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육조·대간들을 불러 절도죄의 처벌과 광릉을 견고하게 수축할 방안을 논의하다
증경 정승(曾經政丞)과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간(臺諫)들을 불러서 정사를 의논하였다.
1.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절도죄(竊盜罪)는 3범(犯)이면 마땅히 사형(死刑)에 처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재범(再犯)하면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재범일 경우 장물(贓物)의 많고 적음을 계산해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에 관한 일이다.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신준(申浚)·고태필(高台弼)·김순명(金順命)은 의논하기를,
"절도죄는 장물의 많고 적은 것을 막론하고 3범이면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율문(律文)에 기재되어 있는데, 근래에 와서 도적이 점차 성하여지므로, 재범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한 것은 다만 폐단을 덜 생기게 하려는 한때의 방책인 것이니, 만일 도둑이 차차 병식(屛息)되면 3범에서 사형에 처하는 법을 도로 시행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예로부터 창고의 돈이나 곡식을 도둑질한 외에는 장물의 다소(多少)를 계산한다는 일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도둑이 잠잠해질 때까지 한정해서 장물의 다소를 계산할 것 없이 재범이면 사형에 처하되, 그 가운데 정상이 불쌍한 사람은 임금이 재량껏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이극배(李克培)·홍응(洪應)·강희맹(姜希孟)·허종(許琮)·어유소(魚有沼)·이극증(李克增)·양성지(梁誠之)·어세공(魚世恭)·윤흠(尹欽)·윤계겸(尹繼謙)·이극균(李克均)·신정(申瀞)·유지(柳輊)·강자평(姜子平)은 의논하기를,
"재범의 절도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속록(續錄)》에 실려 있고, 또 지금 도둑이 너무 극성하니 잠잠해질 때까지는 장물의 다소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윤사흔(尹士昕)·김국광(金國光)·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절도 3범을 교수형에 처한다는 것이 율문(律文)에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 도둑이 너무 극성한 까닭에 재범을 교수형에 처한다는 법을 특별히 세운 것은 역시 일시적인 임시 편법일 뿐입니다. 다만 오늘 한 푼의 돈을 도둑질하고 내일 한 개의 참외[瓜]를 도둑질했다고 해서 다 사형에 처한다면, 생사(生死)가 지극히 중한 일인데, 어찌 애석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법에 관(官)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장물의 다소(多少)를 계산해서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있는데, 이제 부득이하여 재범을 사형에 처하기로 한다면 재범의 장물이 1관(貫) 이상에 달하는 자만 사형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박양신(朴良信)·김자정(金自貞)은 의논하기를,
"장물의 다소는 인가(人家)에 재물이 많은가 적은가에 관계되는 것이지, 도둑질하는 자의 마음에 본래 많고 적은 것을 계산해서 훔치는 것이 아니니, 장물의 다소를 계산하지 말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정은(鄭垠)·김극유(金克忸)는 의논하기를,
"절도(竊盜) 3범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율문에 상법(常法)으로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 도둑이 점점 극성하기에 특별히 재범(再犯)을 사형에 처한다는 법을 세워서 일시적인 폐단을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제 만일 장물의 관(貫) 수의 다소를 막론하고 다 사형에 처한다면 호생(好生)의 덕(德)에 어긋남이 있으니, 장물을 계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맹현(李孟賢)은 의논하기를,
"절도 3범을 교수형에 처한다는 것이 율문에 실려 있어 우리 나라에서도 이 법을 시행하여 온 지가 또한 오래인데, 요즈음 도둑이 점점 극성하므로 시폐(時弊)를 막고자 하여 장물의 관(貫) 수의 다소를 막론하고 재범자를 모두 사형에 처하는 것은 호생(好生)의 덕(德)에 어긋나는 일이 됩니다. 하물며 형벌이 어떤 세대에서는 가볍게 되기도 하고 어떤 세대에서는 무겁게 되기도 하여 형벌을 공평하게 해야 하는데, 우리 나라는 중국의 법을 쓰고 있으므로 시폐(時弊)를 막기 위한 임시 편법을 가지고 만세의 법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문에 따라 3범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겠고, 이제 만일 가볍게 고칠 수 없다면 모름지기 재범에서는 장물의 다소를 계산해서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소서."
