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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91권, 성종 9년 4월 8일 기해 4번째기사 1478년 명 성화(成化) 14년

심원이 국가의 정황에 대해 상소하다

주계 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이 상서(上書)하였는데, 이러하였다.

예전에 상(商)나라 탕왕(湯王)은 여섯 가지 일로 자기를 꾸짖자,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221) , 송(宋)나라 경공(景公)은 덕(德)있는 말 세 가지를 하자, 형혹성(熒惑星)이 자리를 옮겼다고 하는데222) , 이제 전지(傳旨) 가운데의 열 가지 일은 오늘날의 깊은 병통이 아닌 것이 없으니, 전하께서 이미 아시는데 신이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구언(求言)의 전교를 받으니, 마음으로 시사(時事)의 근심할 만한 것을 알면서 어찌 차마 잠자코 있겠습니까? 신이 어릴 때에 농장(農莊)에서 자라서 백성의 일을 눈으로 보았는데, 농부와 홍녀(紅女)223) 의 어렵고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무릇 조도 경비(調度經費)는 비록 나라의 정한 제도가 있어서 일찍이 많이 거두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겠지만 탐학(貪虐)한 수령과 간교한 아전들이 별도로 많은 명목을 만들어서 함부로 거두는 것은 어찌 능히 다 금하였겠습니까? 깊고 먼 시골의 백성들은 일찍이 발길이 성읍(城邑)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진실로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지라도 능히 현리(縣吏)에게 스스로 분변하는 자가 적은데, 하물며 능히 자사(刺史)의 뜰에 가서 스스로 분변하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백성이 궁해도 〈세금〉 거두는 것은 더욱 급하게 하니, 아아 전하께서 비록 어진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인자하다는 소문이 있으면서도 백성들이 은혜를 입지 못하고 사정(事情)이 위에 통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또 권문(權門)의 종[奴]들이 재산을 많이 저축하여 때를 타서 사채(私債)를 거두고 놓는데, 이식(利息)을 취하는 것이 절도가 없으며 추수함에 미쳐 빚을 독촉하는 무리가 연달아 와서 집 주인의 위엄을 빌어 호소할 데 없는 백성을 침해하므로, 개와 닭도 편히 쉬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농가에서는 풍년의 괴로움이 흉년보다 심하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원망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근래에 고을에서 군사를 징발하는 데에 비록 친상(親喪)을 당하여 3년상(三年喪)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탈정 기복(奪情起復)224) 한다고 하니, 심히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사(有司)에서 풍수설(風水說)의 요망한 말에 의거하여 국도(國都)에 관계가 있는 산기슭의 땅에는 모두 사람의 집짓는 것을 금하고 혹은 이미 지은 집을 철거까지 한다고 하니, 후손에게 남길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전하는 군사에게 상제(喪制)를 마치도록 허락하여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산기슭의 인가(人家)를 금하지 말게 하여 요사한 말을 물리치며, 권문(權門)의 사채(私債)를 금하여 궁한 백성을 살게 하소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약 사채를 금하면 가난한 자가 의뢰할 곳이 없으니, 아직 그대로 두어서 궁(窮)하고 굶주리는 것을 구제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궁한 백성을 진제(賑濟)하는 것은 바로 수령의 책임이며 권문에서 사사로이 할 바가 아닙니다. 예전에 대부(大夫)의 집에서는 닭·돼지를 기르는 이(利)도 살피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사채를 놓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백성 가운데 사천(私賤)이 십중팔구가 되고 양민(良民)은 겨우 한둘 뿐인데, 편하고 부유(富裕)한 자는 모두 사천이고 빈곤한 자는 모두 공천(公賤)과 양민입니다. 그러한 까닭은 무릇 수령이 부임할 적에 공경 대부(公卿大夫)의 아는 이나 알지 못하는 이가 모두 술과 고기를 가지고 전송하면서 그 노비(奴婢)를 잘 보호해 주기를 청하니, 상하(上下)에서 풍속을 이루어 이름하여 ‘칭념(稱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령이 된 자는 모두 그 문벌(門閥)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무릇 공역(公役)이 있으면 공천과 양민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고 사천에게는 미치지 아니하므로, 양민과 공천은 견디지 못하여 대개 도망쳐 숨어서 사천에게 품팔이하는 자가 많으니, 비록 대대로 전(傳)하는 땅과 집이 있을지라도 보존하지 못하고 모두 권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천은 날로 편하고 부유하며, 향린(鄕隣)의 생활할 바를 잃는 것을 이용하여 무릇 환난(患難)이 있으면 다투어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데, 하물며 서로 구호하겠습니까? 