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이경동(李瓊仝)이 형조(刑曹)의 계본(啓本)을 가지고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전옥(典獄)의 죄수(罪囚)인 양인(良人) 김말응구지(金末應仇知)가 절도를 재범(再犯)한 죄는, 《대전(大典)》에 의하여 교대시(絞待時)에 해당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장물(贓物)이 적고 또 애당초 물건을 도둑질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우연한 일로 인해 지나가다가 남의 허술하게 간직한 것을 보고 도둑질 한 것이니, 그 정상을 용서할 만하여, 감사(減死)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安寬厚)가 아뢰기를,
"김국광(金國光)은 세조조(世祖朝)에 병조(兵曹)의 겸판서(兼判書)가 되어 뇌물을 받음이 낭자(狼藉)하였으므로, 드디어 익명(匿名)의 비방(誹謗)을 받게 되자, 대사간(大司諫) 김지경(金之慶)이 탄핵(彈劾)하여 파직(罷職)되었고, 또 그의 사위 이한(李垾)은 직산 현감(稷山縣監)이 되었을 때 감림 자도(監臨自盜)559) 했는데, 김국광이 그를 도피하게 하였으니, 그 마음의 간사함을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상소(上疏)는 천청(天聽)을 속여가며 언관(言官)에게 허물을 돌리니, 그 대간(臺諫)을 경멸하고 성상을 공경치 않음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임원준(任元濬)이 간사하고 탐욕스러움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인데, 여러번 상소하여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했습니다. 성담년(成聃年)이 만약 사주를 받고 계문(啓聞)했다면 박효원(朴孝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고, 임원준이 무고(誣告)를 하였다면 임원준에게 죄가 있는 것이니, 청컨대 김국광과 임원준을 함께 법사(法司)에 회부시켜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은 옳으면 채택하고 옳지 않으면 채택하지 않는다. 대신(大臣)은 탄핵을 받으면 마땅히 문을 닫고 들어앉아 스스로 반성해야 하는데, 지금 김국광과 임원준은 대간과 쟁변(爭辨)하고자 하니 잘못이다. 그러나 국문할 수는 없다. 요즈음 이원좌(李元佐)가 현석규(玄碩圭)를 소인(小人)이라 하고, 강희맹(姜希孟)을 가리켜 탐욕스러우며 키는 짤막하고 배는 큰데 뱃속이 탐욕이 가득 찼다고 하니, 이는 반드시 현석규와 강희맹을 미워하는 자의 행위일 것이다. 아마 김언신(金彦辛)의 무리가 다 제거되지 않은 것 같다."
하니, 응교(應敎) 채수(蔡壽)가 아뢰기를,
"지난 4월 21일에 안윤손(安潤孫)이 임사홍(任士洪)의 말을 듣고 동료(同僚)에게 전하였으며, 이튿날 표연말(表沿沫)이 신(臣)에게 와서 말해 주었는데, 이렇게 해서 서로서로 알게 되자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에서 함께 의논하여 상소(上疏)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21일에 임사홍을 찾아보았을 때에는 사실 임사홍이 계문(啓聞)한 말은 듣지 못하였는데, 임사홍의 처(妻)의 상언(上言)에는, 신 등이 상소하려고 하면서 남의 허물을 엿보았다고 하고, 임원준의 상소에는, 신이 이창신(李昌臣)·안침(安琛) 등과 이 의논을 먼제 제창했고, 유진(兪鎭) 이하의 사람들은 바람에 쓸리듯이 추종했다고 하였으며, 또 신 등이 성담년(成聃年)에게 계문하도록 부탁하여 속히 그 상소를 회부시키게 했고, 또 심원(深源)을 설득시켜 상소를 대신 짓게 하면서 축수재(祝壽齋)를 파하도록 요청했다고 하니, 임원준의 이 말은 어찌 들은 바가 없이 한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임원준은 정원(政院)으로 불러서 하문(下問)하게 하시고, 신 등은 유사(有司)에 회부시켜 국문(鞫問)하시면 사(邪)와 정(正)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말하기를,
"신(臣)이 전일(前日)에 붕당(朋黨)의 폐단(弊端)을 아뢴 것은 이때문이었습니다."