하고, 김유(金紐)·안관후(安寬厚)·최반(崔潘)·안선(安璿)·이세광(李世匡)·유인호(柳仁濠)는 의논하기를,
"1전(錢)을 훔친 것 따위는 비록 재범이라도 장물이 지극히 적고, 남에게 해를 입힌 것도 적으며, 또 사람마다 범하기 쉬운 일이므로, 비록 아침에 죽이고 저녁에 죽인다고 해도 역시 금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모름지기 재범으로서 장물을 통틀어 계산해서 총액 10관 이상인 자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전지하기를,
"그전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 광릉(光陵)699) 의 사토(莎土)가 해마다 무너지는 것을 견고하게 수축하는 것에 관한 일이다.
정창손·한명회·심회·윤사흔·김국광은 의논하기를,
"예로부터 능실(陵室)은 모두 안에는 석실(石室)을 만들고 밖에는 대석(臺石)을 두게 한 것이 실로 만세의 영구한 방법입니다. 우리 세조(世祖)께서 유교(遺敎)로 석실과 대석을 금하신 것은 검소한 덕을 숭상하도록 하신 소이(所以)이므로, 이는 영구한 계책이 아닐 뿐만 아니라 훗날 신서(臣庶)들의 분묘(墳墓)와 구별이 없게 될 것이니, 대체(大體)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쳐서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능 위가 무너지는 까닭은 오로지 석회(石灰)·세사(細沙)·황토(黃土)의 삼물(三物)700) 로 딴딴하게 쌓아 놓아서 잔디뿌리가 깊이 뻗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니, 이제 마땅히 삼물을 좀 얕게 깍아 내리고 황토를 두껍게 쌓은 연후에 사토(莎土)로 덮으면 잔디뿌리가 깊이 들어가 얽혀서 붕괴(崩壞)될 염려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삼물을 깎아 버린다 해도 빗물이 스며들 까닭은 없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옛날에 제왕(帝王)의 능실은 다 구릉(丘陵)처럼 만들어서 거의 한 길이나 되게 하였기 때문에 무너질 염려가 없었습니다. 세조께서 이런 형편을 깊이 생각하셔서 사대(莎臺)와 석실(石室)을 버리고 다만 토릉(土陵)을 만들게 하셨으니, 이는 만세(萬世)의 계책이며, 또한 검소를 숭상하는 아름다운 뜻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능을 만드는 사람이 삼물(三物)로써 단단하게 쌓고 사토(莎土)를 입혔기 때문에 잔디뿌리가 깊이 들어가지 못해서 자연지세(自然之勢)로 무너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삼물을 조금 깎아내고 흙을 두껍게 덮어서 너무 높지만 않게 하면 거의 옛 제도에 맞고, 무너질 염려도 없을 것이며, 또한 유교(遺敎)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김극배(金克培)·홍응(洪應)·강희맹(姜希孟)·허종(許琮)·어유소(魚有沼)·이극증(李克增)·양성지(梁誠之)·어세공(魚世恭)·윤흠(尹欽)·윤계겸(尹繼謙)·이승소(李承召)·신정(申瀞)·유지(柳輊)·신준(申浚)·고태필(高台弼)·김순명(金順命)·이맹현(李孟賢)은 의논하기를,
