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성종실록98권, 성종 9년 11월 26일 계미 1번째기사 1478년 명 성화(成化) 14년

하동 부원군 정인지의 졸기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가 졸(卒)하였다. 조회(朝會)를 철폐(輟廢)하고, 부의(賻儀)·조제(弔祭)·예장(禮葬) 등을 전례(前例)와 같이 하였다. 정인지의 자(字)는 백저(伯雎)이고, 호(號)는 학역재(學易齋)이며,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고려(高麗) 때의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 정지연(鄭芝衍)의 후손(後孫)이며, 석성 현감(石城縣監) 정흥인(鄭興仁)의 아들인데, 정흥인이 내직 별감(內直別監)으로 있을 때 소격전(昭格殿)997) 에 들어가 재(齋)를 올리면서 집안을 일으킬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 진씨(陳氏)가 임신(姙娠)하였을 때 이몽(異夢)을 꾸고 정인지를 낳았는데, 5세(歲)에 독서(讀書)할 줄 알아 눈만 스치면 곧 암송(暗誦)하고 글도 잘 지었다.

영락(永樂)998) 신묘년999) 에 16세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갑오년1000) 에 문과(文科)의 제일(第一)로 뽑혀 예빈시 주부(禮賓寺注簿)에 제수(除授)되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졌다. 어느 날 군신(群臣)이 조정(朝廷)에 모였는데, 정인지가 전폐(殿陛)에서 모시었다. 태종(太宗)이 명(命)하여 앞에 나오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였으나, 다만 얼굴을 알지 못하였을 뿐이다."

하고, 머리를 들게 하고서 자세히 본 뒤에 태종세종(世宗)에게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은 인재(人材)를 얻는 것보다 더 먼저해야 할 것은 없는데, 정인지는 크게 등용(登用)할 만하다."

하였다. 그 후 여러 번 승진하여 예조(禮曹)·이조(吏曹)의 정랑(正郞)과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에 전직(轉職)되고, 선덕(宣德)1001) 정미년1002) 에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여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다. 세종이 바야흐로 문학을 숭상하여 경연관(經筵官)을 중(重)하게 선발하였는데, 무신년1003) 에 특별히 기용(起用)하여 부제학(副提學)에 경연 시강관(經筵侍講官)으로 삼았다. 정인지는 이를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경술년1004) 에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인수부 윤(仁壽府尹)·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歷任)하였다. 당시 정인지의 아버지 정흥인(鄭興仁)이 노경(老境)으로 부여현(扶餘縣)에 살고 있었는데, 정인지귀양(歸養)1005) 하기를 희망하였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제수하였다. 정통(正統)1006) 병진년1007) 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는데, 세종이 부의(賻儀)를 특사(特賜)하였고 무오년1008) 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가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천직(遷職)되었다. 세종이 판서(判書) 정연(鄭淵)에게 묻기를,

"경(卿)을 대신할 만한 자가 누구인가?"

하니, 정연이 대답하기를,

"정인지가 재주와 덕망(德望)이 출중(出衆)합니다."

하니, 곧 발탁하여 판서(判書)로 삼았다. 그리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對提學),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예조(禮曹)·이조(吏曹)·공조(工曹)의 판서(判書)와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역임(歷任)하였다. 임신년1009) 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제수되고 얼마 안되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옮겨졌다. 경태(景泰)1010) 계유년1011)세조(世祖)정난(靖難)1012) 할 때 정인지가 대책(大策)을 참결(參決)하여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승진해서 제수되고, 추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推忠衛社協贊靖難功臣)의 위호(位號)를 받았으며,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작(封爵)되었다. 을해년1013)세조가 즉위(卽位)하고는 영의정(領議政)에 승진되고, 동덕 좌익 공신(同德佐翼功臣)의 위호를 받았다. 병자년1014) 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체봉(遞封)되고 곧 이어 다시 영의정(領議政)으로 제수되었다. 천순(天順)1015) 무인년1016) 에 부원군에 체봉되었는데, 세조가 일찍이 정인지와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시비(是非)를 논란(論難)하다가 세조의 뜻에 거슬러 부여현(扶餘縣)으로 귀양갔었고, 한 달이 넘어 소환(召還)되어 다시 부원군에 봉해 졌다. 성화(成化)1017) 을유년1018) 에 나이 70세이었는데, 치사(致仕)1019) 하기를 청(請)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내려 주었다.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하고 남이(南怡)가 모역죄(謀逆罪)로 복주(伏誅)되자, 정난 익대 공신(定難翊戴功臣)의 위호를 내렸고, 성종(成宗)이 즉위하고는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의 위호를 내렸으며, 이때에 와서 졸(卒)하였는데, 나이가 83세였다.

정인지(鄭麟趾)는 타고난 자질(資質)이 호걸(豪傑)스럽고 영매(英邁)하며, 마음이 활달하고, 학문(學問)이 해박(該博)하여 통하지 아니한 바가 없었다. 세종(世宗)이 천문(天文)과 역산(曆算)에 뜻을 두어 그 대소(大小)의 간의(簡儀), 규표(圭表)와 흠경각(欽敬閣)·보루각(報漏閣)의 제작(製作)에 있어서 다른 신하(臣下)들은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정인지만이 이것을 함께 의논할 수 있다."