지금 홍문관(弘文館)에서 임원준(任元濬)과 서로 상소하여 공박하는데, 하관(下官)으로서 상관(上官)을 헐뜯는 이러한 풍습은 아름다운 일이 못됩니다. 홍문관에서는 이미 임사홍(任士洪)이 소인(小人)임을 알았고, 또 임사홍이 대간(臺諫)을 사주한 것을 알면서도 일찍이 아뢰지 않았다가 이에 연사(連辭)한 일이 발각된 뒤에야 아뢰었으니, 이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하고, 판윤(判尹) 서거정(徐居正)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선비는 대부(大夫)에게 사양하고 대부는 경(卿)에게 사양하였으므로, 조정(朝廷)에서 예양(禮讓)을 숭상하여 상하(上下)가 서로 사양했었는데, 지금은 하관이 상관과 서로 공박하니, 이는 매우 옳지 못합니다. 지금 홍문관에서 임원준과 서로 다투고 있는데, 이러한 풍습은 조장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 풍습은 어떻게 중지시켜야 하는가?"
하니, 좌참찬(左參贊) 허종(許琮)이 말하기를,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 알려져야만 언로(言路)가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상관이라 하더라도 만약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하관이 어찌 아뢰지 않겠습니까? 오직 그 사(邪)와 정(正)을 밝힐 뿐입니다. 지금 밝히지 않고 각각 통분(痛憤)한 마음을 품게 되면 고알(告訐)하는 풍습이 끝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국문(鞫問)을 해보면 반드시 사와 정이 있을 것이다."
하고, 명하여 재추(宰樞)·대간(臺諫)과 조계(朝啓)한 재상(宰相)을 불러 함께 국문하게 하였다. 임원준이 말하기를,
"임사홍이 수금(囚禁)되었을 때 임사홍의 처(妻)가 그의 오빠 평성 도정(枰城都正) 이위(李徫)의 첩(妾)의 집에 갔었는데, 이위가 울먹이면서 말하기를, ‘전일(前日)에 채수(蔡壽)·이창신(李昌臣)이 심원(深源)을 설득하여 상서(上書)를 대신 짓게 하면서 축수재(祝壽齋)를 파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꾸짖었었는데, 지금 또 채수 등이 심원(深源)에게 부탁하여 너의 남편의 일을 아뢰게 하였다. 내가 듣고서 만류하려고 그의 집에 갔더니, 벌써 예궐(詣闕)한 다음이었다. 나는 화가 몸에 미칠까 걱정이 되는데, 이 일은 나의 장인인 채신보(蔡申保)가 지휘한 것이다.’ 하므로, 그 날로 임사홍의 처가 아들 임광재(任光載)를 데리고 남장문(南墻門) 밖에 가서 직접 아뢰려고 하였으나 아뢰지 못하였고, 또 상언(上言)을 하였으나, 역시 신원(伸冤)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임사홍이 귀양갈 때에 내가 벽제역(碧蹄驛)까지 전송하며 함께 갔었는데, 임사홍의 말이, ‘채수가 나를 헐뜯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채수 등이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 내가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예빈(禮賓)으로 공궤(供饋)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 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있을 적에는 마침 전한(典翰)의 자리가 비었었는데, 내가 여러 당상(堂上)과 의논하기를, 「전한은 고관(高官)이니, 외관(外官)에서도 등용(登用)할 만한 인재(人才)가 많을 것이다. 의망(擬望)560)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더니, 여러 당상들도 옳게 여겨서, 이에 이형원(李亨元)·이칙(李則)·배맹후(裵孟厚)를 주의(注擬)561) 하였으며, 내가 도승지(都承旨)가 되고서는 예문관(藝文館)의 응교(應敎)의 자리가 비었는데, 판서(判書)는 채수를 주의(注擬)하려 하였으나, 나는 「예문관의 응교는 사명(詞命)의 중임(重任)을 맡는 것이므로 마땅히 적임자를 택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유순(柳洵)을 추천하였으나 끝내는 채수를 응교로 삼았는데, 채수는 이 일로 인해 원망을 품고서 보복(報復)을 하고자 하여 이 의논을 먼저 제창하였습니다. 안침(安琛)은 본래 채수와 서로 친밀한 사이로서, 내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에 안침은 헌납(獻納)으로서 나에게 면책(面責)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창신(李昌臣)은 본래 나와 동년(同年)이었고, 또 내가 승지가 되었을 때에는 이창신은 주서(注書)가 되어 서로 친하였으나 지금은 채수와 결탁하였습니다.’고 했습니다.
