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의정 윤자운의 졸기
우의정(右議政) 윤자운(尹子雲)이 졸(卒)하니, 철조(轍朝)460) 하고, 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와 같이 하였다. 윤자운의 자(字)는 지망(之望)이며, 무장(茂長) 사람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윤소종(尹紹宗)이고, 조부(祖父)는 윤회(尹淮)인데,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윤자운은 나면서부터 영리하고 총명하여 정통(正統)무오년461) 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갑자년462) 에 문과(文科)에 뽑혀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선보(選補)되었다가, 여러 차례 승진되어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이르렀고, 이조 좌랑(吏曹佐郞)과 사간원 좌헌납(司諫院左獻納)·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를 역임하였다. 경태(景泰)계유년463) 에 세조(世祖)가 정난(靖難)464) 하고, 중외(中外)의 모든 군사(軍事)를 도통(都統)하여 부(府)를 설치하고 요속(僚屬)을 두자, 윤자운을 경력(經歷)으로 삼았고, 즉위(卽位)함에 미쳐서 공훈(功勳)을 찬양하여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겸하였다가 곧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오르고, 다시 천전(遷轉)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천순(天順)경진년465) 에 조모(祖母)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이때 세조가 모련위(毛憐衛)를 정벌하려고 하여 장차 사유(事由)를 갖추어서 〈중국에〉 아뢰려고 하였는데, 적당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워서, 좌우(左右)에서 한두 재상(宰相)을 천거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윤자운보다 나은 이가 없다."
하며, 곧 기복(起復)466) 하여 가정 대부(嘉靖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삼고, 무송군(茂松君)으로 봉하여 보내니, 윤자운이 두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돌아옴에 미쳐서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옮겼는데, 상제(喪制)를 마치기를 청하였으나, 또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오년467) 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에 오르고, 성화(成化)을유년468) 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 되었다. 이때에 윤자운의 매부 신숙주(申叔舟)가 영의정이 되었는데, 조정에서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윤자운은 피혐(避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나, 세조가 말하기를,
"정부(政府)는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불가하다. 무송(茂松)469) 을 두고 누가 할 것인가?"
하였다. 병술년470) 에 좌참찬(左參贊)에 오르고, 정해년471) 에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이때에 조정에서 함길도(咸吉道)에 사변이 있음을 듣고, 윤자운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서 진압하게 하였는데, 〈윤자운이〉 이르니, 이시애(李施愛)가 이미 반역하여 절도사(節度使)와 여러 진장(鎭將)을 죽였으며, 함흥(咸興) 사람이 관찰사(觀察使)의 주관(州官)을 죽이고, 또 윤자운을 죽이려고 하여 칼날을 드러내며 둘러서니, 윤자운이 조용히 타일러서 해산시켰다. 도적들이 병력(兵力)으로 지킨 것이 무릇 7일이었는데, 〈윤자운이〉 돌아옴에 미쳐서 세조가 대내(大內)에서 인견하고 위로하였다. 기축년472) 에 우의정으로 제수되었다가 곧 좌의정에 옮기고, 경인년473) 에 영의정에 올랐는데, 을미년474) 에 갈려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예조 판서를 겸하였다가 병신년(丙申年)475) 에 다시 우의정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63세이다.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인데, 충신(忠信)하고 예(禮)에 의거함이 ‘문(文)’이고, 박문(博聞)하고 다능(多能)함이 ‘헌(憲)’이다. 윤자운은 사람됨이 단아하고 세밀하여 처음 벼슬할 때부터 대배(大拜)476) 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공부(公府)의 탄핵을 입지 아니하였다. 아들이 둘인데, 모두 어리석고 미련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윤자운은 성질이 편협하고 다른 재능(才能)이 없는데, 두 번이나 정승으로 들어가서 건명(建明)한 바가 없었고,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에 도적이 조정을 속이고자 하여 위서(僞書)를 지어서 협박해 서명(署名)하게 하니, 윤자운이 머리를 숙이고 그대로 따랐으며, 매양 도적을 대하여 반드시 대인(大人)이라고 일컬으니, 듣는 자가 비루하게 여겼다. 아침 저녁으로 일찍이 어머니의 집을 지나면서 보살피지 아니함이 많았으므로, 그 마을 사람이 서로 이르기를, ‘이 할머니는 아들이 없다.’고 하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92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9책 605면
- 【분류】인물(人物) / 풍속-예속(禮俗) / 역사-편사(編史)
- [註 460]철조(轍朝) : 조회를 정지함.
