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을 특진한 것·승직의 서경 문제·원각사의 조라치 폐지 문제 등을 논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이세광(李世匡)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에서 정형(鄭亨)의 계급을 올린 것을 논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니 결망(缺望)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헌납(獻納) 최반(崔潘)이 아뢰기를,
"대저 변장(邊將)들은 모두 공(功)을 구합니다. 지난번에 변종인(卞宗仁)과 박양신(朴良信) 등이 천총(天聰)을 속이고 거짓으로 변공(邊功)을 올렸다가 일이 발각되어 견책을 당하였었습니다. 이제 정형이 왜인을 접대한 것도 과연 마땅함을 잃지 않은 것인지 알지 못하는데, 갑자기 한 계급을 더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정형의 계본(啓本)을 보지 아니하였는가?"
하니, 최반과 이세광이 아뢰기를,
"신 등이 이미 보았습니다. 비록 〈왜인을〉 접대한 것이 마땅하게 이루어졌을지라도 바로 변장(邊將)의 직분 안의 일이며, 더욱이 계본이 정형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 진실로 알 수 없는데, 관작(官爵)의 중한 것을 가볍게 주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근자에 윤효손(尹孝孫)이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로 있을 때에 수령(守令)의 뇌물을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특별히 1계급을 더하였다가 뒤에 다시 추탈(追奪)하였습니다. 이제 정형의 일도 알 수 없는 것인데, 이미 주었다가 뒤에 빼앗으면 사체(事體)에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으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대답하기를,
"이제 정형이 왜(倭)의 사신을 접대한 일이 마땅하였다고 하여 계급을 올리는 데에 이르면, 뒤에 변장(邊將)이 적(敵)을 죽이고 나라를 방어한 공이 있을 때 무엇으로 상을 주겠습니까?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나라는 금은 옥백(金銀玉帛)의 생산이 없어서 오직 벼슬만이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당시에 관작(官爵)을 중하게 하여, 큰 공이 있지 아니하면 함부로 사람에게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2품 벼슬은 지극히 중한데, 이제 정형은 직분으로 마땅히 할 일을 가지고 갑자기 중한 상을 더하면 너무 지나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만둘 수 없으면 체대(遞代)할 때에 벼슬을 올려서 옮기는 것이 가하며 표리(表裏)를 하사하는 것도 가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생각으로는 일본국 사신이 제주(濟州) 경계에 표박(漂泊)하여 대접을 잘못하면 반드시 혐의와 틈이 생길 것이며, 혹시 살상하는 데에 이르면 그 해가 더욱 클것인데, 정형이 통사(通事)도 없이 글로써 서로 통하여 응접(應接)하기를 적당히 하여서 후일의 틈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가상히 여겨 특별히 한 계급을 더하게 한 것인데, 경들이 옳지 못하다고 하면 반드시 계급을 더할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세광이 또 아뢰기를,
"이제 승인(僧人)의 선발 시험을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예(例)와 같이 3년에 한 번씩 행하고, 예조 낭관(禮曹郞官)이 맡아서 이 선발에 합격하는 자는 대선(大禪)이 되고 중덕(中德)이 되며 주지(住旨)가 되는데, 판사(判事)가 반드시 서경(署經)729) 을 하고 대간(臺諫)에서 고신(告身)을 줍니다. 일이 정당한 것이 아니니, 진실로 정지해서 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최반이 말하기를,
"승인(僧人)은 이미 출가(出家)하여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의(義)가 없는데, 또 어찌 벼슬을 더하겠습니까? 비록 벼슬을 제수한다 하더라도 서경(署經)하는 것은 더욱 잘못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직(僧職)을 어찌하여 서경(署經)하는가?"
하니, 정창손이 말하기를,
"조관(朝官)은 혹 선대(先代)에 흠이나 허물이 있거나 자신에게 과실이 있으면 청관(淸官)과 요직(要職)에 임명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서경을 해야 하지만, 승인(僧人)은 어찌 서경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승직(僧職)은 서경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세광이 말하기를,
"조라치(照剌赤)730) 는 본래 궁궐을 위해 설치한 것인데, 원각사(圓覺寺)에도 30명이 있으니, 신 등이 잘못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정창손도 일찍이 아뢰었습니다."