신은 또 유진(兪鎭)에게 들으니, 당초에 상소를 지을 적에 장관(長官)과는 함께 의논하지 않았으나, 채수와 이창신이 먼저 제창하여 장관에게 보이니, 장관이 이르기를, ‘임사홍은 임금이 신임하는 신하인데, 어떻게 동요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채수가 즉시 안윤손(安潤孫)의 일기(日記)를 보여주며 또 이르기를, ‘임사홍은 근신(近臣)으로서, 천변(天變)은 족히 두려울 것이 없다 하였으니, 대간이 마땅히 견책(譴責)할 것이다. 이러한 소인은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좌우(左右)에서도 모두 옳게 여겼습니다. 임원준을 공격하는 문제는 애당초 언급(言及)되지 않았었는데, 조금 뒤에 기초한 상소문(上疏文)을 가지고 와서 장관에게 보여줄 때에는 임원준에게까지 언급되었으므로, 장관이 말하기를, ‘이러한 일을 어떻게 마음먹게 되었소?’ 하니, 채수가 대답하기를, ‘임금이 만약 물으시면 내가 마땅히 대답하겠소.’ 하였고, 장관이 또 묻기를, ‘어떤 일을 가리켜 간사(奸邪)하고 탐탁(貪濁)하다 하오?’ 하니, 채수가 대답하기를, ‘장옥(場屋)에서 대신 글을 지어준 것과 이용(李瑢)562) 의 집에서 약을 훔친 일입니다.’ 하므로, 장관이 말하기를, ‘친구로서 대신 지어준 것은 젊을 때의 일이며 용의 집에서 약을 훔친 것은 누가 모르겠소? 임금이 만약 노하여 캐고 묻는다면 말할 수 없을 것이오.’ 하니, 채수가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그 책임을 혼자 지겠소. 임금 앞에서 아뢰기를, 「임원준을 파직(罷職)시키지 않으면 신 등이 물러 나겠습니다.」 한다면, 임금이 어찌 임원준 하나 때문에 30여 인(人)을 물러나게 하겠소? 할 수 없이 임원준을 파직시킬 것입니다.’ 하면서, 채수가 이렇게 반복하며 말하자 홍문관의 5, 6인이 부당하다 하면서 오랫동안 의논이 분분했었는데, 채수가 두세 번 강변(强辯)하자 장관 등이 할 수 없이 따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임사홍이 실언(失言)한 일은 4월 21, 22일 경이었고, 임사홍을 공격한 일은 27, 28일 경에 일어났으니, 채수와 안윤손이 반드시 동의(同議)하여 한 것입니다.