이로써 양민과 공천은 날로 더욱 유리(流離)하여 부자(父子)가 서로 보호하지 못하고 부부가 서로 돌보지 못하니, 민생(民生)의 어려움이 오늘보다 심함이 없으며, 나라의 근본이 튼튼하지 못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신이 살피건대, 지금 경외관(京外官)의 고만(考滿)225) 의 오래고 빠름이 이미 다른데,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처음에 하교(下敎)하기를, ‘육조 낭관(六曹郞官)으로 고만(考滿)한 자는 모두 수령으로 제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지하고 행하지 아니하시니, 이로써 수령의 임명이 더욱 천해졌고, 또 수령에서 경직(京職)에 제수된 자가 얼마 안 되어, 또 수령에 임명되면 두 번 세 번 보외(補外)226) 되어 오랫동안 승직(陞職)되지 않으니, 수령이 된 자가 어찌 불우(不遇)함을 탄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조금의 재예(才藝)가 있거나 세력을 가진 자는 모두 수령이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니, 만일 어버이를 위하는 자가 아니면 대개는 불령(不逞)하고 무식(無識)한 무리로서 처자(妻子)를 먹여 살리기 위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백성들에게 함부로 세금을 거두어 사리(私利)를 취하고 권세가(權勢家)에게 뇌물을 주는 것만 알 뿐이니, 그 임금의 근심을 나누어서 다스림을 함께 하며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는 일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번 김주(金澍)의 일이 또한 징험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지금 수령들의 예사 일인데, 단지 김주만 불행히 실패하였을 뿐이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수령이 될 만한 사람을 얻기가 또한 어렵지 아니하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고만(考滿)의 월수(月數)를 개정하여 경외관(京外官)의 차이가 없게 하여, 수령으로서 고만한 이는 먼저 육조 낭관으로 제수하고 육조의 고만(考滿)한 자는 먼저 수령으로 제수하며, 또 좌병(座屛)227) 에 8도 고을의 수령의 이름을 써서 상시로 보고 살피며, 가끔 제비를 뽑아서 공명 정직(公明正直)하고 대체(大體)를 잘 아는 신하를 비밀히 보내어 바로 그 고을에 이르러 백성의 병폐를 조사하여서 출척(黜陟)을 가하면, 수령의 탐혹(貪酷)함이 없어지고 순리(循吏)228) 가 많아질 것입니다. 지금 비록 어사(御史)를 보내지만, 맡는 바가 많고 전교를 받는 것이 은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명(綸命)229) 이 겨우 내리자마자 소문이 먼저 이미 사방에 전달되니 아무리 밝게 살피는 어사일지라도 어디로 쫓아가서 거핵(擧覈)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감사(監司)가 된 자가 모두 말하기를, ‘한 도의 수령이 최(最)230) 에 해당되는 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만약 참되게 출척(黜陟)한다면 온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허다한 고을의 뒤에 와서 현재의 수령을 대신할 자도 이와 같지 아니할 것을 어찌 알겠는가? 모두 내치면 맞이하고 전송하는 폐단만 더할 것이니, 차라리 용납해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인순고식(因循姑息)하여 풍속을 이루었으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물며 감사가 갈리는 것은 겨우 주기(周期)231) 이니, 고을을 순행해 살피는 것이 겨우 한두 번에 지나지 아니하는데, 어찌 능히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다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허물로써 갑자기 출척(黜陟)을 가한다면, 어찌 그릇되지 아니하겠습니까? 지금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감사를 신중하게 임명하여 그 벼슬에 오래 있게 하고 기년(期年)으로 바꾸지 말게 하면,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출척이 그릇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땅이 좁아서 반드시 유현(遺賢)232) 이 없을 것이다. 만일 있다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나, 신은 홀로 그렇지 아니하다고 생각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십실(十室)의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이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만이 어찌 홀로 그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오직 좌우에게 구하기를 독실히 아니하고 쓰기를 오로지 아니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신이 듣고 보아 기억하는 자도 오히려 두서넛이 있으니, 함양현(咸陽縣)에 사는 정여창(鄭汝昌), 태인현(泰仁縣)에 사는 정극인(丁克仁), 은진현(恩津縣)에 사는 강응정(姜應貞)이라고 하는데, 모두 성현(聖賢)의 무리입니다. 