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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95권, 성종 9년 8월 29일 무오 1번째기사 1478년 명 성화(成化) 14년

대사헌 김유 등이 절의 땅을 혁파하지 않는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김유(金紐)가 아뢰기를,

"신 등이 요즈음 여러 번 절의 땅을 혁파하도록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원통하고 한스러움이 진실로 깊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10년에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하여서 모든 일에 해로움이 있는 것은 모두 없앴는데, 석씨(釋氏)807) 의 일만은 매양 옛 제도라고 하면서 고치지 아니하시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의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 등은 진실로 좋은 제도인데도 세조께서는 오히려 일이 없는 자가 앉아서 그 이익을 누린다고 하여 과전(科田)을 없애고 직전(職田)808) 을 만들었는데, 하물며 이 중들이 앉아서 공전(公田)의 수입을 먹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약 〈부처를〉 숭상해서 믿는다면 대간(臺諫)에서 논청(論請)함이 옳거니와 만약 선왕의 정사를 한 번 개혁하면 뒤에 의논하는 자가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일은 고쳐야 되고 아무 정사는 바꾸어야 된다고 할 것이니, 장차 일마다 고치게 되면 진실로 옳지 못하다."

하였다. 김유가 말하기를,

"선왕의 정사에도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작은 것으로 고칠 만한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소매 속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어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아무 절의 논과 밭이 몇 결(結)이고, 아무 절의 승위전(僧位田)이 몇 결인데, 모두 9천9백여 결입니다. 신이 호조(戶曹)에 물으니, 문묘(文廟)에는 토지가 없다고 합니다. 어찌 절의 땅은 이와 같은데 문묘에는 도리어 한 이랑의 밭도 없습니까?

청컨대 절의 땅을 쾌히 혁파하도록 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으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신이 보건대 역대(歷代)에 이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선왕의 옛 제도이므로 고칠 수 없다고 하신다면, 우리 태조(太祖)께서 불교를 중히 하였으니 사왕(嗣王)이 고치지 않아야 마땅할 것인데도 태종(太宗)께서는 사전(寺田)과 노비(奴婢)를 혁파하여 속공(屬公)하였습니다. 만약 태종께서 이 때에 혁파하지 아니하였으면 뒤에 반드시 고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도 이 때에 단단히 혁파한다면 태종께서 노비를 혁파한 것과 동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의 일을 어찌 갑자기 개혁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 대비(大妃)께서 위에 계시는데 선왕께서 세운 바를 모두 개혁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하다."

하니, 김유가 말하기를,

"양종(兩宗)의 원각사(圓覺寺)는 능침(陵寢)을 위해 창건한 것이므로 오히려 가하다고 하겠으나, 향화(香火)를 올리고 비는 것도 없이 전세(田稅)를 힘들이지 않고 얻는 것은 진실로 혁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없애려면 다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김유가 말하기를,

"다 없애는 것은 본래 신 등이 원하였던 바이지만, 전하께서 조종(祖宗)의 옛 법을 고칠 수 없다고 하시기 때문에 이같이 청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참작해서 하겠다."

하자, 김유가 말하기를,

"만약 참작해서 하겠다고 하시면 어느 날에 개혁하겠습니까? 비록 선왕의 일을 차마 고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신이 생각하건대 선왕의 영(靈)이 하늘에 밝게 계시므로 일에 해(害)가 있는 것을 고치면 역시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청컨대 모름지기 개혁하여 대성인(大聖人)께서 하시는 일이 보통보다 만 배나 뛰어남을 보이소서."

하였다. 사간(司諫) 경준(慶俊)이 말하기를,

"신 등이 만약 원각사(圓覺寺)를 헐고 중[沙門]을 모두 죽이기를 청한다면 진실로 따를 수 없겠으나, 이같이 자질구레한 일은 비록 혹시 고친다 하더라도 대비께서 어찌 잘못이라고 하겠습니까? 지난번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역대(歷代)에 불교를 배척한 상소문을 초(抄)하여 올리게 하시자, 조야(朝野)에서 지극히 좋은 정치를 하시리라고 바랐었는데, 이제 이 일을 들어주지 아니하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청컨대 대비께 아뢰어 개혁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의 말이 옳다. 그러나 내가 만약 불골(佛骨)809) 을 맞이하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하자, 김유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비록 부처를 좋아하지 아니하신다 하더라도 선왕께서 부처를 좋아하셨던 해독을 이제 오히려 없애지 아니하시니, 이 해로움은 부처를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대전》의 법일지라도 만약 현재 해가 있으면 모두 다 고쳤는데, 승도(僧徒)의 일에 이르러서는 매양 선왕을 일컬으면서 고치지 아니하시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말하기를,

"낙산사(洛山寺)에서 고기잡는 것을 금한 것과 강릉(江陵)의 제언(堤堰)은 모두 옳지 못한 일 가운데 큰 것이므로, 즉시 혁파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고, 지사(知事) 홍응(洪應)이 말하기를,

"산맥(山脈)을 밟아서 허물어뜨린다고 칭탁하여 길을 막은 것이 이미 잘못인데, 하물며 해산물이 절에 무슨 관계가 있어서 금하는 것입니까?"

