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준이 수령의 탐욕, 사사전의 폐단을 지적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사간(司諫) 경준(慶俊)이 아뢰기를,
"수령이 어질면 백성이 그 혜택을 입는 것인데, 지금의 수령이 혹은 어리석어 사리에 어둡고 잔렬(殘劣)하여 아전들에게 농락되는 바가 되고, 혹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착취하여 권문(權門)에 뇌물을 주기도 하고, 혹은 탐묵(貪墨)함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 감림(監臨)324) 하면서 스스로 도둑질하는데, 감사(監司)로 있는 자가 혹은 친구이거나 혹은 친척이거나 혹은 권문 귀족(權門貴族)의 자제이기 때문에 용서하여 온전하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탐욕하고 청렴함의 분별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제도(諸道) 감사에게 유시(諭示)를 내려서,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뛰어난 이를 기록해 아뢰게 하여 특별히 포상(褒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자,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아뢰기를,
"〈외임(外任)과 내직(內職)에〉 나가고 들어가는 수고로움을 고르게 하는 법은 영갑(令甲)에 나타나 있는데, 이제 수령을 바꾼 지 겨우 두어 달을 지나서 문득 다시 외임에 서임(敍任)하면 법을 세운 본의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였고, 영사 노사신(盧思愼)은 아뢰기를,
"예전에 장차 크게 쓰려고 하는 선비는 반드시 먼저 이치(吏治)325) 를 시험하였으니, 청컨대 육조 낭관(六曹郞官)으로 하여금 거관(去官) 때에 반드시 외임 서용에 그 정치 업적이 특이한 자는 벼슬을 올려서 그 나머지 사람을 권려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외임 절목(外任節目)은 마땅히 대신들과 의논하여 행할 것이다."
하였다. 경준이 또 아뢰기를,
"이제 호조(戶曹)의 전안(田案)326) 을 상고하건대, 사사전(寺社田)이 매우 많으니, 청컨대 선왕(先王)께서 특별히 하사한 것 외에는 모두 혁파(革罷)하여, 벼슬에 있으면서 녹(祿)이 없는 자에게 주게 하소서."
하고, 정창손은 말하기를,
"원각사(圓覺寺)분수승(焚修僧)327) 을 공궤(供饋)하는 여러 물건을 제사(諸司)로 하여금 진공(進供)하게 하며, 또 조라치[照剌赤] 30명과 기인(其人) 약간 명이 있어 그 일을 이바지하니, 매우 적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조종조(祖宗朝)로 부터 있었으니, 이제 모두 없애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하였다. 장령(掌令) 김제신(金悌臣)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영명(英明)한 임금도 부처에게 미혹함을 면치 못하였는데, 우리 세종 대왕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聖人)인데도 오히려 말년(末年)에 부처를 좋아하는 누(累)가 있었으니,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힘써 그 뿌리를 끊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승인(僧人)을 돕겠는가? 다만 선왕조(先王朝)의 일이므로 하루 아침에 모두 없애는 것은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자, 정창손이 말하기를,
"만일 그것이 도(道)가 아니라면 어찌 선왕조의 일이라 하여 고치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경준이 또 아뢰기를,
"토목(土木)의 역사(役事)가 이제 성(盛)한데, 사대부(士大夫)의 집을 비록 간가(間架)의 수는 정하였지만 높이와 넓이의 제도는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짓는 자가 높고 넓게 하기를 힘써서 그 한 간(間)이 보통 집 두 칸에 준합니다. 이제 듣건대 소공주(小公主) 집이 참람하여 궁궐에 비교된다고 하니, 이처럼 사치스럽고 크게 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김제신은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국초(國初)에 왕자·왕녀의 집은 새로 짓는 것이 없고 모두 사서 내려 주었는데, 홀로 문종조(文宗朝)에 공주의 집을 짓자 그때 대간(臺諫)에서 논박(論駁)하니, 문종께서 하교하시기를, ‘내가 딸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간가(間架)의 척수(尺數)를 정하라.
하였다. 경준이 또 아뢰기를,
"지금 혼인하는 자가 다투어 사치함을 숭상하여서, 이로 인해 혼인을 제때에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하였고, 홍응(洪應)이 말하기를,
"또 하나의 폐단이 있습니다. 사위의 아비와 며느리의 아비가 서로 모여서 잔치하는 것도 오히려 옳지 못한데, 이제는 사위의 어미와 며느리의 어미가 또한 뻔뻔스럽게 서로 모여서 잔치하니, 이는 폐단이 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면 혼인에 금하는 법을 다시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제신이 말하기를,
"김견수(金堅壽)는 성품이 본래 광망(狂妄)하여 제조(提調)가 되기에 합당하지 못하며, 요즘 또 종친(宗親)을 욕한 까닭으로 바야흐로 추핵(推劾)을 당하였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김제신이 이조(吏曹)의 〈관원을〉 국문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조 당상(吏曹堂上)이 하나가 아닌데, 강희맹(姜希孟)이 어찌 능히 사정(私情)을 쓰겠는가?"
하였다. 김제신이 또 술을 금하기를 청하여 임금이 좌우에게 물으니, 정창손이 말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는 매양 농삿달에 항상 술을 쓰는 것을 금하였으니, 백성의 식량이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요즘 조선(漕船)의 패몰(敗沒)이 많으므로 내가 심히 마음이 아프고 염려하니, 술을 금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김제신이 또 아뢰기를,
"관사(觀射)는 유희에 가까운데, 전일 경회루 밑에서 관사할 때에 주상께서도 종친과 더불어 짝지어 활을 쏘았으니, 옛말에 이르기를, ‘태양(太陽)은 만물과 함께 할 수 없고, 임금은 신하와 더불어 그 장단(長短)을 겨룰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짝지어 활을 쏠 때와 술이 취한 사이에 종친들이 어찌 엄숙하고 공경하는 예(禮)를 다하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가인(家人)328) 의 예이므로 마땅히 화(和)함으로써 주됨을 삼은 것이다. 세종께서도 일찍이 격봉희(擊棒戲)329) 를 하셨기 때문에 이제 또한 이 행사가 있었다."
