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 114권, 성종 11년 2월 30일 경진 2번째기사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김양경·심회가 종친의 연회에 사관이 입시할 수 없었던 것의 부당함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김양경(金良璥)이 아뢰기를,
"임금의 행동을 반드시 기록하는 것은 후세(後世)로 하여금 감시(監視)하는 바가 있게 함입니다. 근일에 종친(宗親)이 잔치를 올리는 데에 사관(史官)이 입시(入侍)할 수 없었던 것은 불가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종친의 관사(觀射)에 사관(史官)이 입시한 예(例)가 있지 않았다. 정전(正殿)에 나아갈 때라면, 조정(朝廷)이 있는 곳이니 사관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편전(便殿)에서 종친(宗親)을 인견(引見)하는 경우라면, 이것은 궁(宮)에서 사사로운 은혜를 펴는 것이니, 어찌 모름지기 사관이 입시하여야 하겠는가?"
하니, 김양경이 말하기를,
"인주(人主)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가 정도(正道)입니다. 어찌 사사로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으니, 영사(領事) 심회(沈澮)가 대답하기를,
"옛사람은 좌사(左史)가 말을 기록(記錄)하고 우사(右史)가 행동 거지(行動擧止)를 기록하였으니, 임금의 한 가지 말, 한 가지 행동은 상세히 기록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김양경(金良璥)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1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11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