신의 듣고 본 바로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천만 사람의 듣고 보는 것이겠습니까? 아아! 부열(傅說)233)고종(高宗)234) 을 만나지 아니하였으면 일개 농부(農夫)로 있었을 것이며, 여상(呂尙)235)문왕(文王)을 만나지 아니하였으면 일개 어옹(漁翁)일 뿐이었을 것인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신이 또 보건대, 효자 경연(慶延)은 사직(社稷)의 기국(器局)이며 백리지재(百里之才)236) 가 아니므로, 전하께서 특별히 불러 보시자 당시에 중외(中外)의 유식한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한 세대가 흥(興)하는 데는 반드시 한 세대의 신하가 있는 것인데, 성상이 성명(聖明)하여 즉위한 날이 오래되었으나 아직 인재를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경연을 불러 보시니 반드시 합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급을 뛰어 올려서 6품 벼슬을 임명하자 듣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장차 크게 쓰고자 하기 때문에 두루 거쳐서 시험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며, 궁촌(窮村)의 등용되지 못한 선비들이 모두 격앙(激昻)하여 목을 늘이고 기다렸는데, 마침내 이산 현감(尼山縣監)으로 돌아가자 듣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침정(沈靜) 온후(溫厚)하며 편벽(便辟)하고 첩급(捷給)237) 한 재주가 없어서 세상에서 물리치는 바가 되었으니, 진실로 슬프고 한스럽다. 젊어서 벼슬을 구하지 못하고 늙어서 벼슬에 오르면 마침내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6기(六期)238) 를 지나면 이미 지나치게 늙을 터인데, 생애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한즉 이 일은 자못 선비를 권려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 인재 얻는 문(門)이 적지 아니하니, 이를테면 과거(科擧)·보거(保擧)239) ·이임취재(吏任取才)·음취재(蔭取才) 등의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는 학문(學文)은 많으나 실무(實務)의 경험은 적으며, 보거는 인아(姻婭)240) 의 연고가 아니면 뇌물과 청탁의 무리이며, 이임취재와 음취재는 가벼이 보고 마음을 쓰지 아니하니 한갓 문구(文具)241) 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로써 인재를 얻고자 한다면 소홀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전하께서 본래 마음을 알고 있는 덕(德)이 높은 선비를 불차탁용(不次擢用)242) 하여 좌우에 두고, 각각 덕업(德業)이 충분히 갖추어져서 족히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가 있으면 천거하게 하며, 그 다음은 뜻이 독실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마음이 어질고 행실이 닦여진 자를 모두 인견(引見)하고 경사(經史)와 시무(時務)를 물어서 과연 어진가를 살핀 뒤에 임용(任用)하면 천거하는 자가 사사로이 쓰이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세종조(世宗朝)에는 공경 대부(公卿大夫)로 부유(富裕)한 자가 심히 드물었고 풍속이 검소함을 숭상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제까지도 이를 칭송하는데, 이제는 위로는 공경 대부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에까지 호협(豪俠)한 자들이 서로 화식(貨殖)하기를 다투어서 작은 이익을 극진히 헤아리며 사치를 서로 숭상하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여 남과 같게 하기를 애쓰며, 잔치에는 먼 지방의 진미(珍味)가 상에 가득하고 혼인에는 먼저 장획(臧獲)243) 재산을 논하기 때문에, 시속(時俗)을 따라 사치를 아니하는 자가 드뭅니다. 퇴폐한 풍속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합니다. 신은 청컨대 공경 대부들에게 모든 사치에 관계되는 일을 일체 금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전고(前古)의 제왕(帝王)으로 어진 이를 써야 옳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으나, 그 누가 어진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으며 알게 됨에 미쳐서는 또 뜻이 맞지 아니함이 많았습니다. 간사한 이를 버려야 옳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으나, 그 누가 간사한가를 알지 못하였으며 알게 됨에 미쳐서는 또 용인(容忍)함이 많아서 나라를 망하는 데에 이르게 한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모르기는 하나, 전하께서는 지금의 집정자(執政者)를 모두 어질다고 여기십니까? 어진 이와 어질지 못한 이가 섞였다고 여기십니까? 비록 어질지 못한 이가 많으나 어진 이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부득이하여 인원을 갖춘 것이라고 하십니까? 