하고, 인하여 좌우에게 물으니, 정창손이 대답하기를,
"무재(武才)는 폐할 수 없습니다. 《사기(史記)》에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덕을 칭찬하기를, ‘원유(苑囿)를 파하고 상림(上林)에서 활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미담(美談)입니다."
하였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정창손의 대답은 잘못이다. 사예(射藝)는 진실로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반드시 임금이 친히 활을 쏜 뒤에야 사예를 폐하지 아니함이 되겠는가? 한나라 문제가 상림에서 활을 쏘았다는 것은 본래 신하들과 더불어 짝지어 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닌데, 정창손이 끌어대어서 미담(美談)으로 삼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91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83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행행(行幸) / 왕실-경연(經筵)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농업-전제(田制) / 사상-불교(佛敎) / 재정-역(役) / 건설-건축(建築) / 풍속-예속(禮俗) / 사법-법제(法制) / 역사-사학(史學)
- [註 324]감림(監臨) : 친히 가서 감독함.
- [註 325]
이치(吏治) : 수령이 백성을 다스림.- [註 326]
전안(田案) : 토지 대장.- [註 327]
○御經筵。 講訖, 司諫慶俊啓曰: "守令賢則民蒙其澤, 今之守令, 或愚暗殘劣, 爲吏所弄, 或剝民膏血, 賄賂權門, 或貪墨無恥, 監臨自盜。 爲監司者, 或以故舊, 或以親戚, 或以權貴子弟, 容而全之, 由是貪廉無別。 臣願下諭諸道監司, 令錄啓治民優等, 特褒賞。" 上顧問左右曰: "何如?" 領事鄭昌孫曰: "出入均勞之法, 著在令甲, 今遞守令纔隔數月, 旋復敍外, 有違立法本意。" 領事盧思愼啓曰: "古者士之將大用者, 必先試吏治, 請今六曹郞官去官時, 必敍外任, 其政績特異者陞職, 以勵其餘。" 上曰: "外任節目, 當與大臣議而行之。" 慶俊又啓曰: "今考戶曹田案, 寺社田甚多。 請先王特賜外, 一皆革罷, 以給從仕無祿者。" 昌孫曰: "圓覺寺焚修僧供饋諸物, 令諸司進供, 且有照剌赤三十名, 其人若干名以供其役, 甚未便。" 上曰: "此自祖宗朝有之, 今不可盡革也。" 掌令金悌臣啓曰: "自古英明之主, 未免惑佛, 我世宗天縱之聖, 猶於末年, 亦有好佛之累, 願聖上務絶根株。" 上曰: "吾何庇僧人哉? 只以先王朝事, 一朝盡革, 不可故也。" 昌孫曰: "如其非道, 豈以先王事而不改之乎?" 慶俊又啓曰: "土木之役, 於今爲盛, 士大夫家雖定間架之數, 而不定高卑廣狹之制, 故造家者務爲高廣, 其一間准常家兩間。 今聞小公主家僭擬宮闕, 不可(可)如此侈大。" 悌臣曰: "臣聞國初王子王女家, 未有新造, 皆買而賜之。 獨文宗朝造公主家, 其時臺諫論駁, 文宗敎曰: ‘予以一女故耳。’" 上曰: "更定間架尺數。" 慶俊又啓曰: "今之婚姻者, 爭尙華侈, 因此婚姻失時者有之。" 洪應曰: "亦有一弊。 壻之父、婦之父相會宴, 猶不可, 今則壻之母ㆍ婦之母亦靦西相會, 此弊之大者也。" 上曰: "然則婚姻禁章, 更議爲便。" 悌臣曰: "金堅壽性本狂妄, 不合爲提調。 近日又以辱宗親, 時方見推, 請改差。" 上曰: "可。" 悌臣請鞫吏曹, 上曰: "吏曹堂上非一, 希孟豈能容私也?" 悌臣又請禁酒。 上問左右, 昌孫曰: "世宗朝, 每於農月常禁用酒, 以民庶艱食也。" 上曰: "近日漕船多敗沒, 予甚痛慮, 禁酒可也。" 悌臣又啓曰: "觀射近於戲事, 前日慶會樓下觀射時, 上亦與宗親耦射, 古云: ‘大陽不可下同萬物, 人主不可與臣下較其長短。’ 其耦射之際醉酒之間, 宗親豈盡肅恭之禮?" 上曰: "此乃家人禮, 當以和爲主。 世宗嘗與宗親爲擊捧戲, 故今亦有此擧也。" 仍問左右, 昌孫對曰: "武才不可廢也。 史稱漢 文之德曰: ‘苑囿罷矣, 上林之射不息’, 此亦美談也。"
【史臣曰: "昌孫之對失矣。 射藝信不可廢也, 然豈必人主親射然後爲不廢哉? 漢 文 上林之射, 固非與臣下耦射之謂也, 昌孫引之以爲美談何耶?"】
- 【태백산사고본】 14책 91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83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행행(行幸) / 왕실-경연(經筵)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농업-전제(田制) / 사상-불교(佛敎) / 재정-역(役) / 건설-건축(建築) / 풍속-예속(禮俗) / 사법-법제(法制) / 역사-사학(史學)
- [註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