하니, 정창손이 말하기를,
"원각사에서 항상 중 30명을 기르는데, 또 조라치 30명이 있으니, 그 허비가 적지 아니합니다. 전하께서 선왕(先王)의 뜻을 폐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나, 여러 관사에서는 종[奴子]를 조라치로 삼는 데에 한정이 있는데, 원각사의 30명, 내불당(內佛堂)의 8명은 모두 쓸데없는 곳에 두었으니, 어찌 옳겠습니까? 청컨대 모름지기 없애소서."
하자, 이세광이 말하기를,
"내불당·복세암(福世菴) 등의 절에는 조두장(澡豆匠)731) 2명이 있으니, 또한 매우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불당은 어느 시대에 지은 것인가? 세종조(世宗朝)가 아닌가?"
하니, 정창손이 말하기를,
"세종 말년에 이 절을 대궐 북쪽에 지었는데, 전하께서 즉위하자 어떤 이가 불당(佛堂)은 궁성(宮城) 가까이 있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명하였으므로, 조두장도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약 부처를 좋아한다면 경 등의 말이 옳으나, 내가 부처를 좋아하지 아니하므로 이같이 자질구레한 일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니, 이세광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비록 부처를 좋아하지 않으실지라도 선왕(先王) 때의 불사(佛社)의 모든 일이 예전과 같은데, 전하께서 부처를 좋아하지 아니하심을 누가 알겠습니까? 또 신이 듣건대 대궐 안에 화공(畫工)을 모아 놓고 초목(草木)·금수(禽獸)의 모양을 그린다고 합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귀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에 마음이 팔리지 아니하면 모든 법도가 올바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쓸데없는〉 물건에 마음이 쏠리면 〈자신의〉 뜻을 잃는다.’라고 하였으니, 전하께서 그림 그리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면 물건에 마음이 쏠리는 조짐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최반이 아뢰기를,
"예전에 순(舜)임금이 칠기(漆器)를 만들려고 하니, 간(諫)하는 자가 일곱 사람이나 되었습니다. 칠기는 사치한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간하는 자가 있었던 것은 그 조짐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은 반드시 옥배(玉杯)의 유(類)732) 이다. 이제 화공(畫工)에게 그림 그리기를 명한 것은, 어찌 이를 즐기고 좋아해서 그러한 것이겠는가? 그림은 비록 정치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의(上衣)·하상(下裳)과 보불(黼黻)의 문장(文章)은 그림이 아니면 되지 아니하니, 진실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없을 수 없는 바에야 또한 재주를 정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선왕의 어용(御容)733) 을 다시 그리는 일이 있거나 중국 사신 가운데 그림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그림을 폐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최반·이세광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은 그림을 폐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저 임금은 마땅히 좋아하고 숭상함을 삼가야 하니, 좋아하고 숭상함이 지극하면 반드시 그 폐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승지(承旨)을 불러서 이르기를,
"그림 그리는 일을 폐지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9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36면
- 【분류】예술-미술(美術) / 사상-불교(佛敎)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왕실-경연(經筵) / 공업-장인(匠人)
- [註 729]서경(署經) : 임금이 새로 관리를 임명할 때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그 인선(人選)에 동의하여 신임관(新任官)의 고신(告身)에 서명하던 일. 즉 신임관의 내외 사조(內外四祖)·이력·문벌과 아내의 사조(四祖)를 기록하여 대간(臺諫)에 회부하면, 대간에서 이를 심사하여 하자가 없으면 이에 서명하였음.