또는 조종(祖宗)께서 이미 전에 들어 써서 〈전하께〉 주었으므로 마땅히 어질고 어리석음을 묻지 아니하고 아울러 용납하여 조종의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당(唐)나라 요(堯)임금 같은 성인(聖人)은 간사한 이와 광관(曠官)244) 을 용납하는 실수가 없었을 듯하나, 사흉(四凶)245) 이 벼슬에 있었으므로 다음의 순(舜)임금이 곧 이들을 죄주었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세조(世祖)와 당나라 태조(太祖)는 모두 창업(創業)한 불세출(不世出)의 임금이라 마땅히 사람을 임명하는 데에 실수가 없었을 것이라 하겠으나, 한 때의 공신(功臣)이 끝내 몸을 보전하지 못하거나 혹은 벼슬을 맡지 못하였으며, 혹은 그 병권(兵權)을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보면 비록 조종의 훈신일지라도 진실로 이윤(伊尹)246) ·여상(呂尙)·자방(子房)247) 같은 무리가 아니면 권세를 빌려 주어서 은혜를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진평(陳平)248) 의 재주는 가히 더불어 초(楚)나라를 도모할 수는 있었으나 더불어 수성(守成)249) 할 수는 없었으니, 기묘한 계책은 많으나 그 중(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조께서는 하늘이 준 용지(勇智)와 일월(日月)처럼 밝음으로써 사람을 쓰는 데에 구비(具備)한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한 가지 재주에 이름이 있는 자는 쓰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한 때의 선비가 반린부익(攀鱗附翼)250) 하여 모두 등용되었는데, 이제 성명(聖明)이 세조에게 미치지 못하면서 그 신하들을 모두 쓰고자 하니, 그 벼슬을 옮기는 즈음에 어긋나고 잘못됨이 없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세조께서 무인년251)예종(睿宗)에게 훈계하시기를, ‘나는 어려움을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할 것이다. 일은 세상을 따라 변하는 것인데, 만약 네가 내 행적(行跡)에 국한되고 변통할 줄을 모르면, 이른 바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워 맞추는 격이다.’라고 하셨고, 《전(傳)》에 이르기를, ‘사시(四時)의 차례는 공(功)을 이루어 놓은 자는 물러난다.’고 하였으며,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가 총애(寵愛)와 이익으로 이루어 놓은 공(功)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나라는 영구히 아름다움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전하는 살피소서.

아아! 예로부터 임금은 누구라도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굽은 사람을 버리고자 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거처가 존귀(尊貴)하고 몸을 엄하게 가지며 여러 신하와 더불어 접하는 데에는 절차가 있으니, 단정하고 공손하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응대(應對)에 능숙하고 말을 꾸며서 잘하는 자가 사랑을 받게 되어 혹 간사한 것을 충성된 것으로 여기고 속이는 것을 곧은 것이라 여기니, 이에 주(周)나라 사윤(師尹), 진(秦)나라 이사(李斯), 당(唐)나라 이임보(李林甫)·양국충(楊國忠),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진회(秦檜)·한탁주(韓侂胄)의 무리가 그 뜻을 펴게 된 것입니다. 아아! 그 때를 당하여 임금이 능히 스스로 알고 밝게 펴서 유전(流傳)하지 못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을 슬프게 하였는데, 또한 후세에서 지금을 보는 것이 지금에서 예전을 보는 것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전하는 살피소서.

신이 듣건대 학교는 왕정(王政)의 근본이며 정치를 내는 근원이라고 하는데, 이제 안으로는 국학(國學)252) 으로부터 밖으로는 향교(鄕校)에 이르기까지 스승이 된 자는 거개가 부유(腐儒)로서 겨우 구두(句讀)만을 해득(解得)하였으므로, 비록 10년에 이를지라도 옮겨서 승직(陞職)을 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교화(敎化)가 허물어지고 인재(人才)가 쇠모(衰耗)하여 능히 서로 숭상하지 못하며, 유학(儒學)을 배우는 자는 경서(經書)에 정숙(精熟)한 것을 스스로 누(累)라고 여기며 전적(典籍)·교수(敎授)가 될까 두려워합니다. 지금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어진 공경(公卿)들로 하여금 각각 경서에 밝고 행실을 닦아서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여, 전하께서 모두 인견(引見)하고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그 사람의 고하(高下)에 따라서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관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각도의 향교에 나누어서 가르치게 하며, 국학(國學)에서는 차례로 승천(陞遷)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러서 우천(右遷)253) 하게 합니다. 그리고 일찍이 〈대사성을〉 지낸 자는 또한 지사(知事)의 벼슬로서 윤차(輪次)로 관(館)254) 에 출사(出士)하여 학도(學徒)를 가르치게 하고, 외방(外方)에는 감사(監司)로 하여금 훈도(訓導)를 검핵(檢覈)하게 하여, 그 직책에 능한 자를 추천하여서 교수(敎授)에 보임(補任)하고, 교수로서 그 직책에 능한 자는 매년 각도에서 1인씩 초탁(超擢)255) 하여 서용(敍用)하게 하며, 고(考)에 비록 한 번이 중(中)일지라도 파출(罷黜)하여 풍속과 교화를 진흥시키소서.

