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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10권, 성종 10년 윤10월 11일 계해 1번째기사 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임금이 칙사를 맞아 의식대로 칙서를 받고 파병에 따른 문제를 말하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칙사(勅使)를 맞이하고 경복궁(景福宮)에 이르러 칙서(勅書)를 받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그 칙서(勅書)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朝鮮國王) 아무[姓諱]에게 말한다. 짐(朕)이 천명(天命)을 받아서 중화(中華)와 사이(四夷)의 임금이 되어, 은혜를 베풀고 인덕(人德)을 행하는 것이 곧 짐(朕)의 평소부터 품은 뜻인데, 군사를 일으키고 민중을 동원하는 것이 어찌 하기를 원하는 바이겠는가? 저 건주 여진(建州女眞)이 하늘을 거스르고 은혜를 배반하고서 변방을 여러 번 침구(侵寇)하니, 수신(守臣)715) 이 이를 멸망시키도록 번갈아 청했다. 그러나, 짐(朕)은 생각하건대, 전쟁[戈鋋]이 이르는 곳에는 선(善)한 사람과 악(惡)한 사람을 구분할 수 없게 되는데, 저들 중에서도 어찌 덕화(德化)에 돌아와서 선인(善人)이 되는 이가 없겠는가? 이에 대신(大臣)을 보내어 어루만지며 개유하기를 두 번 세 번이나 하여 그 이심(異心)을 품었던 허물을 용서하여서, 그들이 북경(北京)에 와서 사죄(謝罪)하기를 들어주었으니, 모두 보통의 사례(事例)에 지나쳐서 지위를 올려 상(賞)을 내리고 연회(宴會)를 베풀어 대접했는데도, 돌아간 지 1년도 못되어 적(賊)의 우두머리 복당가(伏當加) 등이 다시 더러운 무리를 한데 모아서 우리 변방을 침범하게 되었다. 비록 관군(官軍)에게 내쫓겨 국경 밖으로 나갔지마는, 다만 패배(敗北)를 크게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신(守臣)이 군사로써 치기를 다시 청하였다. 조정의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적(賊)이 사리(事理)에 어둡고 완고(頑固)하여 허물을 고치지 않으니, 죄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므로, 이미 감독(監督)·총병(摠兵) 등의 관원으로 하여금 정병(精兵)을 뽑아 거느리고 저 곳에 가서 진수(鎭守)·도어사(都御史)와 회합(會合)하여, 기일을 정하여서 소혈(巢穴)을 공격하여 초멸(剿滅)하도록 하였다. 생각건대, 그대 국왕(國王)은 동쪽 변방에서 봉토(封土)를 계승하여 우리 국가에 충성을 다함이 융성(隆盛)하고 쇠퇴(衰頹)하지 않으니, 짐(朕)은 매우 기뻐한다. 돌아보건대, 왕(王)의 나라는 본래부터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일컫고 있는데, 오랑캐의 땅에 가까이 있으니, 또한 이를 대적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군사가 지경에 들이닥치면 적(賊)이 국경(國境)으로 달아나 숨는 자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사로잡아서 포로를 바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왕(王)이 만약 도와줄 군사를 거듭 보내어 멀리서 서로 응원(應援)한다면, 비휴(貔貅)716) 의 위엄을 크게 떨쳐서 악(惡)한 무리를 함께 섬멸(殲滅)할 것이다. 역적 오랑캐가 제거된다면 왕(王)의 군주(君主)를 위해 싸운 공로는 더욱 무성(茂盛)해질 것이니, 성명(聖明)이 어찌 무궁(無窮)한 세상에 존속되지 않겠는가? 보수(報酬)의 은전(恩典)은 짐(朕)이 반드시 늦추지 않을 것이니, 그런 까닭에 칙서(勅書)를 내린다."

하였다. 임금이 사신(使臣)과 더불어 행례(行禮)를 하고, 김자정(金自貞)에게 명하여 사신에게 말하게 하기를,

"만리(萬里)나 되는 먼 길을 고생하면서 왔는데, 대인(大人)의 행차는 일찍이 생각지 않았던 것이므로, 연로(沿路) 각처(各處)의 여관에서 접대하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어찌 빠뜨린 것이 없겠습니까?"

