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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102권, 성종 10년 3월 28일 갑신 2번째기사 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성중에서의 음사를 금지케 하고 조강을 받고 종친의 활쏘기에 근신 입시를 불허하다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을 강(講)하다가, ‘구(丘)149) 는 다행이다. 잘못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 주는구나.’라고 한 데에 이르러, 참찬관(參贊官) 성현(成俔)이 아뢰기를,

"이것이 공자(孔子)가 성인(聖人)이 되는 이유이며, 만세(萬世)에 마땅히 본받을 바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신의 잘못을 듣기를 싫어하므로, 겉으로는 용납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실제로 기뻐하지 않으니, 어찌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을 다행하게 여기겠습니까? 임금은 더욱 마땅히 그 잘못을 기꺼이 들어야 하는 것이니, 만약 겉으로는 간쟁(諫諍)을 받아들이는 듯하면서도 그 말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정당한 의논이 어떻게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읽다가 ‘구(丘)는 하늘에 빈 지 오래이다.’라는 데에 이르자, 성현이 또 아뢰기를,

"공자(孔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귀신(鬼神)은 공경하되 멀리 한다.’고 하였으니, 모든 음사(淫祀)는 마땅히 배척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성중(城中)의 무당[巫覡]을 모두 외방(外方)에 내쫓도록 하였으나, 쫓았다 하면 곧 다시 들어오므로 성중의 음사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금령(禁令)이 있는데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는가?"

하였다. 도승지 홍귀달이 말하기를,

"법의 금지가 조금 해이해져서 음사(淫祀)를 하는 집이 간혹 있기는 하나, 세속(世俗)에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름하므로, 금하여 없애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자, 성현이 말하기를,

"모두 근절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성중에서는 용납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더욱 명백하게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강(講)하다가. ‘군자(君子)는 너그럽고 여유 있으며, 소인(小人)은 항상 불만 스러워한다.’는 데에 이르자, 성현이 아뢰기를,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은 관직을 떠나 낙양(洛陽)에 살면서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며 스스로 즐겼으니, 소위 너그럽고 여유 있는 것이고, 정위(丁謂)150) 는 순서를 뛰어넘어 높은 지위를 얻고서도 잃을까 두려워하였으니, 소위 불만스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며 물러나 있는 자는 반드시 진출(進出)시켜 등용하고, 공(功)을 다투고 승진하기를 경주하는 자는 모두 먼 곳에 내쫓으면, 군자(君子)는 나아가고 소인(小人)은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성현이 또 아뢰기를,

"근래에 관사(觀射)로써 여러 번 경연(經筵)을 폐하였는데, 신의 생각에 학문은 계속하는 것을 귀(貴)하게 여기는 것이니 성명(聖明)은 하루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조강(朝講) 후에 관사(觀射)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재(人才)는 여러 가지를 다 갖추어 완전함을 귀하게 여기는데, 어찌 한 가지 기예에 구애될 수 있겠는가? 근래에 보건대 문신(文臣)이 대부분 활을 잘 쏘는데, 내가 관사하지 않고서 거느린다면, 누가 기예를 연마하겠는가? 하물며 국가에 아무 일 없는 때를 맞아서는 열무(閱武)를 더욱 해이하게 할 수 없다."

하니, 성현이 말하기를,

"태평한 때를 맞아 열무에 유의하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로써 경연(經筵)을 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지금부터 관사(觀射)하는 날이라도 마땅히 조강(朝講)을 받도록 하겠다."

하였다.

성현이 또 아뢰기를,

"요사이 종친(宗親)이 관사(觀射)할 때 근신(近臣)과 사관(史官)을 입시(入侍)하지 못하게 하였고, 여러 신하가 관사할 때 대간(臺諫)을 또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훈척(勳戚)의 신하가 혹 공(功)을 믿고 거만해지거나 혹 술을 흠뻑 마시고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여 그대로 답습해서 풍조를 이루게 되면, 점차 군신(君臣)의 예(禮)를 잃게 될까 걱정입니다. 원컨대 대간(臺諫)과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입시(入侍)하게 하여 일마다 규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신(君臣)의 사이에 오로지 공경함을 위주로 해서는 위아래가 막혀서 그 뜻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조종조(祖宗朝)에도 내원(內苑)의 관사(觀射)에 이미 대간(臺諫)이 입시(入侍)하지 않은 예(例)가 있었다."