전하께서 즉위(卽位)한 이래로 공(功)이 같아도 상(賞)을 주는 것에 높고 낮음이 있었으며, 죄는 같은데 형벌에 가볍고 무거움이 있는 것이 많았으니, 어찌 상벌(賞罰)이 적중함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부렴(賦斂)이 과중한 것과 공역(工役)이 번거로운 것과 혼인이 때를 잃는 것과 하정(下情)256) 이 위에 통하지 못하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수령의 근본은 감사에게 있는데, 감사를 옳은 사람을 얻고 상벌이 적중함을 얻는 것은 쓰고 버리는 여하에 달렸습니다. 지금의 폐단을 구제하려는 자들이 모두 법을 엄하게 하고자 하는데, 법이 세밀할수록 폐단이 많은 것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전 진(秦)나라 말기에 이미 옳은 사람을 얻지 못하고 다만 법에만 맡기니 법 밖의 간사함이 심하므로, 법이 세밀하지 못하다고 하여 다시 가혹하고 엄한 법을 만들어서 그 흐름이 백성으로 하여금 수족(手足)을 놓을 바가 없게 하여 〈나라가〉 흙이 무너지는 듯한 형세가 되어 구(救)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겠습니까? 인재를 얻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인재를 얻는 것이 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바지함이 학교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하며, 사람들이 모두 학교가 근본이 되는 것은 알면서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동중서(董仲舒)257) 가 말하기를, ‘임금이 된 이는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며,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백성을 바르게 하면, 멀고 가까운 지방이 감히 한결같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어서, 요사한 기운이 그 사이를 틈탈 수 없고 음양(陰陽)이 순조롭고 풍우(風雨)가 때를 맞춘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천 년 토록 바뀌지 아니할 정론(定論)입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 여기에 뜻을 두시면, 오늘의 재이(災異)가 상탕(商湯)의 가뭄이나 태무(太戊)상곡(桑穀)258) 과 같이 다시 종묘(宗廟)와 생민(生民)의 복이 되지 아니할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 【태백산사고본】 14책 9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7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사법-법제(法制) / 풍속-풍속(風俗) / 신분-천인(賤人)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221]
    상(商)나라탕왕(湯王)은 여섯 가지 일로 자기를 꾸짖자,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 : 상(商)나라 탕(湯)임금이 즉위하자 7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으므로, 스스로 재계(齋戒)하고 회생이 되어 상림(桑林)에서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 스스로 꾸짖었더니, 천리에 구름이 모여들어서 수천 리의 땅을 적셨다는 고사.
  • [註 222]
    형혹성(熒惑星)이 자리를 옮겼다고 하는데 : 춘추 시대 송(宋)나라 경공(景公) 때에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침범하니, 경공이 이를 근심하여 사성(司星) 자위(子韋)를 불러 물었는데, 경공이 자위와 더불어 말하면서 덕(德)있는 말 세 가지를 하였더니, 자위가, "하늘이 반드시 인군(人君)께 세 가지 상(賞)을 내려서 오늘 저녁에 마땅히 형혹성이 30리[舍]를 옮겨 갈 것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이날 저녁에 형혹성이 30리를 옮겨 갔다고 하는 고사. 형혹성이 나타나면 재화(災禍)가 일어난다고 함.
  • [註 223]
    홍녀(紅女) : 길쌈하는 여자.
  • [註 224]
    탈정 기복(奪情起復) : 상중에 벼슬에 나가는 일.
  • [註 225]
    고만(考滿) : 관리의 임기가 찬 것.
  • [註 226]
    보외(補外) : 높은 지위에 있는 관원(官員)이 잘못이 있을 때에 지방의 수령(守令)으로 좌천(左遷)시켜서 징계(懲戒)하는 일.
  • [註 227]
    좌병(座屛) : 자리에 치는 병풍.
  • [註 228]
    순리(循吏) : 법을 잘 지키고 열심히 일하는 수령.
  • [註 229]
    윤명(綸命) : 임금의 명령.
  • [註 230]
    최(最) : 전최(殿最), 즉 고사(考査)의 상등을 말함. 전최라는 것은, 관찰사가 각 고을 수령(守令)의 실적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일로서, 성적을 고사할 때 상(上)을 최(最), 하(下)를 전(殿)이라고 하여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였음.
  • [註 231]
    주기(周期) : 만 1년.
  • [註 232]
    유현(遺賢) : 등용되지 않은 어진 이.
  • [註 233]
    부열(傅說) : 은(殷)나라 때 정승.
  • [註 234]
    고종(高宗) : 은나라 임금.
  • [註 235]
    여상(呂尙) : 주(周)나라 강태공(姜太公).