신은 또 의원인 이계산(李季山)에게 들으니, 안윤손이 어떤 사람과 말하기를, ‘평생에 영화(榮華)와 명리(名利)는 다시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요즈음 이조(吏曹)에서 제일 먼저 나를 주서(注書)로 추천했는데, 두 번 다 낙점(落點)을 아니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임금이 비록 임사홍을 파직시켰으나 나도 허물하기 때문이라 한다.’고 하였다 하니, 안윤손이 만약 채수와 함께 서로 호응하여 증감(增減)하지 않았다면, 어찌 성상(聖上)의 뜻을 헤아리고 공공연하게 그러한 말을 했겠습니까? 여러 사람에게 자세히 물어보시면 채수의 간사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홍문관에서 상소한 이튿날 정언(正言) 성담년(成聃年)이 홍문관의 상소를 보려고 하자, 채수가 상소의 내용을 들어 자세히 진술하면서 그에게 계달(啓達)을 부탁하였으니, 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는데, 채수는 말하기를,
"심원(深源)에게 부탁하여 상서(上書)를 대신 짓게 하였다 함은, 신은 이러한 일이 절대 없습니다. 전번에 임사홍이 아뢴 말을 안윤손(安潤孫)이 듣고 동료(同僚)와 의논하고서 신에게 전하였고, 신은 안침(安琛)·김맹성(金孟性) 등과 상소(上疏)하기로 동의하였으나, 유진(兪鎭)·유순(柳洵)·김흔(金訢) 등은 약간 이의(異議)가 있었는데, ‘임원준은 비록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나 소인(小人)으로서의 사적(事迹)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또 그 아들을 공격하면서 그 아버지까지 언급(言及)한다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어떻겠는가?’ 하므로, 신 등이 고집하여 불가하다고 하니, 중의(衆議)가 비로소 정해져서 드디어 상소하였습니다."
하였고, 이창신(李昌臣)은 말하기를,
"축수재(祝壽齋)를 파하자고 한 것과 상소문을 대신 짓게 한 일에 대해서 신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집은 심원(深源)의 아비의 첩(妾)의 집과 이웃하고 있는데, 지난 봄에 심원(深源)과 두 번 만났을 뿐이고, 파직(罷職)이 되고서는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임사홍(任士洪)이 아뢴 말은 안윤손이 모두 사초(史草)에 기록하여 4월 22일에 채수에게 보여주고 동의(同議)하였고, 23일에 안침은 채수에게 듣고, 25일에 이우보(李祐甫)·유호인(兪好仁) 등은 표연말(表沿沫)에게 들었으며, 26일에 나는 권경우(權景祐)에게 듣고, 본관(本館)에서 서로 돌려가며 통지하여 채수에게 상소문을 기초하게 하고, 우리들이 함께 의논하여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그때 유진(兪鎭)·유순(柳洵)·김흔(金訢)·이형원(李亨元)이 말하기를, ‘임원준이 비록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나 사적(事迹)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며, 더구나 아들의 죄를 논(論)하면서 아울러 그 아버지까지 탄핵한다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어떻겠는가?’ 하므로, 서로 다시 의논하기를, ‘임원준이 간사하고 탐욕스러움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이 때에 아뢰지 않으면 성상(聖上)께서 어떻게 알겠는가?’ 하고, 상소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였고, 유진은 말하기를,
"4월 27일 사진(仕進)563) 하여 혼자 앉았는데, 채수 등과 예문관의 봉교(奉敎) 이하의 사람들이 기초한 상소문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므로, 신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임사홍은 임금에게 실언(失言)을 했으니 탄핵하는 것이 옳지만, 임원준은 비록 옛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일이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울러 탄핵하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어떻겠소?’ 하니, 채수 등이 말하기를, ‘이때에 거론(擧論)하지 않는다면 임원준의 간사함을 성상(聖上)께서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습니다. 채수 등이 물러간 다음 신이 정자(正字) 김수동(金壽童)으로 하여금 채수 등에게 말하게 하기를, ‘아들의 잘못을 거론하면서 아울러 아비의 잘못까지 거론하면 되겠는가?’ 하게 하였더니, 김수동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여러 동료(同僚)들이 듣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신이 유순과 이형원에게 말하기를, ‘임원준까지 아울러 거론한다는 것은 아마도 의리에 맞지 않는 듯하다.’ 하였더니, 유순과 이형원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렇다.’ 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채수 등이 다시 상소문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임원준의 간사함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하므로, 부득이하여 공론(公論)을 따라 상소하였습니다. 그 후에 임원준을 만났는데, 임원준이 당시의 상소한 일을 묻기에 신이 드디어 사실대로 말해 주었습니다."
