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들과 안주에 절도사 본영을 두는 일과 승려를 군액에 편입하는 일을 논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이파(李坡)가 아뢰기를,
"평안도(平安道) 한 도(道)는 만포(滿浦)로부터 강(江)을 따라 내려와서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진(營鎭)을 두었으니, 그것이 변방을 방비하는 데에 있어서는 주도(周到)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賊)이 침입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어서 그 요충지(要衝地)는 안주(安州)에 있습니다. 본주(本州)에는 청천강(淸川江)과 박천강(博川江)이 있는데,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10만 명의 군사로써 살수(薩水)에서 패전(敗戰)했으니, 곧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입니다. 지금 절도사(節度使)의 본영(本營)이 영변(寧邊)에 있는데, 영변(寧邊)은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으므로 만포(滿浦)에서 적(賊)이 침입하는 길만 방어할 뿐입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절도사(節度使)가 마땅히 안주(安州)를 지켜서 요충(要衝)이 되는 길을 방어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영사(領事)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영변(寧邊)은 안주(安州)와의 거리가 겨우 1식(息) 정도이니, 안주(安州)에 만약 적변(賊變)이 있더라도 능히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진(鎭)을 설치하자는 의견에서도 주장(主將)은 마땅히 길가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 까닭으로 영변(寧邊)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파가 아뢰기를,
"신(臣)도 굳이 주장(主將)이 안주(安州)에 있어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대개 안주(安州)는 사람들이 쇠잔하고 성곽(城郭)이 무너져 있으니, 안주(安州)의 성곽(城郭)을 수리하여 진군(鎭軍)을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튼튼히 지키도록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 우리 나라는 안주(安州)의 강(江)이 첫째 관문(關門)이 되고, 극성(棘城)이 둘째 관문(關門)이 되며, 중첩된 관문과 천연의 험지(險地)로는 평안도(平安道)만한 곳이 없는데도, 홍군(紅軍)844) 과 거란(契丹)이 모두 평안도(平安道)를 경유(經由)하여 들어와서 혹 평양(平壤)과 개성(開城)에까지 이른 적이 있습니다. 비록 대동강(大同江)이 있기는 하나 평양(平壤) 남쪽에 있으니, 만약 평양을 지키지 못한다면 대동강은 평양의 소유(所有)가 안될 것입니다. 안주(安州)는 두 강(江)845) 이 모두 그 북쪽에 있으니, 지금 진군(鎭軍)을 둔다면 진실로 우리 나라의 자물쇠가 되는 것입니다."
하고, 홍응이 아뢰기를,
"이파(李坡)의 말은 과연 옳습니다마는, 그러나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니, 백성이 진실로 서로 화합(和合)하지 못한다면 비록 장강(長江)과 천참(天塹)846) 이 남북(南北)을 한계(限界)로 막아 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데에 있어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장령(掌令) 구치곤(丘致崐)이 아뢰기를,
"지금 중의 무리들이 일을 하지 않고 놀면서 먹고 있으니, 백성에게 해독(害毒)을 끼치는 것이 심합니다. 이들을 군대에 편입시킨다면 군사가 어찌 넉넉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평안도(平安道) 백성 가운데 중이 된 사람은 다른 도(道)보다 곱절이나 되니, 청컨대 모두 찾아내어 군대의 정원(定員)에 편입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의 무리는 진실로 다 금지시킬 수 없다. 그 중에 도첩(度牒)847) 이 없는 사람은 이미 군대에 편입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구치곤이 아뢰기를,
"비록 군대에 편입하도록 했지마는, 그러나 수령(守令)들이 법을 모두 받들지 않았으므로, 거짓으로 환속(還俗)한 사람이 있어서, 혹은 관가(官家)의 안에서 역사(役事)를 하고 군역(軍役)을 맡지는 않습니다. 지난 정해년848) 에 호패(號牌)849) 를 시행하였을 때에도 중의 무리가 30여만 명이나 되었으니, 이로써 살펴본다면 지금은 거의 40여만 명이나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이같이 많은 수효에 이르겠는가?"