하니, 사신이 대답하기를,

"안주(安州)·평양(平壤)·개성(開城) 등지에 전하(殿下)께서 재상(宰相)을 맡겨 보내어 후하게 위로하고 겸하여 선물[人情]까지 주셨으며, 곳곳의 주·부(州府)에서 여관의 접대가 매우 후했으니, 어찌 빠뜨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자리에 나아가 다례(茶禮)717) 를 행하고, 이를 마치자 도로 자리에 와서 앉았다. 사신이 통사(通事) 장자효(張自孝)를 통하여 아뢰기를,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이 일찍이 중국의 경계를 침범하므로 중국 조정에서 군사를 일으켜 초멸(剿滅)하려고 하였으나, 본인(本人)들이 귀순(歸順)하여 공물(貢物)을 바치는 까닭으로 우대(優待)하여 상(賞)을 내리고 차례를 밟지 않고서 관직을 제수(除授)했는데도, 야인(野人)들은 황제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서 그전과 같이 변경을 침범하였습니다. 황제께서 이에 장수에게 명령하여 토벌하도록 했던 것인데, 처음에는 마 시랑(馬侍郞)을 보내어 원병(援兵)을 청하려고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저를 보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자정(金自貞)장유성(張有誠)으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기를,

"마땅히 칙서(勅書)에 의거해 시행하겠습니다. 다만 겨울과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바입니다. 옛날 한(漢)나라가 흉노(匈奴)를 정벌하였을 적에 군사들 가운데 겨울에 손가락이 언 자가 많았으며, 마원(馬援)718) 이 남만(南彎)을 정벌하였을 적에 군사들이 여름에 역질(疫疾)로 죽어 거의 없어졌습니다. 지금 날씨가 추워서 풀은 말라 죽고 눈은 깊이 쌓인 데다가 길이 험하여 군사를 내보내기가 어렵겠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싸움터에 나가는데 군사와 말의 합계(合計)가 15만이나 되니, 군사가 부족(不足)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선(朝鮮)에서 만약 기일에 의거하여 군대를 내보내기만 한다면, 저들이 몸을 피하여 벗어날 수가 없으므로 남김없이 죽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겨울철을 만났으니, 군사를 내보내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입니다."