하였고, 유순은 말하기를,
"4월 27일에 권경우(權景祐)가 신(臣)에게 임사홍(任士洪)이 아뢴 말을 가지고 말하기를, ‘채수(蔡壽) 등이 동의(同議)하여 상소(上疏)하려 했다.’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매우 다행이다.’ 하였고, 채수 등이 상소문을 기초하여 왔을 때에 신이 말하기를, ‘임원준(任元濬)은 비록 소인(小人)이나, 지금 임사홍을 논박(論駁)하면서 함께 말한다면 사체(事體)에 어떻겠는가? 대체로 나라를 위해 논사(論事)함은 사리(事理)를 다하여 청납(聽納)을 목적으로 할 뿐인데, 아들을 논박하면서 아비까지 언급(言及)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더니, 채수 등이 모두 말하기를, ‘임원준은 소인으로서 묘당(廟堂)에 있으며 경연(經筵)을 맡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것인데, 알면서 아뢰지 아니하면 의리에 불가하다.’ 하므로, 신이 다시 생각하니, 이는 사실 공론(公論)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의하여 상소하였습니다."
하였고, 이형원(李亨元)은 말하기를,
"4월 27일에 본관(本館)의 동료(同僚)들이 사람을 시켜 신(臣)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임사홍(任士洪)이 아뢴 것은 참으로 소인(小人)의 말이니, 공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아비 임원준(任元濬)은 간사하고 탐욕스러움이 한 세대에 비할 수 없는 자로서 묘당(廟堂)에 앉아 경연(經筵)을 맡고 있으므로 물의(物議)에 신임을 받지 못하니, 또한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드디어 기초한 상소문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임사홍(任士洪)을 공격하는 것은 매우 옳지만 그 아비까지 아울러 논박함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더니, 유진(兪鎭)·유순(柳洵)·김흔(金訢)도 그렇게 여겼는데, 여러 동료들이 대답하기를, ‘임원준의 간사하고 탐욕스러움은 임금이 모르는 바이니, 어찌 감히 용인(容忍)하겠는가?’ 하므로, 신이 다시 생각하니, 이는 공론(公論)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따랐습니다."
하였고, 안윤손(安潤孫)은 말하기를,
"평생의 영화(榮華)와 명리(名利)를 다시 얻을 수 없다는 말은 신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으며, 이계산(李季山)은 말하기를,
"신(臣)이 전일(前日)에 김지동(金智童)의 집에 갔었는데, 김지동이 말하기를, ‘안윤손이 주서(注書)에 들어가는 수망(首望)으로서 두 번이나 낙점(落點)을 받지 못한 것은, 안윤손이 임사홍(任士洪)의 말을 가지고 홍문관(弘文館)에 보여 상소(上疏)하게 하니, 임금이 그르다고 여겼으므로 낙점을 아니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임원준의 집에 가서 말했습니다."
하니, 안윤손이 말하기를,
"근일(近日)에 종형(從兄) 안식(安湜)의 집에 갔었는데, 김지동이 이 자리에 있다가, 임사홍이 죄를 받은 이유를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마침 경연(經筵)에서 임사홍의 말을 듣고 이를 기록하여 홍문관에 보이고 상소(上疏)하여 논핵(論劾)한 것이다.’ 하니, 김지동이 말하기를, ‘주서(注書)에 제수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내가 낙점을 받지 못한 것은 임금의 뜻인데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요즈음 복직(復職)한 지가 오래지 않으니, 전직(轉職)이 되기는 사실 어렵다.’ 하였습니다."
