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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00권, 성종 10년 1월 4일 신유 2번째기사 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한명회 등에게 정동에게 뇌물을 내리는 문제와 황제가 구하는 의복 문제를 의논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한명회(韓明澮)에게 묻기를,

"정동(鄭同)이 병사(兵事)를 맡은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조정(朝廷)의 일을 많이 장악(掌握)하고 있으니, 대신(大臣)이 반드시 모두 삼가고 꺼릴 것이다. 내가 만약 정동에게 뇌물을 내렸다가 중국 조정에서 안다면 반드시 나를 비루하다고 할 것이니, 대체(大體)에 어떠하겠는가?"

하니, 한명회가 대답하기를,

"신의 뜻도 또한 이와 같으나, 다만 형세가 부득이한 것뿐입니다. 이제 황제(皇帝)가 구하는 것은 바로 아이들의 장난감[兒戲] 같은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궁첩(宮妾)에게 나누어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차거(硨磲)010) ·침아(針牙)·전도(剪刀)의 유(類)와 같은 것은 어찌 성지(聖旨)에서 나왔겠습니까? 반드시 이것은 정동(鄭同)의 말일 것이니, 이제 정동이 구하는 것은 모두 자질구레한 물건인데, 만약 응하지 않는다면, 소인(小人)의 심술(心術)을 또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동(鄭同)은 이미 나이가 늙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정동의 하는 것을 본받는다면 나는 뒤에 오는 폐단을 지탱하기 어려울까 두렵다."

하니, 김여석(金礪石)이 아뢰기를,

"엄시(閹寺)011) 와 사사로이 통하는 것은 대체(大體)에 심히 불가합니다."

하였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진실로 이것이 정론(正論)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한씨(韓氏)가 아직 중조(中朝)에 있어, 우리 나라를 가까히 후대하여서 그런 것입니다. 한치형(韓致亨)이 돌아올 때 8표리(表裏)와 은(銀) 1백 냥(兩)을 흠사(欽賜)하고 통주(通州)에서 전송하였으니, 정동이 비록 귀총(貴寵)012) 을 받는다 하더라도 어찌 황제에게 아뢰지 않고서 이렇게 풍성하도록 물건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 또한 가까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앞서 정동(鄭同)의 청(請)을 따라 족인(族人)에게 직위를 많이 제수하였는데, 하물며 이것을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제의 총은(寵恩)을 유달리 받은 것은 영광스럽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전조(前朝)에는 혼인(婚姻)의 연고로써 내려 줌이 심히 번거로와 끝내는 곤핍하게 되었으니, 나는 요구함이 그치지 않으면 평안(平安) 1도(道)가 반드시 공허(空虛)하게 될 것이 두렵다. 이는 직위를 제수하는 예(例)가 아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홍귀달(洪貴達)이 말하기를,

"전일에는 정동의 청을 많이 따랐는데, 이제 갑자기 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같습니다만, 황제가 구하는 물건이 의복(衣服)과 같은 것이라면 비록 만들어 올리더라도 쓸 만한 데가 없고, 또 서면에 기록하지 않았으니, 비록 한 물건이 빠졌다 하더라도 황제가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마땅히 답서하기를, ‘우리 나라의 옷이 중국의 제도와 같지 않고, 제도를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지(聖旨)에 있는 말인데, 여러 가지 모양의 의복을 어찌 궐(闕)할 수 있겠는가? 여러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널리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00권 1장 B면【국편영인본】 9책 686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경연(經筵)

  • [註 010]
    차거(硨磲) : 칠보(七寶)의 장식으로 쓰이는 조개껍질.
  • [註 011]
    엄시(閹寺) : 내시(內侍).
  • [註 012]
    귀총(貴寵) : 임금이 은총을 베풀음.

○御(御)〔經〕 筵。 講訖, (承)上問韓明澮曰: "鄭同典兵已久, 朝廷事多在掌握, 大臣必皆嚴憚矣。 我若致賂於而朝廷知之, 則必鄙我, 於大體何如?" 明澮對曰: "臣意亦如此。 但勢不獲已耳。 今皇帝所求, 正如兒戲, 是必欲分賜宮妾耳。 然如硨磲、針、牙、剪刀之類, 豈皆出於聖旨? 必是鄭同之言。 今所求, 皆細瑣之物, 若不應之, 小人心術亦不可測。" 上曰: "鄭同年已老矣。 萬一他人效鄭同所爲, 則予恐後弊難支。" 金礪石啓曰: "與閹寺私通, 大體甚不可。" 明會曰: "固是正論。 然臣意韓氏尙在中朝, 親厚我國而然也。 韓致亨之還, 欽賜八表裏、銀百兩,餞于通州, 鄭同雖貴寵, 豈不奏皇帝而賜物如此其豐乎? 是亦親寵之也。 前此從鄭同之請, 多授族人職, 況此求請乎?" 上曰: "優荷皇帝寵恩, 可謂榮矣。 然前朝以婚姻之故, 賜與甚繁, 終底困敝。 予恐求請不已, 則平安一道必爲空虛矣。 此非授職例也。" 都承旨洪貴達曰: "前日多從鄭同之請, 今遽不從, 似乎不可。 皇帝所求之物, 如衣服則雖製進無可用處, 且不錄于書, 雖缺一物, 帝豈責之? 當答云: ‘我國之衣與華制不同, 未識制度故不爲耳。’" 上曰: "聖旨有云各樣衣服, 何可闕乎? 令諸大臣博議以啓。"


  • 【태백산사고본】 16책 100권 1장 B면【국편영인본】 9책 686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경연(經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