하고, 이어 중국 조정(朝廷)에서 공격하고 토벌할 형세(形勢)를 물으니, 사신이 말하기를,

"태감(太監) 왕직(汪直)과 무령후(撫寧侯) 주용(朱庸)과 전 총병관(摠兵官) 한빈(韓贇)과 광녕 총병 태감(廣寧摠兵太監)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토벌할 계획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군사의 출동(出動)할 기일을 물으니, 사신이 왕 태감(汪太監)719) 이 정한 기일(期日)의 소첩(小帖)을 내어 보이니, 곧 윤10월 25일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칙서(勅書)에 의거하여 군병(軍兵)을 뽑아 내어서 장수를 독려하여 보내겠으나, 다만 지금 칙서(勅書)에 기일(期日)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또 왕 태감(汪太監)이 지시(指示)한다는 말도 없는데, 군사 출동(出動)의 기일은 매우 촉박(促迫)하니, 형세(形勢)가 능히 미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칙서(勅書)에는 그 대강(大綱)만 기록했을 뿐인데, 어찌 기일(期日)을 미리 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태감(太監) 등은 당초 회의(會議)하여 윤10월 20일이나 25일, 오는 11월 초3일로 가려 정했는데, 그 후에 다시 의논하기를, ‘20일에는 얼음이 굳게 얼지 않으므로 군사가 강을 건너기 어려울 것이고, 11월 초3일에는 건주(建州)의 경계와 요동(遼東)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저들이 성식(聲息)을 알고 도망해 흩어질 것이니, 차라리 25일의 편리한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 날짜는 앞으로 당기거나 뒤로 물릴 수 없으며, 또 용병(用兵)은 신속(神速)함을 소중히 여기니, 모름지기 이 날에 이르러 군사를 출동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용병(用兵)은 신속(神速)함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군대가 가까운 곳에 있어 임기 응변(臨機應變)하는 것인데, 중국과 같은 경우는 오히려 될 수 있지마는, 본국(本國)은 건주(建州)와의 거리가 아주 멀고 산천(山川)이 험하여 막혀 있으니, 어찌 빨리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지금 우리 군사는 모름지기 공문(公文)을 보내야만 뽑아 보낼 수가 있고, 뽑은 군사도 마땅히 무기(武器)를 정칙(整勅)해야 할 것이니, 이 날에 군사를 모으는 것은 반드시 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비록 도성(都城) 안의 군사를 내보내더라도 모름지기 구량(糗糧)720) 을 준비해야만 행군(行軍)할 수가 있는데, 하물며 여러 도(道)의 군사이겠습니까? 전하(殿下)의 말씀이 진실로 정당합니다마는, 그러나 이 기일(期日)은 어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자(臣子)로서는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해야만 하는데, 지금 만약 기일(期日)에 의거해 군대를 내보낸다고 대답했다가 마침내 기일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는 중국 조정(朝廷)을 속이는 일이니, 죄를 실로 도피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천순(天順) 3년721)백옹(白顒)이 왔을 적에도 이번 예(例)와 같았는데, 그 때에는 시기에 미쳐서 군사를 내보냈으면서 지금은 이와 같으니, 무슨 이유입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때는 도어사(都御史) 이병(李秉)이 미리 앞서서 통지(通知)한 까닭으로 출병(出兵)을 미리 준비했지마는, 지금의 칙서(勅書)를 받고서야 알게 되었으니, 창졸간에 판비(辦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성절사(聖節使)의 호송군(護送軍)이 이 뜻을 먼저 알고 와서 보고했을 텐데, 무엇이 백옹(白顒)이 왔을 때와 다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송군(護送軍)은 다만 칙서(勅書)가 있는 것만 보고했을 뿐인데, 어떻게 칙서(勅書) 내용의 말뜻을 알았겠습니까? 또 군사의 행진(行進)은 노정(路程)이 있는데, 우리 나라는 건주(建州)와의 거리가 아주 머니, 만약 밤낮을 가리지 않고서 이틀 걸을 길을 하루에 걷게 된다면 사졸(士卒)들이 먼저 스스로 피곤해져 죽을 것입니다. 이것은 알을 품은 닭이 삵괭이를 치고 어린 강아지가 범을 범하는 것과 같으므로, 일에는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왕 태감(汪太監) 등이 이번 윤10월 21일에 군사를 일으켜 24일에 애양보(靉陽堡)의 북쪽 아골관(牙鶻關) 등지에 도착하여 25일에는 다섯 길로 나누어 들어가서 공격할 것이니, 귀국(貴國)의 군사가 건주(建州)로부터 세 길로 와서 군사를 합쳐 공격한다면, 야인(野人)이 거처하는 각 성채(城寨)를 진멸(殄滅)할 수가 있을 것인데, 중국 조정에서 어찌 중한 상(賞)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 기일(期日)을 어긴다면 대병(大兵)722) 이 이미 가버리고 오랑캐도 멀리 도망하여 잡지 못할 것이니, 외로운 군사를 내보내어 적지(敵地)에 깊이 들어와서 한갓 피로해져 죽게 될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대를 내보내는 것은 즉시 명령에 응하겠지마는, 기일(期日)은 형세(形勢)가 따르기 어렵겠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이 기일(期日)은 제가 감히 마음대로 앞으로 당기거나 뒤로 물릴 수 없으니, 전하(殿下)께서 정한 날짜를 듣고자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쟁은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것은 장수가 형세(形勢)를 살펴보고 결정하는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또 장수가 도성(都城) 밖에 있으면 비록 왕 태감(汪太監)일지라도 정한 기일(期日)에 출정(出征)하지 못하게 될 것인데, 어찌 감히 기일을 미리 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저의 말은 이미 다 말했습니다. 다만 왕 태감(汪太監)이 나로 하여금 귀국(貴國)의 관인(官人) 2명을 거느리고 사전(事前)에 오도록 하였으니, 지금 만약 사람을 시켜 보내어 가서 듣게 한다면 제가 전하(殿下)에게 아뢴 정녕(丁寧)한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대인(大人)이 말한 것과 기일(期日)에 의거하여 군사를 내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가지고 마땅히 사람을 시켜 대인(大人)을 따라 돌아가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알았습니다."

하고는, 또 말하기를,

"제가 올 때, 평양(平壤)에서 반나절을 머물고 개성부(開城府)에서 반나절을 머물고 벽제역(碧蹄驛)에서 반나절을 머물렀기 때문에 이로써 시일이 지체(遲滯)되어 늦었으니, 내일(來日)은 마땅히 회정(回程)하여 17일에 의주(義州)에 도착하고, 20일에는 요동(遼東)으로 돌아가야만 하겠습니다. 모름지기 각역(驛)으로 하여금 말을 가려서 번갈아 보내게 하고, 호송군(護送軍)은 30인을 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이제 절하고 하직하려고 합니다."