하였고, 성담년(成聃年)은 말하기를,
"홍문관(弘文館)의 상소는 원중(院中)에서 동의(同議)한 것으로써, 신에게 보기를 요청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니, 우부승지(右副承旨) 이경동(李瓊仝)이 여러 사람의 공사(供辭)를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안윤손이 어떻게 내 뜻을 알고 이런 말을 하였는가? 의금부(義禁府)에 회부시키고 이계산(李季山)도 가두어 국문(鞫問)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93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15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註 559]감림 자도(監臨自盜) : 전곡(錢穀)을 감시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도둑질을 하는 죄. 《대명률(大明律)》 형률(刑律)에 보면, "무릇 감독하여 지키는 자가 창고의 돈과 곡식 따위의 물건을 스스로 훔치는 자는 수죄(首罪)·종죄(從罪)를 가리지 않고 아울러 장죄(贓罪)로써 논한다." 하였음.
- [註 560]
의망(擬望) : 3품 이상의 당상관을 임명할 때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세 사람의 후보자[三望]를 추천하던 일.- [註 561]
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3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註 562]
이용(李瑢) : 안평 대군.- [註 563]
사진(仕進) : 출근(出勤).○己酉/受常參, 視事。 左副承旨李瓊仝將刑曹啓本三覆啓: "典獄囚良人金末應仇知再犯竊盜罪, 依《大典》絞待時。" 上曰: "此人贓物少, 且初非欲盜物, 偶因事過行, 見人慢藏偸之耳。 情可恕也, 減死可也。" 大司諫安寬厚啓曰: "金國光在世祖朝兼判兵曹, 受賄狼藉, 遂被匿名之謗, 大司諫金之慶劾罷之。 又其壻李垾爲稷山縣監, 監臨自盜, 國光使之避逃, 其心之邪曲, 難可盡言。 今者上疏, 誣罔天聽, 歸咎言官, 其輕蔑臺諫, 不敬於上, 莫甚於此。 任元濬奸貪, 人所共知, 累上疏以瀆天聽。 聃年若聽陰嗾而啓之, 則與朴孝元無異, 元濬若誣告, 則元濬有罪, 請國光、元濬竝下法司鞫之。" 上曰: "臺諫之言, 可則採之, 不可則棄之。 大臣被劾, 當杜門自省, 今國光、元濬請與爭辨誤矣。 然不可鞫也。 近日李元佐以玄碩圭爲小人, 姜希孟爲貪墨, 形短腹大, 滿腹皆貪慾, 是必憎碩圭、希孟者所爲, 疑金彦辛之黨未盡去也。" 應敎蔡壽啓曰: "去四月二十一日, 安潤孫聞任士洪之言, 傳諸同僚, 翌日表沿沫來言於臣, 以此轉相知之, 兩館共議上疏。 臣於二十一日往見士洪之時, 實未聞士洪所啓之言。 士洪妻上言, 謂臣等將欲上疏, 窺覘過惡, 任元濬上疏, 謂臣與李昌臣、安琛等首唱是議, 兪鎭以下靡然從風, 又謂臣等囑成聃年啓, 令速下其疏, 又誘深源代撰上疏請罷祝壽齋。 