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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91권, 성종 9년 4월 20일 신해 2번째기사 1478년 명 성화(成化) 14년

서거정이 남효온의 상소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 죄를 물어 처리하기를 제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서거정(徐居正)이 아뢰기를,

"신이 《예기(禮記)》를 보건대, 양로연(養老宴)은 반드시 국학(國學)319) 에서 하고 교예(校藝)·습사(習射)도 국학에서 한다고 하였으니, 국학은 예의(禮義)의 땅이며 풍속 교화가 나오는 근원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여러번 반궁(泮宮)에 거둥하여 몸소 선성(先聖)에게 석전(釋奠)을 행하고 인하여 취사(取士)하시며, 대사례(大射禮)·양로연(養老宴)·걸언(乞言)320) 과 같은 오랜 세대에 없어졌던 법을 모두 거행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전하께서 몸소 행하여 표솔(表率)하심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므로 유풍(儒風)이 마땅히 바를 것인데 오히려 바르지 못함이 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진실로 사표(師表)가 적당한 사람이 아닌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요즘 이육(李陸)이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유생들은 이육이 종아리 때리는 것을 매우 엄하게 한다 하여 관(館)을 비우고 돌아갔으니, 사습(士習)이 바르지 못함을 진실로 알 수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혹은 벽에 글을 쓰기도 하고 혹은 형상을 그려서 사장(師長)을 조롱하였으니, 사람은 세 분의 은혜321) 로 살므로 이를 섬기기를 한결같이 해야 할 것인데, 스승을 조롱함은 바로 그 아버지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남효온(南孝溫)의 상소에 이르기를, ‘내가 저 사람에게서 도(道)를 배우려고 하나 저 사람은 도가 없고 내가 저 사람에게 학업(學業)을 물으려고 하나 저 사람은 학업이 없다.’고 하였으니, 사장(師長)을 업신여기고 기롱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무리가 고담 이론(高談異論)을 좋아하여 사람의 귀를 놀라고 미혹(迷惑)하게 하였으니, 이러한 풍습을 조장할 수는 없습니다. 남효온도 성균관에서 배운 자이니, 유진(兪鎭)이 오래 스승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남효온이 반드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인데, 이에 유진을 가리켜서, ‘몸이 옥당(玉堂)에 있고 지위가 당상(堂上)에 이르렀으며 녹(祿)이 또한 후한데, 한 명의 누이를 포용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유진의 악덕(惡德)을 극언(極言)하였으니, 만약 이를 징계하지 아니하면 다투어 서로 본받아 습관이 쌓이고 풍속을 이루어서 마침내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국가의 일을 대간(臺諫)과 조사(朝士)가 말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남효온은 한낱 유생으로서 감히 말하였으며, 큰소리하기를 좋아하여 말을 꾸미고 이름을 낚아서 매진(媒進)의 계책을 삼으니, 이같은 신진(新進)의 부박(浮薄)한 선비를, 원컨대 전하께서는 알아서 제어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효온은 지나친 말이 많았다. 소릉(昭陵)을 다시 세우는 일은 신자(臣子)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좌승지(左承旨) 손순효(孫舜孝)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구영안(丘永安)이문(李聞)의 딸을 간통할 때에 남효온도 따랐다고 하니, 그 말과 행실의 다름이 이와 같습니다. 남효온의 상소에 경연(慶延)을 경제(經濟)의 재주라고 말하였고, 심원(深源)의 상소에는 경연을 사직(社稷)의 기국(器局)이라고 말하여 두 상소의 말이 서로 같으니, 그 일당(一黨)인 듯합니다."

하였고, 서거정은 말하기를,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말기에 처사(處士)들이 횡의(橫議)하자 천하가 드디어 어지러워졌고, 동한(東漢) 말기에 이응(李膺)·진번(陳蕃)의 무리를 그때 사람들이 붕당(朋黨)으로 지목하여 고주준급(顧廚俊及)322) 의 이름이 있었는데, 후세에 의논하는 자가 어질다고 하나, 신은 한(漢)나라가 이 때문에 쇠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송(宋)나라 때에는 촉당(蜀黨)과 낙당(洛黨)이 있어서 서로 배척하였으므로 송나라가 이때문에 떨치지 못하였으니, 대저 한낱 선비가 사람의 잘잘못을 비평하고 천하 국가를 의논하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정원에서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였으나 내가 이미 구언(求言)하였기 때문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만약 국문하여 죄를 주면 신하가 감히 말하지 못하여 하정(下情)을 상달(上達)할 길이 없을까 두렵다."