하였으며, 좌부승지(左副承旨) 김승경(金升卿)이 아뢰기를,

"종실(宗室)은 해마다 늘어나는데 직전(職田)은 한도가 있어서 매양 군자(軍資)로써 절급(折給)하므로 군자가 해마다 줄어드니,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청컨대 절의 땅을 혁파하여 종친에게 주는 것이 적당합니다. 또 공신전(功臣田)·직전(職田)을 이미 관에서 거두게 하였는데, 사사전(寺社田)만은 중들로 하여금 스스로 거두기를 허락하여 방자하고 횡포하게 하였으니, 그 땅을 경작하는 임자가 무슨 죄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절의 땅을 어찌 관에서 거둘 수 있는가?"

하므로, 홍응이 말하기를,

"공신전·직전은 관에서 이미 세(稅)를 거두는데 절의 땅만 관에서 거두지 못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95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46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농업-전제(田制) / 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註 807]
    석씨(釋氏) : 부처.
  • [註 808]
    직전(職田) : 세조 12년(1466)에 과전(科田)을 고쳐서 제정한 사전(私田)의 하나. 개국(開國) 후 공신전(功臣田)이 양적으로 늘고, 또한 과전(科田)의 세습화(世襲化)와 관원의 수가 많아져서 경기(京畿)의 과전이 부족하게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과전을 현직자에 한하여 지급하도록 한 것임.
  • [註 809]
    불골(佛骨) : 부처의 사리.

○戊午/御經筵。 講訖, 大司憲金紐啓曰: "臣等近日屢請罷寺社田, 竟不從之, 實深痛恨。 殿下卽位十年, 勵精圖治, 凡事之有害者悉袪之, 獨於釋氏之事, 每云舊制而不改, 甚不可。 我國守信、恤養等田, 實爲美制, 然世祖猶以爲無事者坐享其利, 革科田爲職田, 況此僧人坐食公田之入, 可乎?" 上曰: "予若崇信, 則臺諫論請可矣, 若先王之政一改, 則後之議者必曰 某事可改, 某政可革也, 則將事事而改之, 固不可也。" 金紐曰: "先王之政有大有小, 此則小而可改也。" 因出袖中小簡, 歷指之, 曰: "某寺水陸田幾結, 某寺僧位田幾結, 摠九千九百餘結。 臣問于戶曹, 文廟則無田, 安有寺田如此而文廟反無一頃之田乎? 請快革寺社田。" 上顧問左右, 領事鄭昌孫曰: "臣見歷代未有如此事。 殿下若云: ‘先王舊制, 不可更革’, 則我太祖重佛敎, 嗣王宜不改, 而太宗革寺田奴婢屬公。 若太宗不於此際革之, 後必難改。 今殿下亦於此時毅然革之, 則與太宗革奴婢, 同一揆也。" 上曰: "先王之事, 豈可卒革? 今大妃在上, 而先王所建令盡革之, 固不可矣。" 曰: "兩宗圓覺爲陵寢而創建者, 猶云可也, 其無香火之祝而空食田稅者, 固當革之。" 上曰: "革則當盡革矣。" 曰: "盡革者, 本臣等之願, 而殿下云: ‘祖宗舊法不可改之’, 故請之如是耳。" 上曰: "予當斟酌爲之。" 曰: "若云斟酌爲之, 則何日而革乎? 縱曰先王之事不忍改之, 臣謂先王之靈昭昭于天, 事之有害者改之, 則亦必喜之矣。 請須改革, 以示大聖人之所作, 爲出於尋常萬萬也。" 司諫慶俊曰: "臣等若請毁圓覺寺, 盡誅沙門, 則固不可盡從, 如細瑣之事, 雖或改之, 大妃亦豈非之乎? 前者令藝文館抄歷代闢佛疏論以進, 朝野想望至治, 今不聽此事何也? 請啓大妃革之幸甚。" 上曰: "卿等之言善矣。 然予若迎佛骨, 則言之宜如此也。" 曰: "殿下雖不好佛, 先王好佛之害, 今猶未除, 其害與好佛同也。 雖《大典》之法, 若有害於今, 則皆盡革之, 至於僧徒之事, 每稱先王而不改, 甚不可也。" 昌孫曰: "洛山之禁漁、江陵之堤堰, 皆不可之大者, 固宜卽罷也。" 知事洪應曰: "托云踏破山脈而塞路, 已爲非矣, 況海錯何關於寺而禁之耶?" 左副承旨金升卿啓曰: "宗室歲繁而職田有限, 每以軍資折給, 軍資歲減, 是可慮也。 請革寺田, 給宗親爲便。 且功臣田、職田已令官收, 獨寺社田許令僧徒自收, 使之恣暴, 其田主獨何罪耶?" 上曰: "寺社之田, 豈宜官收?" 曰: "功臣田、職田, 官旣稅斂, 則寺田獨不可官收乎?" 不聽。


  • 【태백산사고본】 15책 95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46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농업-전제(田制) / 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