)·안침(安琛)·김흔(金訢)·민사건(閔師騫)·김응기(金應箕)·안윤손(安潤孫)은 의논하기를,

"이유기의 딸이 사족이지마는, 이미 난신의 딸로 황효원의 집에 급부되어 종이 되었으니, 비주(婢主)의 분수가 이미 정하여진 것입니다. 주인으로서 종[婢]에게 장가든 데에는 혼례의 있고 없는 것을 논할 것이 아닙니다. 뒤에 비록 면방이 되었더라도 장가든 것은 급부한 때에 있었으니, 첩으로 논정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고, 성세명(成世明)·정광세(鄭光世)·조위(曺偉)는 의논하기를,

"이유기가 비록 본래 사족이지마는 베어 죽였고, 그 딸을 황효원에게 급부하여 종[婢]을 삼았으니, 나중에 면방될 것을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효원의 어미가 자식을 위하여 혼인을 구하는데 어찌 의관(衣冠)의 벌열(閥閱)을 버리고 반드시 난신의 자식으로 천인이 된 종을 구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종이라도 오히려 혼인하려고 하지 않았겠는데 더구나 자기 집 종이겠습니까? 이것은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비록 혼서가 갖추어 있다 하더라도 족히 사실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혼인의 예는 인륜의 큰 벼리인데, 만일 한 사람의 사정을 따라 조금만 그 분수를 문란시키면 사람들이 장차 이것을 빙자하여 본받을 것이니, 큰 벼리가 무너져서 다시 정돈하지 못할 것입니다.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첩으로 처를 삼지 말라.’ 하였으니, 지금 이유기의 딸을 처로 논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하였다. 의논한 것이 들어오자, 임금이 명하여 승정원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18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13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가족-가족(家族)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 [註 269]
    병신년 : 1476 성종 7년.
  • [註 270]
    승음(承蔭) : 특별히 음관(蔭官)으로 임용함.

商山君 黃孝源上疏曰:

李裕基作罪, 其女子給付於臣, 而仍在外祖母家。 時臣鰥居求耦, 皆以老不應。 臣母恨之, 與彼外祖母, 通媒妁, 遂成婚禮, 且荷天恩, 而免放, 截然無嫌久矣。 逮丙申春, 洪允成家屬爭嫡, 憲府聽理, 允成旣沒, 質問無據, 敬奉上旨, 凡有前、後室者, 竝於生時推之。 推及臣身, 窮覈求疵, 然婚禮正矣。 故只以給付爲辭, 駁議啓達, 上裁自聖心, 命論以嫡。 而臺諫駁之謂: "孝源乃功臣, 不可以亂臣之女爲妻。 當以妾論之。" 賤女嫁功臣免賤者非一, 獨臣妻, 以臣功臣之故, 降嫡爲妾, 臣竊憫焉。 古人云: "善善長惡惡短。" 且承蔭之法, 只及直孫, 於外孫則不干。 皇甫仁朴彭年之外孫, 或歷敭華秩, 或卓登兩試, 而榮顯, 臣之子女, 乃以其未生前, 外祖之所犯, 不得與衣冠之家締婚, 事窮勢迫。 顒望天恩, 俾臣子女, 復人類許婚士族之家。 不勝至願。

命示大臣, 鄭昌孫韓明澮沈澮尹士昕韓繼禧姜希孟權瑊魚世恭議: "李裕基及妻家皆士族, 且連王室, 然旣爲亂臣之女, 雖蒙恩免放, 初娶之時, 成禮成婚, 亦未可知, 論以嫡室未安。 請考其初娶時成禮與否, 而更議之。" 金國光尹弼商洪應議: "古云: ‘聘則爲妻, 奔則爲妾。’ 雖罪人之子, 成禮而娶, 則不可以妾論。 況免放, 則本是士族之女, 何嫌爲妻? 但細覈初娶時成禮與否後論定。" 命承政院考其成禮與否, 承政院取孝源婚書以啓。 又命示政丞議之, 昌孫明澮士昕弼商議: "今觀婚書, 乃在給付之時, 難以取實。" 沈澮國光議: "黃孝源李氏與成婚書, 皆在給付之時, 不可論以後妻。 然李氏派連王室, 今旣免賤, 裁自上意耳。" 洪應議: ‘婚書雖在給付之時, 然本士族女, 而有婚書, 以妻論定爲便。" 又命承政院、臺諫、弘文館議之, 金升卿金季昌蔡壽邊脩李世佐成俔議: "孝源裕基女, 雖在免放之後, 以勳舊大臣, 娶亂臣女爲抗嫡, 已爲不可, 況當給付時, 安有以主, 而婚其婢乎? 逆理亂常, 莫此爲甚, 請以妾論定。" 鄭佸李德崇丘致崐李仁錫崔漢侯鄭摯議: "黃孝源李裕基女, 在給付爲婢之時, 婢主之間, 其不成禮成婚明矣。 婚書追述亦無疑。 且以功臣, 娶亂臣女, 欲以爲嫡, 至煩上聰, 甚不可。 請依前以妾論定。" 李世弼金成慶尹碩輔議: "黃孝源娶亂臣女, 在給付之時, 何以云成禮成婚也? 請以妾論定。" 崔淑精權健李世匡曺淑沂鄭誠謹議: "李裕基身犯亂賊, 其妻子給付功臣家爲孥, 則裕基之女, 乃孝源家婢也。 娶其婢之時, 安有婚禮乎? 大凡士大夫少有志者, 皆羞與亂賊子孫爲婚, 況未免賤者乎? 孝源功臣, 又宰相也。 苟求婚媾, 無不可得之理, 如其干犯亂賊, 而身不免賤者, 必不肯爲敵體之配矣。 況自家給付者乎? 然則初娶之時, 以妾不以妻明矣。 又安能預料後日之蒙恩免放, 而成禮成婚乎? 假令成禮, 而娶自家婢者, 其婢後乃得良, 則可論以妻, 而通其仕路乎? 且婚書, 則乃私家所藏, 固不可盡信。 兩妻爭嫡之時, 以是質焉可也, 欲以妾爲妻者, 安問其有無乎? 桓公葵丘之誓曰: ‘毋以妾爲妻。’ 夫以妾爲妻者, 古人所惡, 豈可始以爲妾者, 終以妻論乎? 以妾論定爲便。" 成俶安琛金訢閔師鶱金應箕安潤孫議: "裕基之女, 固士族, 旣以亂臣之女, 給付孝源家爲婢, 則婢主之分已定。 以主娶婢, 婚禮有無, 非所當論。 後雖免放, 娶在給付之時, 以妾論定爲便。" 成世明鄭光世曺偉議: "裕基雖本士族, 而誅死, 其女給付孝源爲婢, 則其終免放, 未可必也。 孝源之母, 爲子求婚, 豈宜舍衣冠閥閱, 而必求亂臣之子屬賤之婢乎? 在他人婢, 尙不肯焉, 況自家婢乎? 此不近人情, 雖曰婚書具在, 其不足取實也審矣。 婚姻之禮, 人倫大綱, 若徇一人之私, 小紊其分, 則人將藉此效之, 大綱陵夷, 不可復整。 《春秋傳》曰: ‘毋以妾爲妻。’ 今裕基之女, 以妻論未便。" 議入, 上命留承政院。


  • 【태백산사고본】 18책 118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13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가족-가족(家族)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