하였다. 영사(領事)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소릉(昭陵)을 다시 세우는 일은 더욱이 신자(臣子)가 감히 말하지 못할 바입니다. 청컨대 국문하소서."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구언(求言)하고서 또 국문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安寬厚)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구언(求言)의 전교를 내렸으므로, 말이 옳은 것은 쓰고 옳지 못한 것은 버리는 것이 옳은데, 이제 만약 국문하면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남효온의 말을 죄주는 것은 불가(不可)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91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8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사상-유학(儒學)

  • [註 319]
    국학(國學) : 성균관.
  • [註 320]
    걸언(乞言) : 노인(老人)에게 착한 가르침을 구함.
  • [註 321]
    세 분의 은혜 : 부모[父]가 낳아서 기르고, 스승[師]이 가르치며, 임금[君]이 먹여 살리는 은혜를 말함.
  • [註 322]
    고주준급(顧廚俊及) :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천하의 명사(名士)들을 일컫는 말로, 팔고(八顧)·팔주(八廚)·팔준(八俊)·팔급(八及)을 이르는 것임.

○御經筵。 講訖, 同知事徐居正啓曰: "臣觀《禮記》, 養老必於國學, 校藝習射亦於國學, 國學, 禮義之地, 風敎之所自出也。 殿下卽位以來, 屢幸泮宮, 躬奠先聖, 因以取士, 如大射禮ㆍ養老ㆍ乞言, 曠世墜典靡不畢擧, 殿下躬行表率至矣! 儒風宜正, 而猶有未正, 此無他, 良由師表非其人也。 比者李陸爲大司成, 儒生以楚撻頗嚴, 空館而歸, 士習不正固可知矣。 非特此也, 或書壁或圖形, 以譏師長, 人生於三事之(女)〔如〕 一, 譏師長, 是譏其父也。 今聞南孝溫上疏云: ‘我於彼學道, 則彼無道, 我於彼問業, 則彼無業’, 是慢譏師長也。 如此之徒, 好爲高談異論, 駭惑人聽, 此風不可長也。 孝溫亦學於成均館者也, 兪鎭久在師席, 孝溫必受訓誨, 而乃指身: ‘居玉堂, 位至堂上, 祿亦厚矣, 不能容一妹’, 極言惡德。 若此不懲, 則爭相慕効, 積習成風, 終莫能止矣。 且國家之事, 臺諫與朝士言之則可矣, 孝溫以一介儒生敢言之, 好爲大言, 飾詐釣名, 以爲媒進之計, 如此新進浮薄之士, 願殿下知而馭之也。" 上曰: "孝溫過言多矣。 昭陵復立事, 臣子所不可言也。" 左承旨孫舜孝曰: "臣聞丘永安李聞女子時, 孝溫亦從之, 其言行之殊如此。 孝溫疏言慶延經濟之才, 深源疏言慶延社稷之器, 兩疏之言相同, 疑其一黨也。" 居正曰: "(戰同)〔戰國〕 末處士橫議, 天下遂亂, 東漢之季, 李膺陳蕃之徒, 時人指爲朋黨, 乃有 ‘顧、廚、俊、及’ 之名, 後世議者以爲賢, 而臣則以爲室以之衰也。 時有蜀黨、洛黨, 互相排斥, 室以之不振。 大抵一箇之士臧否人物議天下國家, 固非美事也。" 上曰: "承政院請鞫之, 予旣求言故不允。 若鞫而罪之, 則恐臣不得敢言, 而下情無由達矣。" 領事韓明澮啓曰: "昭陵復立之事, 尤臣子所不敢言也。 請鞫之。" 上曰: "求言而又鞫之, 可乎?" 大司諫安寬厚啓曰: "殿下旣下求言之敎, 言之善者用之, 其不善者舍之可也。 今若鞫之, 則群臣無敢言者, 孝溫之言不可罪也。" 上曰: "然。"


  • 【태백산사고본】 14책 91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8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