하고, 즉시 두 번 절하였다. 임금이 이를 두 번이나 사양했으나, 마지못하여 답배(答拜)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갑자기 이와 같이 하십니까? 대인(大人)이 객관(客館)으로 나아가면 내가 장차 가서 만나보겠습니다."

하고, 서로 더불어 섬돌을 내려와서 근정문(勤政門) 밖에까지 전송하여 서로 읍(揖)하고 작별(作別)하였다. 임금이 내전(內殿)에 돌아왔다가 조금 후에 태평관(太平館)에 거둥하였다. 어실(御室)에 나아가서 조금 머물렀다가 나가서 태평관 중문(中門) 밖에 이르니, 사신(使臣)이 나와서 맞이하여 서로 읍(揖)하고 정청(正廳)에 이르렀다. 사신이 말하기를,

"저는 전하(殿下)께서 다시 기동(起動)하지 마시기를 원한 까닭으로 이미 전상(殿上)에서 절하고 하직하고서 왔는데, 지금 곧 이같이 기동(起動)하시는 수고를 하니, 황공하고 감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절에 마땅히 이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서로 읍(揖)하고 자리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고, 이어서 하마연(下馬宴)723) 을 베풀었다. 임금이 술을 돌리려고 하자, 사신이 말하기를,

"청컨대 전하(殿下)께서 먼저 술을 드십시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을 존경하는 까닭으로 대인(大人)을 존경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먼저 술을 들겠습니까?"

하므로, 사신이 말하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예(禮)를 마치자,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덕원군(德原君) 이서(李曙)·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청송 부원군(靑松府院君) 심회(沈澮)가 차례대로 술을 돌렸다. 술을 다섯 잔 돌리게 되자, 사신이 장자효(張自孝)를 통해서 아뢰기를,

"제가 매우 취했습니다.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으니, 술잔을 돌려주는 예(禮)를 행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은 술을 마시지 말고 조용히 편안하게 앉았다가 잠깐 동안 예(禮)를 마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당초에 전하(殿下)께서 술을 내리실 적에 황공하여 술잔을 다 비웠으므로 비록 다시 마시지 않더라도 대단히 취하여 의식이 몽롱하게 되었으며, 또 사신으로 온 일이 매우 중대하므로 내일은 마땅히 일찍 떠나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사(國事)를 소홀이 할 수 없으니, 대인(大人)이 속히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중국 조정(朝廷)에서 우리 소국(小國)을 기억하여 특별히 칙유(勅諭)를 내리시고, 이어 대인(大人)을 택하여 사신으로 보내기를 이와 같이 했습니다. 어진 신하가 어진 임금을 만나는 것은 어려우며 대인(大人)과 서로 만나는 것도 어려운데, 또 손님과 주인의 예절은 폐지할 수 없으니, 청컨대 대인(大人)은 조금만 머무시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요동(遼東)에 출병(出兵)할 기일이 매우 급박(急迫)하기 때문에 결단코 머물 수는 없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술잔을 돌려주는 예(禮)를 행하고서 이를 마치자 서로 읍(揖)하고 나갔다. 사신이 임금을 배웅해 보내어 중문(中門) 밖에까지 이르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김승경(金升卿)에게 명하여 선물[人情]을 선사하게 했으나, 사신이 굳이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김승경(金升卿)이 말하기를,

"선물을 두목(頭目)에게 선사하려고 합니다."

하니, 사신이 대답하기를,

"제가 이미 받지 않았는데, 저들이 어찌 받겠습니까?"

하였다. 김승경이 말하기를,

"날씨가 지독하게 춥기 때문에 의복을 선사하려고 한 것뿐이고, 다른 중요한 물건이 아닙니다."