元濬此言, 豈無所聞而發歟? 請召元濬于政院問之, 下臣等于有司鞫之, 則可知邪正矣。" 上黨府院君 韓明澮曰: "臣前日啓朋黨之弊, 爲此故也。 今弘文館與任元濬交相上疏攻擊, 以下官詆毁上官, 如此之風, 非美事也。 弘文館旣知士洪之爲小人, 又知士洪之嗾臺諫, 而曾不啓之, 乃至辭連事覺後啓之, 是亦不正也。" 判尹徐居正曰: "古者士讓爲大夫, 大夫讓爲卿, 朝廷之上, 以禮讓爲尙, 上下相讓。 今者下官與上官相攻擊, 甚不可。 今弘文館與元濬交相爭辨, 此風不可長也。" 上曰: "此風何以止之?" 左參贊許琮曰: "下情上達, 然後言路無壅。 雖曰上官, 如有非理之事, 則下官何不啓之乎? 惟在辨其邪正而已。 今不辨之, 各懷憤心, 告訐之風, 終不息矣。" 上曰: "今若鞫之, 則必有邪正矣。" 命召宰樞、臺諫及朝啓宰相同鞫之。 任元濬曰: "任士洪囚禁時, 士洪妻往其兄枰城都正 徫妾家, 徫涕泣言曰: ‘前日蔡壽、李昌臣誘深源代撰上書, 使之罷祝壽齋, 予責之。 今又壽等囑深源啓汝夫之事。 予聞而欲止之, 抵其家, 則已詣闕矣。 予恐禍將及已, 此事吾妻父蔡申保指揮也。’ 卽日士洪妻率子光載到南墻門外, 欲親啓不得, 又上言亦未得伸。 且士洪謫去時, 予送至碧蹄驛同宿, 士洪言: ‘蔡壽所以詆毁我者非他, 壽等賜(假)〔暇〕 讀書時, 吾爲禮房承旨, 不令禮賓供饋, 後爲吏曹參議, 適典翰有闕, 吾議于諸堂上曰: 「典翰高官, 外官亦多有可用之才, 擬望何如?」 諸堂上然之, 乃以李亨元、李則、裵孟厚注擬, 吾爲都承旨, 藝文應敎缺, 判書欲以壽注擬, 吾以爲: 「藝文應敎, 詞命重任, 當擇其人」, 遂薦柳洵, 竟以壽爲應敎, 壽因此致怨, 因欲報復, 首唱此議。 安琛則本與壽交親, 我爲大司諫時, 琛爲獻納, 受我面責。 李昌臣本與我同年, 且吾爲承旨時, 昌臣爲注書, 相交親, 今與壽符同矣。’ 臣又聞於兪鎭, 當初作疏, 不與長官共議, 壽、昌臣首唱爲之, 示長官, 長官云: ‘士洪上之信任臣也, 何可動搖乎?’ 壽卽將安潤孫日記示之, 且云: ‘士洪以近臣, 謂天變不足畏, 臺諫宜譴責。 如此小人不可不攻。’ 左右皆以爲是。 攻擊元濬, 初不及之, 俄而持疏草來示長官, 則幷及元濬矣, 長官曰: ‘如此事何以生意?’ 壽答云, ‘上若有問, 我當對之。’ 長官亦問: ‘指何事爲奸邪貪濁’, 壽云: ‘以場屋代述, 瑢家偸藥事也’, 長官曰: ‘朋友代述, 少時事也, 瑢家偸藥, 人誰不知? 上若怒而窮問, 則不可說也。’ 壽曰: ‘吾當獨任其咎。 若於上前啓云: 「不黜元濬, 臣等當退。」 則上豈爲一元濬退三十餘人乎? 不得已罷元濬矣。’ 壽如此反覆語之, 弘文館五六人以爲不當, 駁議良久, 壽再三强辯, 長官等不得已從之。 士洪失言之事, 在四月二十一二日間, 士洪攻擊之事, 發於二十七八日間, 壽與潤孫必同議爲之矣。 臣又聞於醫員李季山, 潤孫與人言曰: ‘平生榮顯名利, 不復得矣。 近者吏曹以我首薦注書者再, 皆不落點, 此無他上雖罷士洪, 而亦過我耳’, 潤孫若不與壽相應增減, 何以揣度上意, 公然有是言乎? 歷問諸人, 則壽之奸詐可知矣。 且弘文館上疏翌日, 正言成聃年欲見弘文館疏, 壽擧疏意歷陳之, 屬令啓達, 其情可知矣。" 蔡壽曰: "屬深源代製上書, 臣萬無此理。 