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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18일 계묘 1번째기사 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이조 정랑 홍석보의 종 주무리동의 무혐의를 밝힌 의금부 관리에게 상을 내리다

처음에는 경연(經筵)을 정지하였다가, 사시(巳時)에 이르러서 전교(傳敎)하기를,

"오늘 정사를 보는 데 틈이 있어서 경연에 나아가고자 하니, 현재 있는 경연관(經筵官)은 들어와서 강(講)하도록 하라."

하니, 동지사(同知事) 정효상(鄭孝常)·시독관(侍讀官) 이세광(李世匡)·검토관(檢討官) 정성근(鄭誠謹)이 들어와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다가, 가의(賈誼)384) 가 풍속(風俗)에서 좋아함을 논한 데에 이르러, 이세광(李世匡)이 아뢰기를,

"세도(世道)의 승강(升降)은 풍속에 달려 있는 것이니, 풍속에서 좋아함은 삼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전하(殿下)께서 몸소 절약하고 검소하시며 백성을 이끌었으나, 근래 혼인(婚姻)을 할 즈음에 양가(兩家)에서 각각 남녀가 탈 안자(鞍子)를 만들어 서로 먼저 보내기를 기하니, 사치(奢侈)의 기풍이 아직도 있습니다. 청컨대 이를 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금했는데도 지금 아직 이와 같은가?"

하였다. 정효상이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반드시 한 세대를 지난 뒤에야 좋아진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백년이 된 뒤에야 일어난다.’ 하였으니, 세속에서 좋아함은 세월(歲月)로써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제 국가에서 이미 금장(禁章)을 세웠으니, 만약 느긋하게 차츰차츰 젖어져서 오래 되어 풍속을 이루게 되면 사치의 기승이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또 《주역(周易)》에서 이른바, ‘위아래가 사귀지 않고서는 천하(天下)에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는 데에 이르러, 이세광이 이르기를,

"무릇 아랫사람으로 위에 진언(進言)하는 자가 비록 낮에 생각하고 밤에 헤아려 놓았더라도 임금 앞에 이르면 열에서 7, 8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원컨대 허심탄회하게 청납(聽納)하시어 종시(終始)가 한결같게 하소서."

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고, 정효상이 아뢰기를,

"이보다 앞서 이시애(李施愛)의 지당(支黨) 이옥련(李玉連)경주(慶州) 진도(珍島)로부터 전전(轉轉)해 옮겨 가두었다가 북청(北靑)에 이르러 옥사가 굳혀져서 마침내 사죄(死罪)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 초사(招辭)를 보니 서로 엇갈리는 것이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의금부(義禁府)에 나치(拿致)하여 조사하여서 사실을 얻어냈는데, 이시애와 같은 무리가 아니고, 곧 이조 정랑(吏曹正郞) 홍석보(洪碩輔)의 종 주무리동(朱無里同)이었습니다. 그가 이옥련으로 거짓 일컫게 된 것은 여러 번 형장(刑杖)을 맞자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거짓 자백했던 것이며, 진도군에는 이시애에게 연좌된 조옥련(趙玉連)이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이옥련이라고 일컬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경(卿) 등이 없었더라면 죄없는 자는 죽일 뻔하였다. 경 등의 밝은 판단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어 승지(承旨) 이경동(李瓊仝)에게 말하기를,

"의금부(義禁府)의 당상 낭청(堂上郞廳)을 승정원(承政院)에 불러 들여 술을 마시게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매사(每事)를 이와 같이 밝게 판단하면 그 누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겠는가?" 하고, 당상관에게 육장 부유둔(六張付油芚)과 삼합 노구(三合爐口) 각 1부씩을 내려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0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8면
  • 【분류】
    사법(司法) / 풍속-예속(禮俗)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출판-서책(書冊)

  • [註 384]
    가의(賈誼) :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문신(文臣).

○癸卯/初停經筵, 至巳時, 傳曰: "今日視事有暇, 欲御經筵, 時經筵官, 可入講。" 同知事鄭孝常、侍讀官李世匡、檢討官鄭誠謹, 入講《大學衍義》, 至賈誼論風俗好尙, 李世匡啓曰: 世道升降, 在風俗, 風俗好尙, 不可不謹。 殿下躬節儉以導民, 然近同婚姻之際, 兩家各造男女所乘鞍子, 先期相送, 奢侈之風, 猶在。 請禁之。" 上曰: "禁之而今猶如此歟?" 鄭孝常啓曰: "古云: ‘必世而後仁。’ 又云: ‘百年而後興。’ 俗尙, 未可以歲月易也。 今國家已立禁章, 若優游漸漬, 久而成俗, 則奢侈之風, 自無矣。" 又至《易》所謂: ‘上下不交, 而天下無邦者也。’ 世匡曰: "凡下之進言於上者, 雖晝思夜度, 比至上前, 什喪七八。 願虛懷聽納, 終始如一。" 講訖, 孝常啓曰: "先是, 李施愛支黨李玉連, 自慶州珍島, 轉轉移囚, 至于北靑, 鍜鍊成獄, 竟以死罪當之, 觀其招辭, 牴牾不一。 今拿致義禁府, 按覈得情, 非施愛同黨也, 乃吏曹正郞洪碩輔朱無里同也。 其所以僞稱玉連者, 屢被刑杖, 不耐其苦, 僞招耳, 珍島郡, 有施愛緣坐趙玉連, 故因稱玉連也。" 上曰: "如無卿等, 幾殺不辜矣。 深嘉卿等明辨也。" 仍謂承旨李瓊仝曰: "義禁府堂上郞廳, 召致政院飮之。" 仍傳曰: "每事如此明辨, 則誰有冤抑之事乎?" 賜堂上六張付油芚及三合爐口, 各一部。


  • 【태백산사고본】 16책 10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8면
  • 【분류】
    사법(司法) / 풍속-예속(禮俗)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