  • [註 236]
    백리지재(百里之才) : 고을을 다스릴 만한 제능.
  • [註 237]
    첩급(捷給) : 민첩하고 말에 능숙함.
  • [註 238]
    6기(六期) : 6년의 임기.
  • [註 239]
    보거(保擧) : 높은 관원이 담당 관아(官衙)의 관원 가운데에서 재주가 있거나 공로가 많은 사람을 자기가 책임지고 임금에게 천거하던 일.
  • [註 240]
    인아(姻婭) : 사위 집 편의 사돈 및 동서 집 편의 사돈의 두루 일컬음. 사위의 아버지 곧 사돈을 인(姻)이라 하고, 여자 형제의 남편끼리 곧 동서끼리를 아(婭)라고 함.
  • [註 241]
    문구(文具) : 형식적인 이름만 있는 것.
  • [註 242]
    불차탁용(不次擢用) : 차례를 밟지 않고 벼슬에 올려서 씀.
  • [註 243]
    장획(臧獲) : 종.
  • [註 244]
    광관(曠官) : 직무를 태만히 하는 관리.
  • [註 245]
    사흉(四凶) : 요대(堯代)의 네 사람의 악인(惡人). 공공(共工)·환도(驪兜)·삼묘(三苗)·곤(鯀)을 일컬음.
  • [註 246]
    이윤(伊尹) : 은(殷)나라의 유명한 재상.
  • [註 247]
    자방(子房) : 한(漢)나라 창업 공신인 장양(張良).
  • [註 248]
    진평(陳平) : 한(漢)나라 개국 공신.
  • [註 249]
    수성(守成) : 창업한 나라를 지킴.
  • [註 250]
    반린부익(攀鱗附翼) : 용의 비늘을 끌어 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는다는 뜻으로, 영주(英主)를 섬겨 공명(功名)을 세우는 것.
  • [註 251]
    무인년 : 1458 세조 4년.
  • [註 252]
    국학(國學) : 성균관.
  • [註 253]
    우천(右遷) : 높은 자리로 영전함.
  • [註 254]
    관(館) : 성균관.
  • [註 255]
    초탁(超擢) : 남을 뛰어 넘어 뽑아 씀.
  • [註 256]
    하정(下情) : 민정(民情).
  • [註 257]
    동중서(董仲舒) : 전한(前漢) 때의 학자.
  • [註 258]
    상곡(桑穀) : 은(殷)나라 태무(太戊:中宗) 때에 뽕나무와 닥나무 두 그루가 조정에 났는데, 하루 저녁에 한 아름이 되었다. 임금이 이를 두려워하여, 재상 이척(伊陟)의 말에 따라 덕(德)을 닦았더니, 두 그루의 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고사.

朱溪副正 深源上書曰:

商湯以六事自責, 而天乃雨, 景公有善言三, 而熒惑徙舍。 今傳旨中十事, 無非今日之深患, 而殿下旣知之, 臣復何言? 然承求言之敎, 心知時事之可憂, 而安忍默默也? 臣少時長於農莊, 目覩民事, 其農夫紅女之艱苦, 不可勝言。 夫調度經費, 雖曰國有定制未嘗厚斂, 而貪宰猾吏別作多少物目, 橫斂濫收者, 其能盡禁歟? 幽遠之民, 其足迹未嘗至城邑, 苟有不得其所, 能自辨於縣吏者鮮矣, 況能自辨於刺史之庭乎? 由是民窮而斂愈急, 嗚呼! 在殿下雖有仁心仁聞, 而民不被澤, 情不上通者, 良以此也。 又有權門僕隷, 多蓄私債, 乘時斂散, 取息無度, 迨秋成, 督逋之徒項背相望, 假家主之威, 侵虐無告, 雖雞犬亦不得寧息。 故農家豐年之苦, 甚於凶年, 奈之何民不窮且怨也? 臣聞近來州郡之發兵也, 雖有親喪願行三年者, 竝奪情起復, 甚非美事也。 臣又聞有司據風水妖說, 乃於國都有干山麓之地, 幷禁人作舍, 或至撤已構家, 甚非燕翼昭謀之道也。 