하니, 사신이 동옷[襦衣]과 가죽신[靴]만 받도록 허락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110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71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註 715]
    수신(守臣) : 변방을 지키는 신하.
  • [註 716]
    비휴(貔貅) : 용맹한 군대.
  • [註 717]
    다례(茶禮) : 중국의 사신을 맞아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서 차[茶]를 대접하던 의식.
  • [註 718]
    마원(馬援) : 후한(後漢)의 정치가.
  • [註 719]
    왕 태감(汪太監) : 왕직(汪直).
  • [註 720]
    구량(糗糧) : 말린 양식.
  • [註 721]
    천순(天順) 3년 : 1459 세조5년.
  • [註 722]
    대병(大兵) : 중국 군대를 가리킴.
  • [註 723]
    하마연(下馬宴) : 중국 사신이 도착한 당일에 태평관(太平館)에서 임금이 직접 베풀던 잔치.

○癸亥/上幸慕華館迎勅, 至景福宮受勅如儀。 其勅曰:

朝鮮國王姓諱。 朕誕膺天命, 君主華夷, 施惠行仁, 乃朕素志, 興兵動衆, 豈所願爲? 夫何(建州女直)〔建州女眞〕 , 逆天背恩, 累寇邊陲, 守臣交請剪滅。 朕念戈鋌所至, 玉石不分, 彼中寧無向化爲善乎? 爰遣大臣, 撫諭再三, 貸其反(測)〔側〕 之愆, 聽其來京謝罪, 悉越常例, 陞賞宴待而歸, 曾未期歲, 賊首伏當加等, 復糾醜類, 侵犯我邊。 雖被官軍, 驅逐出境, 但未大遭剉衂, 守臣復請加兵。 廷議皆謂: "此賊冥頑不悛, 罪在不宥。" 已令監督、總兵等官, 選領精兵, 往彼會合鎭守、都御史, 刻期搗巢征勦。 惟爾國王, 紹胙東藩, 輸忠於我國家, 有隆無(贊)〔替〕 , 朕甚嘉悅。 顧王國, 素稱禮義之邦, 接隣腥膻之域, 亦有以敵之乎? 我兵壓境, 賊有奔竄國境, 諒必擒而俘獻之。 王如申遣偏師, 遙相應援, 大奮貔貅之威, 同殲犬羊之孼。 逆虜旣除, 則王敵愾功勤愈茂, 而聲名豈不有以享於無窮哉? 報酬之典, 朕必不緩, 故勅。