"광릉(光陵)의 사토가 해마다 무너진 것은 능히 지형(地形)이 높고 가파른데다가 안에 삼물이 견고하게 높이 쌓여 있어서 밖에 쌓은 사토가 잘 붙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흙비[霾雨]가 스며들면 쉽게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대체로 지형이 높고 가파르면 무너지기가 쉽고, 그 터가 넓고 두터우면 견고한 것이니, 마땅히 삼물을 깎아 내고 사토를 쌓아서 그 터는 넓게 하고 위는 높고 가파르지 않도록 하면 무너질 염려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석실(石室)과 사대석(莎臺石)을 쓰지 말라는 유교(遺敎)가 매우 엄하여 광릉(光陵)뿐만 아니라 영릉(英陵)701) ·창릉(昌陵)702) 공릉(恭陵)703) ·순릉(順陵)704) 등의 여러 능도 다 그러하니, 이제 경솔하게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극균(李克均)·강자평(姜子平)·박양신(朴良信)·김극유(金克忸)·정은(鄭垠)·김자정(金自貞)은 의논하기를,
"세조(世祖)께서 평일(平日)에 사대석을 설치하는 것을 금하셨고, 예종(睿宗)께서 그 유교(遺敎)를 이어받았는데,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또 능침(陵寢)을 모신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제 와서 대석(臺石)을 설치한다는 것은 마음에 또한 온당하지 못합니다. 능침의 형태가 높고 가파르니, 점점 이 때문에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마땅히 난간석(欄干石)을 그만두고 축토(築土)를 더하여 능의 형태를 비스듬히 비탈지게 하여 영구(永久)히 유지되도록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유(金紐)·안관후(安寬厚)·최반(崔潘)·안선(安璿)·이세광(李世匡)·유인호(柳仁濠)는 의논하기를,
"광릉의 사토가 이와 같이 무너진 것은 삼물(三物)의 혼합(混合)이 돌덩이같이 단단하게 되어 있고, 지세(地勢)가 또한 높고 가파라서 잔디 뿌리가 깊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니, 이제 만일 그 위를 깎아내어 좀 얕게 하고 그 터를 늘려서 쌓는다면 영구히 견고하게 되어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신도(神道)는 고요함[靜]을 숭상하니, 능 위에 올라가서 동작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만세(萬世)·영구(永久)의 계책이라면 잠시 이안(移安)705) 하더라도 아무런 불가할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정창손(鄭昌孫) 등의 의논에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94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9책 632면
- 【분류】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 / 왕실-궁관(宮官) / 건설-건축(建築)
- [註 699]광릉(光陵) : 세조와 세조비 정희 왕후의 능.
- [註 700]
삼물(三物) : 회삼물(灰三物).- [註 701]
영릉(英陵) : 세종과 세종비 소헌 왕후의 능.- [註 702]
창릉(昌陵) : 예종과 예종 계비 안순 왕후의 능.- [註 703]