願殿下許軍士終喪制, 以敦風俗, 勿禁山麓人家, 以闢邪說, 禁權門私債, 以蘇窮民。 或曰: "若禁私債, 則貧者無所仰給, 莫若姑存之, 以救窮餓", 臣以爲不然。 賑濟窮民, 乃守令之責, 非權門所得私也。 古者大夫之家, 雞豚且不察, 況私債乎? 今者齊民之中, 私賤十居八九, 良民僅一二, 而安富者摠是私賤, 貧困者摠是公賤(是公賤)與良民, 所以然者, 凡守令之赴任也, 公卿大夫知與不知, 皆持酒肉而餞之, 請其奴婢完護, 上下成俗, 名之曰: "稱念。" 爲守令皆亦多出於其門, 故不敢不從, 凡有公役, 皆令公賤良民當之, 不及於私賤, 良民公賤不能支, 率多逃遁, 以傭諸私賤, 雖世傳田宅亦不能保, 盡歸諸權門。 由是私賤日益安富, 而利其鄕隣之失所, 凡有患難, 爭相擠陷, 況於相周乎? 以是良民公賤日益流離, 父子不相保, 夫婦不相顧, 民生之艱, 莫甚今日, 邦本可謂不固矣。 臣按今之京外官考滿之久速旣異矣, 而殿下卽位之初, 下敎曰: "六曹郞官考滿者, 幷除守令。" 俄而寢不行, 以是守令之任益賤, 而又自守令除京職者未幾, 而又任守令再三補外, 久未陞職, 則爲守令者安得無坎壈之嘆? 故稍有才藝挾勢者, 咸不願守令, 苟非爲親者, 則率皆不逞無識之徒, 爲妻孥口腹之養者, 但知橫斂於民, 以營私賄權而已。 其於分憂共理, 勤政恤民, 末如之何。 曩者金澍之事亦驗矣。 人皆曰: "此當今守令之常事也, 但金澍不幸見敗耳。" 然則守令之得人, 不亦艱哉? 臣請改考滿月數, 不使京外官有異, 而守令考滿者, 首除六曹郞官, 六曹考滿者, 首除守令, 而又於座屛書八道州郡守令之名, 常時觀省, 往往抽籤, 密遣公明正直深知大體之臣, 直抵其郡, 詢訪民瘼, 以加黜陟, 則守令之貪酷戢, 而循吏多矣。 今也雖遣御史, 所掌多而受敎不密, 故綸命纔下而先聲已達於四境, 雖明察御史, 何從而擧覈? 臣聞爲監司者莫不曰: "一道守令當最者有幾? 若誠爲黜陟, 則無全人矣, 許多州郡, 後來繼今者, 又安知不如是也? 與其盡黜以滋迎送之弊, 不若容之爲愈也", 姑息成風, 莫之奈何。 又況監司之遞僅及周期, 巡審州郡不過一再, 何能悉知其賢否也? 猶以一事一過奄加黜陟, 安得不謬也? 爲今之計, 愼任監司而久其職, 不以期遞, 則得以詳知守令賢否, 而黜陟不謬矣。 臣聞人皆曰: ‘我國褊小, 必無遺賢。 如有之, 安得不知?" 臣獨以爲不然。 傳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我國何獨不然? 惟在左右求之不篤, 用之不專耳。 以臣耳目所記, 尙有數三, 居咸陽縣鄭汝昌, 居泰仁縣丁克仁, 居恩津縣姜應貞, 皆聖賢之徒也。 臣所聞見猶且如此, 況以千萬人之耳目乎? 嗚呼! 不遇高宗, 一農夫耳, 不遇文王, 一漁翁耳, 誰得以知之? 臣又見孝子慶延, 社稷之器, 非百里之才也, 殿下特召見之, 當時中外有識者, 皆以爲一 ‘代之興, 必有一代之臣, 上有聖明, 卽位日久, 猶未得人, 而今乃召慶延, 必有所合。’ 俄而超階任以六品職, 聞之者皆曰: "將欲大用, 故歷試耳", 窮村遺逸之士, 莫不激昻, 佇以待之, 竟以尼山縣監歸, 聞之者皆曰: "此人沈靜溫厚, 無便辟捷給之材, 乃爲世所擯, 良可嗟恨。 少不干祿, 臨老待價, 竟何益哉?" 今若經六期, 已過老矣, 生涯幾何? 然則此擧殆非勸士之道也。 今得人之門, 不爲少矣, 有曰科擧, 曰保擧, 曰吏任取才、蔭取才。 然科擧則多文而少實, 保擧則若不是姻婭之故, 是賄謁之徒, 若吏任、蔭取才, 則慢不致意, 徒爲文具耳。 乃欲以此得人, 可謂踈矣。 爲今之計, 擧殿下素所知心碩德之士, 不次擢用, 置諸左右, 令各擧有德業充備足爲師表者, 其次篤志好學, 材良行修者, 皆引見之, 訪以經史時務, 以審其果賢, 然後乃任用, 則薦者不得容私矣。 