前者士洪所啓之辭, 安潤孫聞之, 議於同僚, 次傳於臣。 臣與安琛、金孟性等同議上疏, 兪鎭、柳洵、金訢等稍有異議, 云: ‘元濬雖曰奸貪小人, 事迹未形, 且攻擊其子而幷及於父, 於義何如?’ 臣等固執以爲不可, 衆議始定, 遂上其疏。" 李昌臣曰: "祝壽齋請罷, 上疏代製事, 臣不與焉。 臣家與深源父妾家相隣, 去春與深源再會而已, 及罷職不與相見。 士洪所啓之言, 安潤孫悉錄史草, 四月二十二日示蔡壽同議, 二十三日安琛聞諸壽, 二十五日李祐甫、兪好仁等聞諸表沿沫, 二十六日我聞諸權景祐, 本館轉相通知, 令壽草疏, 我等共議斤削。 其時兪鎭、柳洵、金訢、李亨元曰: ‘元濬雖奸邪貪濁, 而事迹未露, 況論子罪而幷劾其父, 於義何如?’ 更相議曰: ‘元濬奸貪, 人所共知, 此時不啓, 聖上何由知之?’ 議合上疏。" 兪鎭曰: "四月二十七日仕進獨坐, 蔡壽等及藝文奉敎以下持疏草示之。 臣見之曰: ‘士洪則失言於上, 劾之可也, 元濬雖有前過, 事已久矣, 幷劾之, 於義何如?’ 壽等云: ‘此時不論, 則元濬奸邪, 聖上何由知之?’ 壽等退, 臣令正字金壽童言于壽等曰: ‘論子之不善而幷論父之過失何如?’ 壽童還曰: ‘諸僚不聽。’ 臣言於柳洵、李亨元曰: ‘幷論元濬, 似不合於義。’ 洵、亨元曰: ‘我意亦然’, 俄而壽等更持疏示我等曰: ‘元濬之邪, 不可不論也’, 不得已從公論上疏。 其後見元濬, 元濬問當時上疏之事, 臣遂說之以實矣。" 柳洵曰: "四月二十七日權景祐語臣以士洪所啓之言, 曰: ‘與蔡壽等同議欲上疏’, 臣答云: ‘幸甚’, 壽等草疏來, 臣云: ‘元濬雖小人, 今因論士洪而幷及之, 於事體何如? 大抵爲國論事, 務盡事理, 期於聽納, 論子及父, 無乃太過乎?’ 壽等皆云: ‘元濬以小人, 居廟堂帶經筵甚未便, 知而不啓, 於義不可’, 臣更思之, 實是公論。 乃同議上疏。" 李亨元曰: "四月二十七日, 本館同僚使人招臣謂曰: ‘士洪所啓, 眞小人之言, 不可不攻, 其父元濬奸詐貪濁, 一代無比, 坐廟堂帶經筵, 物議不孚, 亦不可不攻’, 遂示疏草。 臣云: ‘士洪攻之甚可, 幷論其父, 無乃過乎?’ 兪鎭、柳洵、金訢亦以爲然, 諸僚答曰: ‘元濬奸貪, 上所未知, 安敢容忍?’ 臣更思之, 此是公論, 故從之。" 安潤孫曰: "平生榮顯名利不復得’ 之語, 臣所不言。" 李季山曰: "臣前日往金智童家, 智童言: ‘潤孫再入注書首望, 不受點, 是潤孫以任士洪之言示弘文館, 使之上疏, 上意非之, 故不落點耳。’ 臣聞此言, 往任元濬家言之。" 潤孫曰: "近日往從兄安湜家, 金智童在座, 問任士洪受罪之因, 臣答曰: ‘適於經筵聞士洪之言, 錄示弘文館, 上疏論劾。’ 智童曰: ‘不得拜注書何也?’ 答曰: ‘我未受點天意, 何知? 近日復職未久, 遷轉實難矣。’" 成聃年曰: "弘文館上疏, 院中同議, 使臣請見而已。" 上御宣政殿, 右副承旨李瓊仝啓諸人供辭。 上曰: "潤孫何知予意而發此說乎? 其下義禁府, 季山亦囚鞫之。"
- 【태백산사고본】 15책 93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15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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