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군 이침의 졸기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001) ·예장(禮葬)하기를 전례(前例)와 같이 하였다. 이침(李琛)의 자(字)는 문지(文之)이니, 세종(世宗)의 후궁(後宮) 신빈(愼嬪) 김씨(金氏)가 낳았는데, 정통(正統)002) 병진년003) 에 나이 7세(歲)에 밀성군(密城君)으로 봉(封)해졌다. 세조(世祖)가 그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며 우애(友愛)가 가장 돈독함을 가상히 여겨서 금병(禁兵)004) 을 맡게 하였으며, 예종조(睿宗朝)에 남이(南怡)가 반란을 모의하다가 복주(伏誅)되자, 책훈(策勳)하여 수충 보사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의 칭호[號]를 내려 주었다.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하여서는 또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었고,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0세이다. 부음(訃音)을 알리자, 임금이 심히 애도(哀悼)하여 철선(輟膳)005) 하고, 시호(諡號)를 장효(章孝)라 하였는데, 온순하고 겸손하여 위엄이 있음[溫克令儀]이 장(章)이요,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김[慈惠愛親]이 효(孝)이다. 침(琛)은 타고난 성품이 현명하고 민첩하며 몸가짐이 단중(端重)하여 집에 희첩(姬妾)을 두지 않고, 삼가 법도(法度)를 지켰으므로, 역대 임금[列聖]의 특별히 사랑함이 쇠하지 않았고, 항상 사옹원(司饔院)·문소전(文昭殿)·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가 되었다. 아들 이계(李誡)는 운산군(雲山君)이요, 이당(李譡)은 춘성군(春城君)이며, 이당(李𧭢)은 수안군(遂安君)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침(李琛)은 현명하고 분명하여 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어, 세조(世祖)가 재능과 덕량이 있다고 여겼다. 모든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명하여 종실(宗室) 속에 임하게 하여 가장 위임(委任)을 받았으며, 치산(治産)하는 데 부지런하여 가산(家産)이 아주 부유하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00권 1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86면
-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 왕실-의식(儀式)
- [註 001]조제(弔祭) : 조상하고 제사함.
- [註 002]
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註 003]
○朔戊午/密城君 琛卒, 輟朝、弔、祭、禮葬如例。 琛字文之, 世宗後宮愼嬪 金氏出也。 正統丙辰年七歲封密城君, 世祖嘉其謹愼友愛最篤, 俾典禁兵。 睿宗朝, 南怡謀亂伏誅, 策勳賜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號。 及上卽位, 又賜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號, 至是卒, 年五十。 (計)〔訃〕 聞, 上悼甚, 輟膳, 諡章孝, 溫克令儀 ‘章’, 慈惠愛親 ‘孝。’ 琛天資明敏, 行己端重, 家無姬妾, 謹守法度。 故列聖眷遇不替, 常爲司饔院、文昭殿、宗簿寺提調。 子誡 雲山君, 譡 春城君, 𧭢 遂安君。
【史臣曰: "琛明辨有幹局, 世祖器之。 凡有大事, 必命莅之, 於宗室中, 最見委任, 勤於治産, 家富鉅萬。"】
- 【태백산사고본】 16책 100권 1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86면
-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 왕실-의식(儀式)
- [註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