臣聞在世宗朝, 公卿大夫富者甚鮮, 俗尙儉素, 民到于今稱之, 今也上自公卿大夫, 下至閭巷, 豪俠爭相殖貨, 計盡錙銖, 以華侈相高, 歆羡於人, 營營思齊, 至於燕飮, 則遐方珍味, 狼藉於案, 婚娶則先論臧獲財産, 故不隨俗奢靡者鮮矣。 頹敝風俗, 一至於此, 良可歎也。 臣請公卿大夫凡干華侈之事, 一切禁之便。 臣按前古帝王莫不知賢可用, 而不知其誰爲賢, 及其知也, 又多不合。 莫不知邪可去, 而不知其誰爲邪也, 及其知也, 又多容忍, 以至於敗國者多矣。 臣未知殿下以今執政者爲皆賢耶? 賢不肖混耶? 雖多不肖, 然賢旣不能得, 位旣不可虛, 不得已備員耶? 抑以爲祖宗旣用之於前以貽之, 固當不問賢愚而幷容之, 以不負祖宗之意耶? 唐堯之聖, 似無有容奸曠官之失, 而四凶在位, 乃罪之, 高祖世祖太祖, 皆創業不世之主, 宜無任人之失, 然其一時功臣, 終不能保, 或不任事, 或收其兵權。 觀此則雖祖宗勳臣, 苟非子房之輩, 不可假權而傷恩也。 故陳平之才, 可(興)〔與〕, 而不可與守成, 以其多奇計而未有其中也。 我世祖以天錫勇智日月之明, 與人不求備, 校長量短, 名一藝者無不庸, 故一時之士攀鱗附翼, 而咸得其用, 今聖明不及世祖, 而欲盡用其臣, 無奈遷轉之際舛錯失當耶? 故世祖於戊寅年訓睿宗曰: "予當屯而汝當泰。 事隨世變, 若汝局於吾迹, 而不知變通, 則所謂圓鑿而方枘也。" 傳曰: "四時之序, 成功者去。" 《經》曰: "臣罔以寵利居成功, 邦其永孚于休", 惟殿下察之。 嗚呼! 自古人主誰不欲擧直而措枉? 然居尊持嚴, 其與群臣接之有時, 問對有節, 莫不端恭捷給眩姸沽寵, 故或以奸爲忠, 以詐爲直, 此師尹李斯林甫國忠安石秦檜侘胄之輩, 得以肆其志也。 嗚呼! 當其時人主不能自知, 而昭布流傳, 使哀後人, 又安知後之視今, 不爲今之視古耶? 惟殿下察之。 臣聞學校, 王政之本而出治之源, 今也內自國學, 外至鄕校, 爲師表者, 率皆腐儒, 僅解句讀, 雖至十年, 不見遷陞。 以是敎化陵夷, 人才衰耗, 莫能相尙, 業儒者以精熟經書爲自累, 恐爲典籍敎授也。 爲今之計, 莫若令賢公卿, 各擧經明行修堪爲師表者, 殿下皆引見之, 講經書, 隨其人高下, 爲成均館及四學之員, 其次分敎各道鄕校, 國學則以次陞遷至大司成右遷, 而曾經者, 亦帶知事職, 輪次仕館以敎學徒, 外則令監司檢覈訓導, 而能於其職者薦之補敎授, 敎授而能於其職者, 每年各道各一人超擢敍用, 於考雖一中亦罷黜, 以振風敎。 殿下自卽位以來, 功同而賞有高下, 罪一而罰有輕重者多矣, 豈非賞罰之失中也? 由是觀之, 則賦斂所以重, 工役所以煩, 婚嫁之失時, 下情之不通在守令, 守令之本在監司, 監司之得其人, 刑賞之得其中, 在用舍如何耳。 今之救弊者, 皆欲峻法, 殊不知法密而弊多。 昔之末, 旣不得人而徒任法, 法外之奸滋甚, 則以爲法不密, 乃更爲刻峻, 其流至於吏民無所措手足, 土崩之勢成而莫之救也。 然則何爲而可? 在得人! 人皆知得人之爲急, 而不知其具在學校, 人皆知學校爲本, 而不知其源之有在也。 薰仲舒曰: "爲人君者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遠近莫敢不一於正, 而無有邪氣間其間, 陰陽調而風雨時", 誠千載不易之定論也。 惟聖明留意焉, 則安知今日之沴不如商湯之旱, 大戍之桑更爲宗廟生民之福乎?


  • 【태백산사고본】 14책 9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7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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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사법-법제(法制) / 풍속-풍속(風俗) / 신분-천인(賤人)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