하였다.

이날 강(講)에 들어가려고 할 무렵 강관(講官)들이 융례문(隆禮門) 앞에 모였는데, 홍귀달(洪貴達)성현(成俔)에게 말하기를,

"예전에 정이천(程利川)151) 은 매양 경연(經筵)에서 강(講)하는 것마다 풍유(諷諭)152) 하였소. 그런데 안자(顔子)153) 가 누추한 동네에 살았다는 대목에 이르자, 좌우에서 정이천이 반드시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소. 그러나 이에 말하기를, ‘안자(顔子)는 임금을 보필하기에 족한 재능을 가지고서 누추한 동네에 살았는데도 노(魯)나라 임금이 등용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노나라가 다스려지지 못한 이유입니다.’라고 하였소.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하게 되면 마땅히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오."

하였다. 경연에 들어가게 되자 성현이 아뢰어 논(論)한 것이 많았는데, 이는 대개 또한 홍귀달의 말이 그를 격동시킨 때문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02권 9장 A면【국편영인본】 9책 70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행행(行幸)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149]
    구(丘) : 공자(孔子)의 이름으로, 자칭임.
  • [註 150]
    정위(丁謂) : 송(宋)나라 사람.
  • [註 151]
    정이천(程利川) : 북송(北宋)의 대학자.
  • [註 152]
    풍유(諷諭) : 슬며시 나무라는 뜻을 붙여서 가르치는 것.
  • [註 153]
    안자(顔子) :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

○御夕講。 講《論語》, 至 ‘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參贊官成俔曰: "此孔子所以爲聖人, 而萬世之所當法者也。 常人之情, 惡聞其過, 外似容之, 內實不悅, 焉能以知過爲幸也? 人主尤當喜聞其過, 若外受諫諍而不能用其言, 讜論何由至乎?" 讀至 ‘之禱久矣’, 又啓曰: "孔子嘗曰: ‘敬鬼神而遠之’, 凡淫祀所當斥之。 日者城中巫覡皆令黜外, 然旋黜旋入, 城中淫祀不絶, 甚不可。" 上曰: "已有禁令, 何有此事?" 都承旨洪貴達曰: "法禁稍弛, 淫祀之家或有之, 然世俗爲人祈祝, 名爲救命, 似難禁絶。" 曰: "雖不得盡絶, 不使容於城中可也。" 上曰: "申明禁之。" 講至 ‘君子(怛)〔坦〕 蕩蕩, 小人長戚戚’, 啓曰: "如 司馬光謝事居, 優游自樂, 所謂蕩蕩也; 丁謂躐取高位, 猶恐失之, 所謂戚戚也。 謙恭退托者必進而用之, 爭功競進者務皆黜遠, 則君子進, 小人退矣。" 又啓曰: "近以觀射屢廢經筵, 臣謂學貴繼續, 光明不可一日暫廢。 請於朝講後觀射。" 上曰: "人才貴於兼全, 豈可拘於一藝? 比觀文臣多善射, 予不觀射以率之, 人誰鍊藝? 況當國家無事之時, 閱武尤不可緩也。" 曰: "當昇平之時, 留意閱武, 誠爲美事。 然以此廢經筵, 不可。" 上曰: "然。 自今雖觀射日, 亦當受朝講矣。" 又啓曰: "近日宗親觀射, 近臣、史官不得入侍, 諸臣觀射, 臺諫亦不得入。 臣恐勳戚之臣, 或恃功倨傲, 或縱酒悖禮, 因循成風, 漸失君臣之禮。 願令臺諫、史官入侍, 隨事糾察。" 上曰: "君臣之間專主嚴敬, 則上下否隔而情志不通矣。 祖宗朝內苑觀射, 固無臺諫入侍之例。" 是日將入講, 講官會於隆禮門前, 洪貴達成俔曰: "昔程伊川每於經筵隨講諷諭, 至 ‘顔子居陋巷,’ 左右以謂伊川必不能言。 乃曰: ‘顔子以王佐之才居陋巷之中, 而君不能用, 此之所以不治也。’ 經筵進講, 當以此爲法。" 及入經筵, 多有陳論, 蓋亦貴達之言激之也。


  • 【태백산사고본】 16책 102권 9장 A면【국편영인본】 9책 70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행행(行幸)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