上與使臣行禮, 命金自貞, 語使臣曰: "萬里路上, 辛苦而來, 大人之行, 曾是不意, 沿路各處, 館待諸事, 豈無闕失?" 使臣答曰: "安州平壤開城等處, 殿下委遣宰相, 厚慰, 兼致人情, 處處州府, 館待優厚, 安有闕失?" 乃就坐, 行茶禮訖, 還就坐。 使臣令通事張自孝啓曰: "建州衛 野人, 曾犯上國之境, 朝廷欲興兵勦滅, 緣本人等歸順進貢, 故從優賞賜, 不次除職, 野人不念皇恩, 似前犯邊。 帝乃命將致討, 初欲遣馬侍郞, 請兵不果, 而遣我。" 上令金自貞張有誠答曰: "當依勅書施行。 但冬夏興師, 兵家所忌。 昔匈奴, 士多墮指, 馬援征南, 疫死殆盡。 今天寒草枯, 雪深路險, 難以行兵。" 使臣曰: "朝廷赴戰軍馬摠計一十五萬, 兵非不足也。 但朝鮮, 若依期進兵, 則彼不得躱脫, 殄殲無遺矣。" 上曰: "今當冬月, 行兵最難。" 仍問朝廷攻討形勢, 使臣曰: "太監汪直、撫寧侯朱庸、前摠兵官韓贇及廣寧摠兵太監, 領兵入討。" 上問師期, 使臣出示汪太監所定日期小帖, 乃閏十月二十五日也。 上曰: "當依勅書, 抄發軍兵, 督將送之。 但今勅書, 不錄日期, 又無汪太監指授之語, 而二十五日師期甚迫, 勢不能及。" 使臣曰: "勅書則錄其大綱耳, 何得預定日期? 太監等, 當初會議, 以閏十月二十日、二十五日來十一月初三日擇定, 其後更議: ‘二十日, 則氷未堅合, 師渡爲難, 十一月初三日, 則建州地界, 距遼東不遠, 彼知聲息逃散, 寧不如二十五日之爲便。’ 此日不可前却, 且兵貴神速, 須及此日出師。" 上曰: "所謂兵貴神速者, 軍在近處, 臨幾應變, 如上國則猶可, 本國與建州,相去絶遠, 山川險阻, 安能飛到歟? 且今我兵, 須行文移, 乃可抄發, 所抄軍士, 亦當整勅器械, 此日會兵, 定不可及也。" 使臣曰: "雖發城內兵, 須備糗糧乃行, 況諸道軍士乎? 殿下之言允當, 然是期不可違也。" 上曰: "臣子當以實對, 今若對以依期出兵, 而終不及期, 是欺罔朝廷, 罪實難逃。" 使臣曰: "天順三年, 白顒之來, 亦如此例。 其時及期出兵, 今乃如是, 何哉?" 上曰: "其時則都御史李秉, 預先知會, 故備預出兵, 今則受勅後乃知, 未易卒辦耳。" 使臣曰: "聖節使護送軍, 先知此意來報, 何異於白顒時?" 上曰: "護送軍, 只報有勅書耳, 何由知勅書內辭意乎? 且師行有程, 我國距建州遼隔, 若不分星夜, 倍道兼行, 則士卒先自困斃。 是猶伏雞之搏狸、乳狗之犯虎, 無益於事也。" 使臣曰: "汪太監等, 今閏十月二十一日起兵, 〔二十〕 四日到靉陽堡北邊牙鶻關等處, 二十五日, 分五路入攻, 貴國兵, 自建州三路合攻, 則野人所居各寨, 可得殄殲, 朝廷豈不重賞? 若違此期, 大兵已去, 虜亦遠遁不得, 孤懸深入, 徒爲勞斃而已。" 上曰: "發兵則劃卽應命, 日期則勢難從之。" 使臣曰: "此日期, 吾不敢擅便進退, 欲聞殿下定日。" 上曰: "兵難遙度, 是在將帥觀勢爲之耳。 且將在閫外, 君命有所不從, 脫有勢難, 雖汪太監, 亦於定日, 不得出征, 安敢預定日期?" 使臣曰: "吾言已盡。 但汪太監, 令我率貴國官人二員前來, 今若差人往聽, 則可知我啓殿下丁寧之意。" 上曰: "今將大人之言及, 不得依期會兵之故, 當差人, (根)〔眼〕 同大人回報。" 使臣曰: "知道。" 且曰: "我來時, 平壤留半日, 開城府留半日, 碧蹄驛留半日, 以此稽緩。 明日當回程, 十七日到義州, 二十日還到遼東。 須令各驛, 擇馬遞送,護送軍, 則毋過三十人。" 上曰: "諾。" 使臣曰: "今欲拜辭。" 卽行再拜。 上讓之至再, 不得已答拜曰: "何遽如是? 大人就館, 我將往見。" 相與降階, 送至勤政門外, 相揖而別。 上還內, 有頃幸太平館。 就御室少留, 出至館中門外, 使臣出迎, 相揖至正廳。 使臣曰: "我欲殿下, 更勿起動, 故已於殿上, 拜辭而來, 今乃如是動勞, 惶恐多謝。" 上曰: "禮當如是。" 相揖就座行茶禮, 仍設下馬宴。 上將行酒, 使臣曰: "請殿下先禮。" 上曰: "敬朝廷, 敬大人, 予何敢先?" 使臣曰: "惟命。" 禮訖, 月山大君 德源君 上黨府院君 韓明澮靑松府院君 沈澮, 以次行酒。 酒行五爵, 使臣令張自孝啓曰: "俺醉甚矣。 不得久坐, 請行回酒禮。" 上曰 "大人勿飮, 從容安坐, 姑俟禮成可也。" 使臣曰: "當初殿下賜酒, 皇恐盡爵, 雖不再飮, 昏醉無知。 且使事甚重, 明日當早行。" 上曰: "王事靡盬, 大人之欲速還可也。 然朝廷, 記我小國, 特降勅諭, 仍擇大人, 委遣如此。 際會難得, 而與大人相會亦難, 且賓主之禮, 不可廢也, 請大人少留。" 使臣曰: "遼東兵期甚迫, 斷不可留也。" 遂行回杯禮訖, 相揖而出。 使臣, 送上至中門外, 上命都承旨金升卿, 留贈人情物, 使臣固拒不受。 升卿曰: "欲贈人情物于頭目。" 使臣答曰: "我旣不受, 彼安受哉?" 升卿曰: "天氣峭寒, 欲以贈衣服耳, 非他重物也。" 使臣亦許受襦衣與靴。


  • 【태백산사고본】 17책 110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71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