하자, 구치곤이 아뢰기를,
"금천(衿川) 한 고을로써 말하더라도 정병(正兵)은 5, 6명에 불과한데, 사사(寺社)는 한둘로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의 절 가운데 중의 무리가 10여 명을 밑돌지 않으니, 이렇다면 비록 40여만 명이 된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안침(安琛)이 아뢰기를,
"복세암(福世庵)이 대궐 안을 내려다보면서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청컨대 이를 철거(撤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내려다보면서 기운을 누르고 있다고 하여 철거(撤去)시킨다면, 민가(民家)로서 궁궐에 가까이 있는 것도 모두 철거(撤去)하도록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안침에 아뢰기를,
"전일에 내불당(內佛堂)이 대궐에 가까이 있다고 하여 이미 철거(撤去)했으니, 지금 복세암(福世庵)도 철거시키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111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8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군사-관방(關防) / 호구-호적(戶籍)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註 844]홍군(紅軍) : 홍건적(紅巾賊).
- [註 845]
두 강(江) : 청천강(淸川江)과 박천강(博川江).- [註 846]
천참(天塹) : 강하(江下) 따위로 인하여 저절로 이루어진 요충지(要衝地).- [註 847]
도첩(度牒) : 중이 되었을 때 나라에서 주는 허가증.- [註 848]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註 849]
호패(號牌) : 16세 이상의 남자가 패용(佩用)하는 패. 신분에 따라 아패(牙牌)·각패(角牌)·황양 목패(黃楊木牌)·방목패(方木牌) 등의 구별이 있으며, 패의 전면에는 주소·성명·직업·연령·본관·신장 등을 기입하고, 후면에는 해당 발급 관아의 낙인(烙印)을 찍었음.○御經筵。 講訖, 同知事李坡啓曰: "平安一道, 自滿浦沿江而下, 至于義州, 皆置營鎭, 其於備邊, 可謂周矣。 然賊路非一, 而其要衝, 則在安州。 本州有淸川、博川江, 隋 煬帝以十萬之師, 敗於薩水, 卽今淸川江也。 今節度使之營, 在於寧邊。 寧邊僻處一隅, 獨當滿浦賊路而已。 臣意以爲 ‘節度使宜鎭安州,’ 以當要衝之路。" 領事洪應啓曰: "寧邊與安州, 相距纔一息許, 安州如有賊變, 則可能救援矣。 其初設鎭之意, 亦曰主將不宜在路邊, 故在於寧邊耳。" 坡曰: "臣亦非固謂主將在安州也。 蓋安州人物凋殘, 城郭圮壞, 莫若修安州城郭, 置鎭軍, 使之據險守固可也。 且我國, 安州江爲第一關, 棘城爲第二關, 重關天險, 莫如平安, 而紅軍契丹, 皆由平安而入, 或至于平壤、開城。 雖有大同江, 然在平壤以南, 若平壤不守, 則江非平壤之有。 若安州, 則兩江皆在其北, 今置鎭軍, 則誠我國管鑰也。" 應曰: "坡之言果是, 然地利不如人和, 民苟不和, 雖長江天塹, 限隔南北, 其於守國何補?" 掌令丘致崐啓曰: "今僧徒甚繁, 而游手游食, 蠧民莫甚。 以之充軍, 則軍何以不敷乎? 況平安道民之爲僧者, 倍於他道, 請盡刷以充軍額。" 上曰: "僧徒固不可盡禁也。 其無度牒者, 已令充軍矣。" 致崐曰: "雖已令充軍, 然守令未盡奉法, 假有還俗者, 或役於官中, 而不差軍役。 去丁亥年號牌時, 僧徒三十餘萬, 以是觀之, 今幾四十餘萬矣。" 上曰: "豈至如此之多也?" 致崐曰: " 以衿川一縣言之, 正兵則不過五六名, 而寺社, 則不可以一二計也。 其一寺之中, 僧徒不下十餘輩, 是則雖謂之四十餘萬可也。" 侍講官安琛啓曰: "福世庵, 臨壓闕內, 請撤去。" 上曰: "如以臨壓而撤去, 則凡人家之近於宮闕者, 亦盡撤去歟?" 琛曰: "前以內佛堂, 近於闕, 已撤去, 今亦撤去福世庵, 不亦可乎?" 不聽。
- 【태백산사고본】 17책 111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8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군사-관방(關防) / 호구-호적(戶籍)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註 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