○命召曾經政丞、議政府、六曹、臺諫議事: "一。 或云: ‘竊盜宜三犯處死’, 或云: ‘宜再犯處死’, 或云: ‘再犯則計贓多少處死事。" 鄭昌孫、韓明澮、申浚、高台弼、金順命議: "竊盜, 勿論贓之多少, 三犯處死, 律文所載。 近來盜賊滋熾, 再犯者處死, 特一時救弊之策也。 若盜賊屛跡, 則復行三犯處死之法宜矣。 自古盜倉庫錢糧外, 未聞計贓多少也。 請限盜賊寢息, 勿計贓之多少, 再犯處死。 其中情可矜者, 上裁何如?" 沈澮、尹弼商、李克培、洪應、姜希孟、許琮、魚有沼、李克增、梁誠之、魚世恭、尹欽、尹繼謙、李克均、申瀞、柳輊、姜子平議: "再犯竊盜處死, 載在《續錄》, 且今盜賊甚熾, 限寢息, 勿論贓多少, 處死爲便。" 尹士昕、金國光、盧思愼議: "竊盜三犯處絞, 載在律文, 然我國以盜賊甚熾, 特立再犯處絞之法, 亦一時權宜。 但今日盜一錢, 明日盜一瓜, 悉令處死, 生死至重, 豈可不惜? 律有盜官物者計贓多少處死, 今不得已以再犯處死, 則再犯滿一貫以上者處死何如?" 朴良信、金自貞議: "贓之多少, 係於人家財物多少, 非盜者之情本有多少也, 不計贓多少, 處死爲便。" 鄭垠、金克忸議: "竊盜三犯處死, 律有常法, 然我國盜賊滋熾, 故特立再犯處死之法, 以救一時之弊。 今若勿論贓貫多少竝處死, 則有乖好生之德, 計贓爲便。" 李孟賢議: "竊盜三犯處絞, 載在律文, 我國行之亦久。 頃緣盜賊滋熾, 欲救時弊, 勿論贓貫多少, 再犯者皆置於死, 有違好生之德。 況刑罰世輕世重, 而刑平國用中典, 則不可以救時之法, 爲萬世之法依律文三犯處絞爲便, 今若不得輕改, 須於再犯計贓多少處絞。" 金紐、安寬厚、崔潘、安璿、李世匡、柳仁濠議: "如盜一錢之類, 雖再犯贓物至少, 害於人者亦少, 且人人易犯, 雖朝殺而暮戮, 亦難止之。 須再犯而通計贓滿十貫以上者, 處死爲便。" 傳曰: "仍舊爲可。" 一。 光陵莎土年年頹壞, 堅固修治事。 昌孫、明澮、沈澮、士昕、國光議: "自古陵室, 皆內作石室, 外有臺石, 實萬世永久之道。 我世祖遺 敎禁石室、臺石, 以崇儉德, 非徒無永久之計, 後來與臣庶墳墓無別, 有乖大體, 然今不可改爲。 但陵上頹壞者, 專以石灰、細沙、黃土等三物堅築, 草根不能深入故也, 今宜削三物稍低之, 厚築黃土, 然後覆以莎土, 草根深入, 庶無崩頹之患。 雖削去三物, 又無雨水滲漏之理。" 思愼議: "古者帝王陵室, 皆作丘陵, 幾至尋丈, 故無崩頹之患。 世祖深燭是理, 去莎臺、石室, 只作土陵, 是萬世之計, 亦崇儉美意。 當時作陵者, 以三物堅築, 而衣以莎土, 根不深入, 勢不得不頹。 今宜少削三物, 厚加土, 不甚斗峻, 則庶合古制, 而無崩頹之患, 亦不違遺敎。" 弼商、克培、洪應、希孟、許琮、有沼、克增、誠之、世恭、尹欽、繼謙、承召、申瀞、柳輊、申浚、台弼、順命、孟賢議: "光陵莎土頻年頹壞者, 以陵形高峻, 內有三物堅剛高築, 其外所築莎土不能牢着, 若遇霾雨, 易至崩頹。 大抵其形峻截則易頹, 其基博厚則安固, 宜削三物, 築以莎土, 使基廣而上不高峻, 則庶無頹圯之患矣。 其勿用石室莎臺石遣敎甚嚴, 非唯光陵也, 英陵、昌、恭、順諸陵皆然, 今不可輕議。" 克均、子平、良信、克忸、鄭垠、自貞議: "世祖平日禁設莎臺石, 睿宗承遺敎, 豈敢違越? 且成寢已久, 今設臺石, 心亦未穩。 陵寢制度高峻, 無漸以此崩頹, 宜退欄干石加築土, 使陵形陂陁, 以圖永久爲便。" 金紐、寬厚、崔潘、安璿、世匡、仁濠議: "光陵莎土崩壞如是, 三物交合, 其堅如石, 勢且高峻, 草根不得深入故也。 今若削去其上稍低之, 增築其基, 則可以永固而無弊矣。 或云: ‘神道尙靜, 不可就陵上動作。’ 臣等謂此萬世永久之計, 暫時移安, 宜無不可言。" 上從昌孫等議。
- 【태백산사고본】 15책 94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9책 632면
- 【분류】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 / 왕실-궁관(宮官) / 건설-건축(建築)
- [註 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