- [註 730]
조라치(照剌赤) : 궁중이나 나라에서 세운 절이나 불당(佛堂)들의 뜰을 청소하는 하례(下隸).- [註 731]
조두장(澡豆匠) : 녹두·팥 따위를 갈아서 가루 비누를 만들던 장인(匠人).- [註 732]
옥배(玉杯)의 유(類) : 은(殷)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紂)가 상아 젓가락을 만드니, 기자(箕子)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상아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옥배를 만들려고 할 것이고, 옥배를 만들면 또 반드시 먼 지방의 진귀한 보물을 탐내어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된 고사(故事). 곧 점차 더욱 사치한 것을 탐내게 된다는 뜻.- [註 733]
어용(御容) : 임금의 화상.○癸巳/御經筵。 講訖, 持平李世匡啓曰: "臺諫論鄭亨增級不可, 未蒙允兪, 不勝缺望。" 獻納崔潘啓曰: "大抵邊將類皆邀功。 曩者卞宗仁、朴良信等欺罔天聰, 僞上邊功, 事覺被譴。 今鄭亨接待倭人, 亦未知果得其宜, 而遽加一級未便。" 上曰: "爾等不見鄭亨啓本乎?" 崔潘、世匡啓曰: "臣等已見矣。 雖接待得宜, 乃邊將分內事也, 況啓本出於鄭亨之手, 固不可信, 官爵重器, 不宜輕授。 比者尹孝孫爲慶尙道監司時, 以不受守令賄賂, 特加一級, 後復追奪。 今鄭亨之事, 亦未可知也, 旣與之而後奪, 則於事體何?" 上顧問左右, 領事鄭昌孫對曰: "今以鄭亨待倭使得宜, 至於增秩, 則後有邊將殺敵禦侮之功, 何以賞之? 世宗嘗言: ‘我國無金銀玉帛之産, 唯官爵可以悅人。’ 是以當時重其官爵, 非有大功, 不妄與人。 二品之職至重, 今以鄭亨職分所當爲之事, 遽加重賞, 無乃大過乎? 無已則遞代時陞遷可也, 賜表裏亦可也。" 上曰: "予意以謂日本國使漂泊濟州地界, 待之失宜, 則必生疑隙, 或至於殺傷, 則其害爲尤大, 亨無通事, 以文辭相通, 應接得宜, 俾無後釁。 予用嘉之, 特加一級, 卿等以爲不可, 則不必增秩也。" 世匡又啓曰: "今僧人選試, 如文武科例, 三年而一取, 禮曹郞官掌之。 中是選者爲大禪, 爲中德, 至爲住持, 判事必署經, 臺諫給告身。 事非經據, 固宜停罷。" 崔潘曰: "僧人旣出家, 無君臣父子之義, 又何加職? 雖使除職, 署經尤非。" 上曰: "僧職何以署經?" 昌孫曰: "朝官或先世有痕咎, 或身有過失, 則不得拜淸要職, 故必署經耳, 若僧人, 何必署經?" 上曰: "僧職不宜署經。" 世匡曰: "照剌赤本爲宮闕而設, 圓覺寺亦有三十名, 非徒臣等爲非, 昌孫亦嘗啓之。" 昌孫曰: "圓覺寺常養僧三十, 又有照剌赤三十, 其虛費不貲。 殿下不廢先王之志則美矣, 然諸司有限奴子爲照剌赤, 圓覺寺三十人、內佛堂八人, 皆置之無用之地, 豈可乎? 請須革除。" 世匡曰: "內佛堂、福世菴等寺有澡豆匠二名, 亦甚不可。" 上曰: "內佛堂構於何代? 無乃世宗朝乎?" 昌孫曰: "世宗晩年構此寺於闕北。 殿下卽位, 有言佛堂不宜近在宮城者, 命移他處。 其澡豆匠亦宜革罷。" 上曰: "予若好佛, 卿等之言是也, 予非好佛, 如此細瑣事, 不必言也。" 世匡曰: "殿下雖不好佛, 先王時佛社諸事如故, 誰知殿下不好佛乎? 且臣聞禁內會畫工, 摹寫草木禽獸。 《書》曰: ‘不役耳目, 百度惟貞。’ 又曰: ‘玩物喪志。’ 殿下留心畫事, 恐有玩物之漸。" 崔潘啓曰: "昔舜作柒器, 諫者七人。 柒器不爲侈也, 猶有諫之者, 慮其漸也。" 上曰: "爾等之言, 必玉杯之類也。 今之命工摹畫, 豈爲玩好而然哉? 圖畫雖不關政治, 上衣下裳黼黻文章, 非畫不得, 則固不可無。 旣不可無, 則亦不可不精其術也。 脫有先王御容改畫事、中國使臣求畫者, 其可廢圖畫乎?" 崔潘、世匡等啓曰: "臣等非欲廢圖畫也。 大抵人君當謹好尙, 好尙之極, 必有其弊。" 上厲聲呼承旨曰: "其罷圖畫事。"
- 【태백산사고본】 15책 9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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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