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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10권, 성종 10년 윤10월 7일 기미 1번째기사 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이세좌 등이 수군을 증가시키기 위한 시책과 명경의 강화를 청하니 이를 받아들이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국어(國語)》를 강(講)하기 시작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성건(成健)이 아뢰기를,

"듣건대, 중국에서 장차 우리 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할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지성으로 대국(大國)을 섬기려면 명령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군사를 일으키는 데 대한 이해(利害)는 조정에 있는 대신(大臣)들이 이미 충분하게 계산하였을 터이니, 어찌 신(臣)의 말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신(臣)의 생각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좌우(左右)에서 공격하여 더러운 오랑캐에게 불화(不和)의 씨를 만든다면, 우리 사신이 북경(北京)에 가는 행차를 저들이 반드시 중로(中路)에서 침략할 것이니, 마땅히 주청(奏請)하여 자유채(刺楡寨)를 따라 간다면 사람 사는 것이 조밀(稠密)하기 때문에 아무런 사고가 없이 왕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측근의 신하를 돌아보고 물으니,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기를,

"원병(援兵)을 청하는 일은 지금 정확하게 알 수가 없으며, 또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모두 동녕위(東寧衛)의 사람이므로 언어와 행사가 모두 우리 나라 사람과 같습니다. 지난번에 우리 조정에서 이 길을 따라 가기를 청했으나, 중국 조정에서는 동녕위(東寧衛)의 사람이 본래 조선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왕래할 즈음에 서로 따라가는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들어주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청하더라도 반드시 허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성건(成健)은 아뢰기를,

"이 길은 신(臣)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나, 다만 신(臣)이 들은 바대로 아뢰었을 뿐입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이세좌(李世佐)는 아뢰기를,

"신(臣)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었기 때문에 수군(水軍)이 피폐(疲弊)한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대저 수군은 1개월 만에 서로 체대(遞代)하게 되니, 그들의 휴식(休息)은 10여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비록 보인(保人)695) 을 주는 법을 제정했지마는, 주현(州縣)에 남는 장정(壯丁)이 없기 때문에 보충해 주지 못하고 있으며, 비록 보충해 주더라도 대개 모두 잔약하고 용렬하니, 이와 같은 군졸로써는 적군(敵軍)을 방어하려고 하더라도 어려울 것입니다. 청컨대 여러 고을의 여(旅)의 정병(正兵)까지 뽑아 내어 보인(保人)을 보충해 주도록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지사(知事) 서거정(徐居正)을 돌아보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臣)도 수군(水軍)이 쓸데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남은 백성을 모조리 찾아내어 그 군적(軍籍)에 기록하지마는, 그러나 혹 관직이 있는 사람이든지, 부귀(富貴)한 사람이든지 모두 의탁하여 정병(正兵)의 보인(保人)이 되는데, 중간에 숨기고 빠져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사람도 있게 되니, 지금 이와 같은 사람을 모조리 찾아내어 정병(正兵)에 속하게 하고, 그 정병(正兵)의 정원(定員)을 줄여서 수군(水軍)을 증가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도(道)로 하여금 장정(壯丁)을 모조리 찾아내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서거정이 또 아뢰기를,

"지금의 유자(儒者)들은 성리(性理)의 학문(學問)은 연구하지도 않고 다만 사장(詞章)만 일삼고 있으니, 경학(經學)에 밝아서 능히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은 대개 적은 편입니다. 비록 명경과(明經科)를 설치하였지마는 한 사람도 합격(合格)한 사람이 없습니다. 명경과(明經科)는 고려[前朝] 때부터 건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시행했지마는, 그러나 명경과(明經科)가 33인(人)의 밖에 있는 까닭으로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들을 선발하여 임용하는 것도 교수(敎授)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새로 과조(科條)를 제정하여 향시(鄕試)와 한성시(漢城試)와 성균관시(成均館試)에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강(講)하게 하여, 전시(殿試)에서 등제(等第)의 차례를 정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즐겨 하게 되어서 명경(明經)을 하는 사람이 장차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별도로 명경과(明經科)를 제정하여 그 장원(壯元) 이하를 모두 제술과(製述科)와 같이 서용(敍用)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서거정이 대답하기를,

"33인 이외에 별도로 과거(科擧)의 명칭을 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합니다."

하자,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서거정의 말이 옳습니다. 명경(明經)하는 사람을 식년(式年)의 반열(班列)에 있도록 하되, 또한 제술(製述)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발탁하여 임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취(試取)할 절목(節目)을 예조(禮曹)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11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6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역(軍役)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출판-서책(書冊)

  • [註 695]
    보인(保人) : 조선조 때 평민이나 천민이 출역(出役)하게 되면, 출역하지 않은 여정(餘丁)을 한두 사람 정정(正丁)의 집에 주어 집안일을 도와주게 하였는데, 이때의 여정을 말함.

○己未/御經筵。 始講《國語》。 講訖, 掌令成健啓曰: "聞上國, 將請兵我國, 至誠事大, 不可不應命也。 興兵利害, 在庭大臣, 籌之已熟矣, 奚待臣言? 臣意以謂 ‘我國, 遣兵夾攻, 構釁於醜虜, 則我使赴京之行, 彼必侵掠於中路, 宜奏請從刺楡寨而往, 則人居稠密, 可無事往來矣。’" 上顧問左右, 領事尹弼商對曰: "請兵事, 今未的知。 且其處居人, 皆東寧衛人, 言語行事, 皆如我國人。 往者, 我朝請由此路而行, 中朝以東寧衛人, 原係朝鮮, 往來之際, 不無相從, 不聽, 今雖請之, 必不許矣。"成健曰: "此路, 臣亦未能的知, 但以臣所聞, 而啓之耳。"參贊官李世佐啓曰: "臣爲忠淸道觀察使, 熟知水軍疲敝之由。 大抵水軍, 一朔相遞, 其休息, 不過十餘日。 國家雖立給保之法, 州縣以無餘丁, 不能充給, 雖給之類, 皆孱劣, 以如此之卒, 欲其禦敵難矣。 請抽出諸邑幷旅正兵, 充給保人。" 上顧問知事徐居正, 對曰: "臣亦知水軍無用也。 國家搜括遺民, 錄其軍籍, 然或有職人, 或富實人, 皆投爲正兵保人, 中間隱漏閒遊者, 亦有之。 今須搜括如此者, 以屬正兵, 減其正兵之額, 以增水軍可也。" 上曰: "其令諸道搜括以聞。" 居正又啓曰: "當今儒者, 不究性理之學, 徒事詞章, 明於經學, 堪爲師表者蓋寡。 雖立明經科, 無一人中格者。 明經科, 自前朝至國初, 皆行之, 然明經科, 在三十三人之外, 故人不以爲榮, 其選用, 亦不過敎授而已。 自今新立科條, 於鄕、漢城、館試, 使之講四書、五經, 而殿試坐次, 則人皆樂爲, 而明經者, 將輩出矣。" 上曰: "別立明經科, 其壯元以下敍用, 皆如製述科, 則何如?" 居正對曰: "三十三人之外, 別立科名, 似爲不可。" 尹弼商曰: "居正言是也。明經人, 使居式年之列, 而又能製述者, 則擢用爲可。" 上曰: "試取節目, 令禮曹, 更議以啓。"


  • 【태백산사고본】 17책 11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6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역(軍役)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