- [註 461]
무오년 : 1438 세종 20년.- [註 462]
갑자년 : 1444 세종 26년.- [註 463]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註 464]
정난(靖難) : 조선조 단종(端宗) 원년(1453)에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정권 장악을 위해 반대파를 없앤 사건.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은 피살되고, 안평 대군(安平大君)은 사사(賜死)되었음.- [註 465]
경진년 : 1460 세조 6년.- [註 466]
기복(起復) : 상중에 있는 이를 벼슬에 나아가게 함.- [註 467]
임오년 : 1462 세조 8년.- [註 468]
을유년 : 1465 세조 11년.- [註 469]
무송(茂松) : 윤자운을 가리킴.- [註 470]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註 471]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註 472]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註 473]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註 474]
○右議政尹子雲卒。 輟朝弔祭禮葬如例。 子雲字之望, 茂長人也。 曾祖紹宗祖淮, 皆以文章著名。 子雲生而穎悟, 正統戊午中進士, 甲子擢文科, 選補藝文檢閱, 累陞至集賢殿副修撰, 歷吏曹佐郞、司諫院左獻納、集賢殿應敎。 景泰癸酉世祖靖難, 都統中外諸軍事, 開府置僚屬, 以子雲爲經歷。 及卽位策勳, 賜推忠佐翼功臣號, 以大護軍兼知司諫院事, 俄陞承政院同副承旨, 轉至都承旨。 天順庚辰丁祖母憂, 時世祖征毛憐衛, 將具由聞奏, 難其人, 左右薦一二宰相, 世祖曰: "無踰於子雲, 卽起復爲嘉靖吏曹參判, 封茂松君遣之, 子雲再辭不許。" 及還轉仁壽府尹, 請終制又不許。 壬午陞資憲兵曹判書, 成化乙酉正憲議政府右參贊。 時子雲妹壻申叔舟爲領議政, 朝議皆以子雲當避世祖曰: "政府非其人不可。 舍茂松而誰?" 丙戌陞左參贊, 丁亥陞右贊成。 時朝廷聞咸吉道有變, 以子雲爲體察使往鎭之, 至則李施愛已反, 殺節度使、諸鎭將, 咸興人殺觀察使州官, 又欲殺子雲, 露刃環立, 子雲從容譬解之, 賊以兵守之凡七日, 及還世祖引見大內慰之。 己丑拜右議政, 俄轉左議政, 庚寅陞領議政, 乙未遞封府院君兼禮曹判書, 丙申復爲右議政, 至是卒, 年六十三。 謚文憲, 忠信據禮文, 博聞多能憲。 子雲爲人端雅詳密, 自筮仕至大拜, 未嘗被公府之劾。 子二, 皆癡騃。
【史臣曰: "子雲性褊狹, 無他才能, 再入相府, 無所建明, 李施愛之亂, 賊欲欺朝廷, 作僞書脅使署名, 子雲俛首從之, 每對賊必稱大人, 聞者鄙之。 朝夕嘗過母家, 而多不定省, 其里人相謂曰: ‘此嫗無子矣。’"】
- 【태백산사고본】 14책 92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9책 605면
- 【분류】인물(人物) / 풍속-예속(禮俗) / 역사-편사(編史)
- [註 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