하고, 명하여 모두 담당하게 하였다. 또 역대(歷代)의 역법(曆法)의 같고 다른 점과 일식(日食)·월식(月食)·오성(五星)·사암(四暗), 그리고 전도(躔度)1020)유역(留逆)1021) 관계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가령 정인지가 직접 맡아서 계산한 것은 추보(推步)1022) 함이 매우 정확하여 노련(老鍊)한 일관(日官)이라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 밖에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치평요람(治平要覽)》·《역대병요(歷代兵要)》·《고려사(高麗史)》정인지가 참여하여 만들었다. 정인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국가(國家)에서 일일이 현지를 답사하여 조사한 뒤에 세금을 매기는 것은 선왕(先王)의 제도(制度)가 아닙니다."

하고, 상서(上書)하여 공법(貢法)1023) 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군신(群臣)이 각각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여 논의(論議)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마침내 정인지의 계책에 따라 이에 정인지를 순찰사(巡察使)로 삼아서, 충청도(忠淸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의 토지의 품질을 살펴보고 그에 알맞은 법을 제정(制定)하게 하니, 백성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중국의 조사(詔使)인 시강(侍講) 예겸(倪謙)이 왔을 때 정인지관반(館伴)1024) 으로 삼았는데, 어느날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있다가 예겸이 말하기를,

"이 달은 어느 분야(分野)1025) 에 있소?"

하니, 정인지가 대답하기를,

"동정(東井)에 있소이다."

하니, 예겸이 탄복하였다. 정인지의 문장(文章)은 호한(浩汗)1026) 하고 발월(發越)1027) 하여 조탁(雕琢)1028) 함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오래도록 문병(文柄)1029) 을 장악하여 고문대책(高文大冊)1030) 등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인데, 도덕이 높고 견문이 넓음[道德博聞]이 문(文)이고, 임금을 도와 끝맺음이 있음[佐相克終]이 성(成)이다. 아들은 정현조(鄭顯祖)·정숭조(鄭崇祖)·정경조(鄭敬祖)·정상조(鄭尙祖)이다. 정현조세조의 딸인 의숙 공주(懿淑公主)에게 장가들었고,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여 하성군(河城君)에 봉(封)해졌으며, 정숭조도 좌리 공신에 참여하여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정인지는 성품이 검소하여 자신의 생활도 매우 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산 늘리기를 좋아하여 여러 만석(萬石)이 되었다. 그래도 전원(田園)을 널리 차지했으며, 심지어는 이웃에 사는 사람의 것까지 많이 점유하였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이를 그르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정숭조는 아비의 그늘을 바탕으로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며, 그 재물을 늘림도 그의 아비보다 더하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98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68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註 997]
    소격전(昭格殿) : 도교(道敎)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구상화한 신을 제사하는 전당.
  • [註 998]
    영락(永樂) : 명(明)나라 성조(成祖)의 연호.
  • [註 999]
    신묘년 : 1411 태종 11년.
  • [註 1000]
    갑오년 : 1414 태종 14년.
  • [註 1001]
    선덕(宣德) : 명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 [註 1002]
    정미년 : 1427 세종 9년.
  • [註 1003]
    무신년 : 1428 세종 10년.
  • [註 1004]
    경술년 : 1430 세종 12년.
  • [註 1005]
    귀양(歸養) :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함.
  • [註 1006]
    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 [註 1007]
    병진년 : 1436 세종 18년.
  • [註 1008]
    무오년 : 1438 세종 20년.
  • [註 1009]
    임신년 : 1452 문종 2년.
  • [註 1010]
    경태(景泰) : 명나라 경제(景帝)의 연호.
  • [註 1011]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 [註 1012]
    정난(靖難) : 단종 원년(1453)에 수양 대군(首陽大君:세조(世祖))이 정권을 잡기 위해 스스로 일으킨 난으로, 이전부터 내려오던 원로 신하(元老臣下)들을 없애고 왕위에 오를 기반을 만들었음.
  • [註 1013]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 [註 1014]
    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1015]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 [註 1016]
    무인년 : 1458 세조 4년.
  • [註 1017]
    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 [註 1018]
    을유년 : 1465 세조 11년.
  • [註 1019]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조선조 때에는 당상관(堂上官)으로 치사하는 경우에 예조(禮曹)에서 매달 고기와 술을 급여하였으며, 국가의 중대한 정사로 인하여 치사하지 못하는 70세 이상된 1품관에게는 궤(几)·장(杖)을 주었음.
  • [註 1020]
    전도(躔度) : 천체 운행의 도수(度數).
  • [註 1021]
    유역(留逆) : 순역(順逆).
  • [註 1022]
    추보(推步) : 천체의 운행을 관측함.
  • [註 1023]
    공법(貢法) : 조선조 세종 26년(1444)에 규정한 지세(地稅) 제도. 전분(田分) 6등, 연분(年分) 9등법에 의하여 조세를 거두어들였음.
  • [註 1024]
    관반(館伴) : 서울에 머물러 있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한 관원. 대개 정3품 이상의 문관이었음.
  • [註 1025]
    분야(分野) : 옛날 천문학(天文學)에서 하늘을 사궁(四宮)으로 나누고, 다시 각 궁마다 일곱 성수(星宿)로 나눈 총 이십팔수(二十八宿)를 말함.
  • [註 1026]
    호한(浩汗) : 넓고 큼.
  • [註 1027]
    발월(發越) : 기상이 뛰어남.
  • [註 1028]
    조탁(雕琢) : 다듬어 손질함.
  • [註 1029]
    문병(文柄) : 문학상의 주권.
  • [註 1030]
    고문대책(高文大冊) : 국가 또는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간행된 귀중한 저술.

○癸未/河東府院君 鄭麟趾卒。 輟朝、賻、弔、祭、禮葬如例。 麟趾伯睢, 號學易齋, 河東人。 高麗僉議贊成事芝衍之後, 石城縣監興仁之子。 興仁爲內直別監, 入齋昭格殿, 默禱願生起家子。 妻陳氏有娠, 得異夢, 麟趾生, 五歲知讀書, 寓目輒誦, 善續文。 永樂辛卯, 年十六中生員試, 甲午擢文科第一名, 授禮賓注簿。 歷司憲監察ㆍ禮曹佐郞, 遷兵曹佐郞。 一日群臣會朝, 麟趾侍殿陛。 太宗命使前曰, "予久聞爾名, 但未識面爾", 令擧首熟視之後, 太宗世宗曰: "理國莫先於得人, 麟趾可大用也。" 累轉禮、吏二曹正郞, 集賢殿應敎, 宣德丁未魁文科重試, 拜集賢殿直提學, 尋丁母憂。 世宗方向文學, 重選經筵官, 戊申特起爲副提學經筵侍講官, 麟趾固辭, 不許。 庚戌右軍同知摠制, 歷藝文提學ㆍ仁壽府尹ㆍ吏曹參判。 時父興仁老居扶餘縣, 麟趾乞歸養, 世宗不許, 尋除忠淸道觀察使。 正統丙辰丁父憂, 世宗特賜賻, 戊午拜藝文提學, 遷刑曹參判。 世宗問判書鄭淵曰: "誰可代卿者?" 對曰: "鄭麟趾才德出衆", 遂擢爲判書。 歷藝文館大提學、議政府右參贊禮、吏工三曹判書、議政府左參贊。 壬申拜兵曹判書, 未幾移判中樞院事。 景泰癸酉世祖靖難, 麟趾參決大策, 陞拜議政府右議政, 賜推忠衛社協贊靖難功臣號, 封河東府院君。 乙亥世祖卽任, 陞領議政, 賜同德佐翼功臣號。 丙子遞封府院君, 尋復拜領議政。 天順戊寅遞封府院君, 世祖嘗與麟趾論儒釋是非, 忤旨謫扶餘縣, 踰月召還,封府院君。 成化乙酉年七十, 請致仕, 不許賜几杖。 睿宗卽位, 南怡謀逆伏誅, 賜定難翊戴功臣號, 上卽位, 賜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號, 至是卒, 年八十三。 麟趾天資豪邁, 胸懷谿達, 學問該(將)〔博〕 , 無所不通。 世宗留意天文曆算, 其大小簡儀ㆍ圭表及欽敬ㆍ報漏閣制作, 群臣莫窺其奧。 世宗曰: "唯麟趾可與論此", 皆命掌之。 又命撰歷代曆法同異、日月食、五星、四暗、躔度留逆, 假令麟趾手自握籌, 推步甚精, 老於日官者莫能及。 《資治通鑑訓義》《治平要覽》《歷代兵要》《高麗史》, 麟趾亦與撰之。 麟趾嘗謂: "國家踏驗收租非先王之制", 上書請(趾)〔止〕 貢法, 群臣各執所見, 論議紛紜。 世宗竟從麟趾之策, 乃以麟趾爲巡察使, 往審忠淸慶尙全羅道田品定其制, 民甚便之。 詔使侍講倪謙來, 麟趾爲館伴。 嘗夜坐, 曰: "今月在何分?" 麟趾曰: "在東井。" 嘆服。 麟趾爲文章浩汗發越, 不事雕琢。 久典文柄, 朝廷制作高文大冊, 多出其手。 謚文成, 道德博聞 ‘文,’ 佐相克終 ‘成。’ 子顯祖崇祖敬祖尙祖顯祖世祖懿淑公主, 參佐理功臣, 封河城君, 崇祖亦參佐理功臣, 封河南君

【史臣曰: "麟趾性儉素, 自奉甚薄。 然喜營産, 家累巨萬而猶廣置田園, 至於隣近人居亦多侵占, 時議非之。 其子崇祖席父蔭, 位至宰相, 其殖貨勝於乃父。"】


  • 【태백산사고본】 15책 98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68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